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게오르크 카이저의 희곡 〈칼레의 시민〉은 로댕의 동명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된 독특한 기원을 지닌 작품이다. 백년전쟁 당시 항복 조건으로 여섯 명의 시민이 스스로를 인질로 내놓아야 했던 역사적 사건은 카이저의 손에서 표현주의 희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카이저는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 인간 존재의 내면 갈등과 윤리적 선택,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비전을 실험적인 형식에 담아낸다.
칼레의 시장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 희생을 결심한다. 이 숭고한 선택은 곧 또 다른 여섯 명의 시민들에게 전염된다. 여섯의 희생이 필요했지만 총 일곱 시민이 희생을 자처하면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하며 갈등은 심화된다. 카이저는 영웅적 자기희생 이면에 있는 인간적 욕망과 내적 동요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그러나 외스타슈는 끝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빛 속으로 걸어가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시민들은 그 희생을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한다. 카이저는 니체의 초인 사상과 기독교의 이타주의, 플라톤의 대화법을 통합해 새로운 인간 개혁 이념을 외스타슈라는 인물에 담았다. 또한 기존의 사실주의적 무대 형식을 해체하고, 대칭 구조의 상징적 무대와 암시적인 언어, 격정의 절제된 표현을 통해 표현주의 특유의 시적 극을 완성했다.
〈칼레의 시민〉은 전통의 무게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 위의 인간’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관객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200자평
카이저가 로댕의 조각품 〈칼레의 시민〉(1884)에 영감을 받아서 창작한 희곡으로 1346년 영국군이 프랑스 칼레시를 포위했을 때의 이야기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로댕의 예술 작품에 매료된 카이저는 3막의 무대극으로 재구성한 〈칼레의 시민〉으로 1900년을 전후한 세기 전환기 독일 상황과 접목한 새로운 예술 이념을 선보였다. 카이저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한편 1910년대 부상한 ‘표현주의(Expressionismus)’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은이
게오르크 카이저(Georg Kaiser, 1878-1945)
게오르크 카이저는 1878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나 1945년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망명인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표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방대한 희곡 작품을 남긴 작가다. 불우한 유년기를 거치며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새로운 인간에 대한 열망을 품었고, 자연주의와 신낭만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 사조인 표현주의에 자신만의 극작 이념을 더해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청년기엔 남미로 건너가 상인으로 일하며 삶의 실존적 조건과 세계를 직접 체험했고, 이후 독일로 돌아와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흡수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칼레의 시민〉, 〈아침부터 자정까지〉, 〈가스〉 등은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인간 개혁과 새로운 시대를 향한 출발을 주제로, 영웅적 개인이 아닌 윤리적 결단을 통해 세계를 바꾸려는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후 반파시즘과 사회 비판의 성향이 강화되었고 나치 집권 이후 공연과 출판이 금지되자 스위스로 망명해 삶과 예술, 정치적 양심의 괴리 속에서 고뇌했다. 그의 만년 작품들은 시대의 파괴성과 인간 내면의 고통을 응시하며, 신화와 성서를 통해 보편적 진실을 사유하고자 했다. 전쟁과 억압의 시대를 살아낸 이 표현주의 극작가는 오늘날에도 인간의 자유, 윤리, 책임을 묻는 날카로운 언어로 살아 있다.
옮긴이
장영은
장영은은 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同)대학원에서 독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오토-프리드리히-밤베르크 대학에서 〈맑은 날과 궂은날 사이 : 루트비히 티크의 희극론〉으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독일 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방문교수를 했으며, 뮌헨 국제 청소년 도서관의 펠로십을 받았고, 빌라 발트-베르타 재단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과 동화 문학, 아동 청소년 문학과 관련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지은 책으로는 《한독 여성 문학론》(공저,1999), 《독일어권 문화 새롭게 읽기》(공저, 2001), 《유럽 동화 작가론》(2014)이 있고,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는 츠바이크의 《천재와 광기》(공역, 1993),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1994, 2014 개정), 케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1995), 《에밀과 세 쌍둥이》(1995), 《내가 어렸을 적에》(1996), 모니카 펠츠의 《인터넷 나라의 리 씨》(2000), 카이저의 《칼레의 시민들》(2000), 릴케의 《초기 시와 희곡 작품》(2000), 뇌스틀링어의 《그레트헨 자크마이어》(2009), 다프나 주르의 《근대 한국 아동 문학》(공역, 2023)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게오르크 카이저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 : (몸을 곧추세우며 큰 소리로) 그만 착오가 생겼소, 제비뽑기 공들이 그릇 안에서 바뀌어 버렸소. 솔직히 우리는 무척 고통스러웠소. 그런데 이제−우리가 이 제비뽑기를 다시 할 힘이 없구려! (한층 더 힘찬 목소리로) 우리는 내일 아침까지 휴식을 취해야겠소.−(식탁 주위의 사람들에게도)−첫 종이 울리면 각자 모두 집에서 출발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광장 한가운데 도착하는 사람이−희생에서 제외될 것이오!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