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중세 스페인 왕국들의 패권 다툼
12세기 스페인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투쟁, 십자군 원정과 유대인 학살의 불행한 무대였다. 소설의 역사적 배경은 1189년에서 1192년까지 진행된 3차 십자군 원정이다. 이 원정은 술탄 살라딘이 기독교도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하틴 전투가 끝난 2년 후에 시작된 것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황제가 사망하고 사자왕 리처드가 참전한 전쟁이었다. 알폰소 8세는 스페인의 기독교 왕국들을 규합하고 아라곤, 나바라, 레온 그리고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1212년 로스 나바스 데 톨로사 근교에서 무어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는 8세기부터 진행된 스페인의 재정복운동의 전환점이자 스페인 내 아랍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포이히트방거는 그의 소설을 알라르코스 전투의 전후에 집중, 연대기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건들을 결합시키면서 봉건 귀족계급과 신흥 시민계급 간의 긴장 관계와 카스티야와 레온 및 아라곤 왕국 간의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유대 상인 예후다의 재무상으로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고, 2부는 알폰소와 예후다의 딸 라헬의 7년에 걸친 애정 관계, 3부는 예후다와 라헬의 피살과 왕의 변신을 주 내용으로 한다.
유대 여인과 호전적인 카스티야 기사 왕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
카스티야의 젊은 기독교 왕 알폰소는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나라가 붕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무슬림 치하인 세비야의 상인 예후다가 톨레도로 와서 재무장관직을 맡아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다. 예후다는 원래 유대 출신으로 톨레도에서 자신의 뿌리를 되찾는다. 그는 왕을 설득해 새로운 법률들을 제정하고 봉건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한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정책도 추진한다. 특히 프랑스에서 추방된 6천 명의 유대인들을 카스티야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한다. 예후다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파탄 상태에 이른 경제를 재건하는 데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평화를 실현하고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후다는 알폰소가 탐하는 딸 라헬을 왕의 별장인 갈리아나에 첩으로 보낸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깊이 사랑하게 되고, 라헬 역시 용감하고 활달한 왕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느낀다. 알폰소는 전쟁도 왕비도 잊어버린 채 갈리아나에 틀어박혀 라헬과 7년간 행복한 애정 관계를 유지한다.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
알폰소는 봉건귀족들의 사주로 8년간의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칼리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지만 수많은 병력을 잃고, 자신은 몸만 빠져나오는 치욕을 겪는다. 이 전쟁으로 인해 왕비는 연적 라헬을 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이라는 주제에 상응해서 두 그룹으로 나뉜다.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들로는 유대인 재무장관 예후다, 무슬림 의사 무사, 왕의 고해신부인 참사 회원 돈 로드리게가 있고, 여기에 맞서는 위험한 비이성적 인물들로는 톨레도의 대주교 돈 마르틴을 비롯한 봉건귀족들, 왕비 도냐 레오노르, 그리고 알폰소 왕이 있다. 왕은 전쟁에 패배하고 라헬과 예후다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이성적인 인간으로 변신한다.
“1온스의 평화가 1톤의 승리보다 더 소중하다”
알폰소는 미망에서 깨어나, 자신의 오만함과 비이성적 행위를 깨닫고 예후다가 추구한 이상을 좇는다. 그는 카스티야에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지만, 앞으로는 평화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한다. 예후다가 생전에 추구했던 개혁과 위업은 알폰소에 의해 계승된다. 알폰소가 이성적 인간으로 변함으로써, 평화의 원칙이 결국 전쟁의 원칙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그는 라헬과 함께 지낸 별궁 갈리아나의 벽에 새겨진 “1온스의 평화가 1톤의 승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인도주의적 미래를 그려 본다.
포이히트방거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의 세계사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즉 온갖 어려움에도 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전쟁의 월계관을 쟁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 여인 라헬과 기독교 왕 알폰소의 사랑을 통해 두 문화 내지 세 문화의 화해 및 통합 가능성을 내비친다. 이는 유대인이지만 유대 민족주의보다는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작가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포이히트방거는 이 소설을 통해 보다 이성적이고, 보다 도덕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세계의 건설에 동참하고자 한다.
200자평
12세기 스페인, 호전적인 카스티야의 기독교 왕 알폰소와 유대 여인 라헬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얼핏 라헬인 듯 보이지만 실은 그녀의 아버지 예후다가 숨은 주인공이다. 예후다는 이 지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또 자신의 유대 민족을 구하는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알폰소의 재무장관이 되어 봉건귀족들과 구질서로부터 개혁을 추진한다. 자신의 딸도 기꺼이 알폰소의 첩으로 들어앉힌다. 예후다는 작가 포이히트방거가 역사적 사실과 사랑 이야기 뒤에 감추어놓은 메시지다. 즉 온갖 어려움에도 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전쟁의 월계관을 쟁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세 문화의 화해와 통합을 내비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다 도덕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세계의 건설에 동참하고자 한다.
국내 초역이다.
지은이
리온 포이히트방거(Lion Feuchtwanger)
1884년 7월 4일 출생. 뮌헨대학에서 문학, 역사, 철학, 인류학을 공부했다.
연극비평 및 극작가로 출발해 이름을 알리다가 차츰 창작의 중심을 역사소설로 옮긴다. 이렇게 해서 나온 역사소설 <유대인 쥐스>와 <추한 공작부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25년에 발표된 <유대인 쥐스>는 초판 3개월 만에 4만 부가 팔렸으며, 15개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다. 지금까지 <유대인 쥐스>는 전 세계에서 20개 이상의 주요 외국어로 300만 부 이상이 번역 출판되었다. <유대인 쥐스>의 성공으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포이히트방거는 1933년 미국에서 강연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치스가 집권하면서 그의 책들은 불태워지고, 국적 및 박사 학위도 박탈당하며, 베를린의 집과 재산은 압류당한다. 이 시기의 문학적 결실이 <오퍼만 자매>(1933)이다.
1937년 1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인터뷰를 했다. 이로써 스탈린을 찬양하는 기행문 <모스크바>(1937)를 발표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이 서유럽을 침공할 당시 프랑스 남부 엑상 프로방스 인근 레 밀에 머무르고 있던 포이히트방거는 이미 1939년 대전이 발발했을 때 한 번 억류된 적이 있던 그곳 포로수용소에 다시 수감되었다. 미 영사관의 도움으로, 여자로 변장한 채, 간신히 마르세유로 탈출하였다. 그곳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의 체험이 자서전, <잔인한 프랑스>(194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40년 10월 뉴욕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이후 <미국을 위한 무기>(1947/1948),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1951) 그리고 <톨레도의 유대 여인>(1955)을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으로 포이히트방거는 위대한 망명문학의 작가 대열에 합류한다. 1953년에는 동독으로부터 <문학과 예술 분야의 1등 국가상>을 받았다. 1958년 12월 21일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사망, 캘리포니아의 산타 모니카 묘지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김충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했으며, 뷔르츠부르크 대학 및 마르부르크 대학교 방문교수, 체코 카렐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1981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외국문학연구소장, 사범대학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프란츠 카프카: 인간·도시·작품≫, ≪표현주의 문학≫이, 역서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메두사의 뗏목≫, ≪아침부터 자정까지≫, ≪병사 다나카≫, ≪구원받은 알키비아데스≫, 페터 슈나이더의 ≪짝짓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쟁≫,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 프란츠 베르펠의 ≪거울인간≫,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프리드리히 헤벨의 ≪니벨룽겐≫, 슈테판 하임의 ≪6월의 5일간≫, 일제 아이힝거의 ≪더 큰 희망≫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응용미학으로서의 드라마−쉴러의 <빌헬름 텔> 연구>, <신화의 구도 속에 나타난 현재의 정치적 상황−보토 슈트라우스의 드라마 <균형>과 <이타카>를 중심으로>, <최근 독일 문학의 한 동향: 페터 슈나이더의 경우>, <베스트셀러의 조건−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경우> 등이 있다. 그 밖에 독일 표현주의 문학과 카프카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 교수다.
차례
1부
2부
3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그들의 도시를 자랑스러워하는 젊은 대공들은 라헬에게 톨레도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신이 태양을 만든 네 번째 창조의 날에 태양을 바로 톨레도 위에 두어, 이 도시가 지구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톨레도가 태곳적 도시라는 증거는 많았다. 이 도시는 맨 먼저 카르타고가 지배했고, 그 후 600년간 로마인들이, 300년간 고트족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400년간 아랍인들이 다스렸다. 이제 100년 전부터, 영광스러운 알폰소 황제 이후 다시 기독교인들이 지배했고, 그들은 최후 심판의 날까지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2.
그런데 지금 이 왕이 나타났다. 그녀는 붉은 금빛 수염 한가운데 면도를 해 드러난 그의 입술을 보았고, 그의 밝고 거친 두 눈을 보았다. 그녀는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귀와 가슴에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내 뜻이오! 그녀는 겁이 없었지만, 그의 음성은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두려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음성은 사람의 폐부를 관통했다. 그는 명령을 했는데, 그건 그 나름대로의 숙녀에 대한 예의였다. 명령은 부드럽거나 고상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남자다웠고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나를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심장의 한가운데까지 충격을 받았다.
3.
“내가 왔소. 보기 흉한 모습에 악취를 풍기며. 난 전쟁과 패배의 악취를 풍기고 있소. 내게서 기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소. 도냐 레오노르, 나의 왕비, 내 사랑, 당신도 귀부인답게 행동하지 않은 것 같소.” 그러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내 인생을 망가뜨렸소. 당신은 저주받을 인간이오! 당신은 내게 아들을 낳아 주지 못했소. 당신이 낳은 아들은 병들었고, 이미 당신의 몸 안에서 죽음의 징후가 나타났소. 그런데 내가 사랑한 여인이 아들을 낳자, 당신은 그녀를 살해했소. 현명하고 충실한 조언자였던 당신 아버지는 좀 더 때가 오기를 기다려 참전하라고 나를 설득하셨소. 그러나 당신은 자꾸만 나를 부추겼소. 당신은 내게 부끄러운 줄 알라며 소리 질렀고, 계속 비웃으며 나를 전쟁으로 몰아댔소. 그러고선 평소 수다쟁이였던 당신은 내 멍청한 계획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고, 결국 패전에 이르게 했소. 그 모든 것이, 신이 내게 보내 준 나의 사랑하는 여인을 살해하기 위해서였소. 당신은 나와 나의 카스티야를 파멸에 이르게 했소. 당신은 지금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 있지만, 내면은 모든 것이 사악하고 뒤틀려 있소.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처럼 악의와 간계로 철철 넘치는 악마 같은 존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