책소개
겔렌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그 철학적 의미를 인간에 대한 물음을 규명하는 객관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인간학은 인간의 형태학적·생물학적 기반을 연구하는 것이며, 나아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수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 특수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결핍’이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하는 데 필요한 특수한 기관들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러므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생존하기에 적합하지도 못하고 특수화되지도 못한 원시적인’ 생물이다. 그리고 이 결함이 바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수한 지위를 규정한다. 형태학적인 면에서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자연이 버린 고아’다. 태어날 때부터 고도로 발달된 특수 기관들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은 그 나름의 생존 방식을 통해 독립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생존을 위한 욕구나 충동이 이미 생득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환경과 유기적으로 생존을 위한 ‘합목적적 운동’을 수행한다. 동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욕구나 충동이 이미 자연적인 상태에서 저절로 주어져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환경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존을 위한 ‘합목적적 운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득적인 합목적적 생존 수단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학적 ‘결함’은 결국 생존 조건의 ‘결여’로 연결된다. 인간에게 자연은 낯선 곳이며, 자연은 결코 인간의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생존 조건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그 길은 하나뿐이다. 생존하기에 부적합한 환경을 적합한 환경으로 바꾸어 가는 수밖에 없다. 인간을 ‘행동하는 존재’로 정의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세계로부터 밀려오는 갖가지 장애를, 행위를 통해 극복하면서 스스로 삶의 조건을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다. 행동하는 존재로서 인간 규정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며 실제의 상태다. 겔렌은 이 엄연한 사실로부터 ‘행위 이론으로서 인류학적 탐구’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탐구의 학문적 성과가 바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최초의 인간과 그 이후의 문화≫다.
200자평
겔렌의 대표적인 저작일 뿐 아니라, 현대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 이론서이자 기술 인간학과 연관된 주요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기술 및 문화 철학은 오늘날 기술 문화를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당면한 현대 사회의 위기를 반성적으로 진단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지은이
1904년 독일 동부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 과정을 마친 후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과 독어학 그리고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물리학과 동물학 등에도 관심을 갖고 청강했다. 그리고 1925년 겨울학기에 막스 셸러(Max Scheler)와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철학적 인간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존재론적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7년 박사과정을 마치고 1930년 <사실적 정신과 비사실적 정신(Wirklicher und unwirklicher Geist)>이란 논문으로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3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한 학기 후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스승 드리슈가 정년퇴임한 자리를 이어받았다.
1940년 겔렌의 첫 번째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인간(Der Mensch)≫을 출판하고, 1942년 그는 독일철학회 회장이 되었다. 긴 공백기를 가진 후 1949년 ≪기술 시대의 영혼(Die Seele im technischen Zeitalter)≫을 출간했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자본주의적 기술 문화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독일에서 실증주의적인 시각에서 기술의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자극제 역할을 한 중요한 성과물이었다.
이후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대표적인 주저는 역시 1956년에 출판된 ≪최초의 인간과 그 이후의 문화(Urmensch und Spätkultur)≫다. 1969년에는 마지막 저서라고 할 수 있는 ≪도덕과 초(超)도덕: 하나의 다원주의적 윤리(Moral und Hypermoral: Eine pluralistische Ethik)≫이 세상에 나왔다.
나치에 대한 참여와 동조로 전후 전범 처리와 관련하여 많은 재판에 출석했으며, 이러한 전력이 그의 철학 자체에 대한 평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문적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오랜 친구였던 사회학자 헬무트 셸스키(Helmut Schelsky)까지도 그를 이해해 주지 못했다. 겔렌의 인생에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40년대 이후, 이런 상황과 연관해 그의 사회적 위상은 현저히 달라졌으며, 결국 1940년대 후반에는 스파이어의 작은 전문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그곳에서 가장 긴 교직생활을 했다. 마지막으로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아헨 공과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1월 30일 함부르크에서 72세의 나이로 하직했다.
옮긴이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 전공으로 서양철학과 사회철학을, 부전공으로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주로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회철학에 관심이 많다. 1984년 동의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어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역서로는 ≪최초의 인간과 그 이후의 문화≫(아르놀트 겔렌), ≪마르크스주의와 문학≫(레이먼드 윌리엄스), ≪독일 관념론 철학≫(니콜라이 하르트만), ≪대중문화의 이해≫(존 피스크),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존 스토리), ≪문학과 문화이론≫(레이먼드 윌리엄스),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존 스토리), ≪논리학 입문≫(어빙 코피), ≪하버마스의 사회사상≫(마이클 퓨지),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그룬트만), ≪의식과 신체≫(P. S. 모리스), ≪헤겔의 변증법≫(N. 하르트만),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E.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존 매쿼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사회생물학,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공저), ≪성의 진화와 그리고 인간의 성문화≫(공저), ≪인성론≫(공저), ≪상생의 철학≫(공저), ≪늦잠 잔 토끼는 다시 뛰어야 한다≫(공저), ≪욕망과 자유≫, ≪철학≫(공저)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1. 서론
2. 도구
3. 실험적 행위
4. 초월성
5. 습관과 습관이 이루어지는 외적 토대
6. 행위
7. 자기 목적으로서의 행위
8. 분업, 제도
9. 제도와 그 내면에 미치는 영향
10. 제도를 통한 인간의 내면적 안정화
11. 상호성
12. 배경적 충족
13. 연출을 통한 외적 세계의 안정화
14. 제도의 의무 내용
15. 충동의 사물화
16. 내적 규범의 생산성
17. 욕구의 방향 설정
18. 안정화된 긴장
19. 문화적 조건의 자명성
20. 정신적인 것
21. 창조적 생산성
22. 자연, 사실적 외부 세계
23. 사실적 내면세계, 주체성
24. 고대의 낯선 모습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오늘날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과거라는 시간의 동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결국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그림자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굴 벽화를 그렸던 빙하기의 거대한 수렵인들은 마치 피카소(Pablo Ruizy Picasso)의 선배들처럼 우리들 앞에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28쪽
제도를 결정하는 심리적·역사적·합리적 조건들은 도식적으로 형식에 부합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완전히 배경으로 물러날 수 있다. 또 그리하여 전혀 새로운 동기의 탄생을 재촉할 수도 있다. 고대에 빈번했던 신들의 이주와 편력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례, 문화 형식, 제사 날짜, 희생 관습, 성직자 제도의 구체적 기준이라고 해야 할 신의 형상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은 단순히 그 의미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습도 완전히 함께 변할 수 있었다.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