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다각도로 조명한 전기
1904년 칠레 중부의 파랄에서 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가 태어났다. 수줍음이 많고 병약했던 소년은 딱정벌레와 자고새의 알에 매료될 만큼 감수성이 풍부했고, 하루에 세 권씩 책을 읽을 정도로 책벌레였다. 열다섯 살에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대면한 그는 훗날 그녀처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파블로 네루다다. 이 책은 파블로 네루다의 인간적 결핍과 복잡다단한 내면, 정치적 공과와 예술적 행적을 다층적으로 조감한 전기다. 저자 애덤 파인스타인은 전기 작가가 흔히 빠지는 함정, 즉 대상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하여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하는 식의 신격화를 하지 않는다. 네루다와 관계 맺었던 수많은 인물들을 조사하고, 많은 미공개 자료를 발굴한 저자는 객관적인 사실의 조각들을 직조하여 네루다의 초상을 그려 낸다. 그동안 민중시인이나 연애시인으로 고착화된 이미지 너머 네루다의 진실된 모습에 다가가고 싶은 이라면 이 책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네루다의 작품 세계의 방대한 스펙트럼, 그 역동적인 변천사를 안내하는 꼼꼼한 지도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문학 텍스트를 일대일로 대응시켜 해석하는 독법은 오늘날 실효성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다. 하지만 텍스트의 세부적인 의미를 확정 짓는 증거가 아니라 작가의 거시적인 문제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유추하기 위한 단서를 얻고 싶다면 전기는 무궁무진한 자료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주제와 형식 면에서 변화와 갱신을 거듭한 네루다의 시작(詩作) 활동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의 열병을 앓는 스무 살 무렵의 청년(『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은 공산주의자 파트너를 만나고,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서 정치의식을 각성하게 된다(『가슴속의 스페인』).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장구한 대서사시『모두의 노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적 인식의 발아와 무관하지 않다.
네루다의 직업은 외교관이었다. 양곤, 싱가포르, 부에노스아이레스, 마드리드, 멕시코시티 등 세계 각지를 “지상의 거처”로 삼았던 네루다는 자연스레 세계사적 사건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종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던 외교관, 정치가로서의 커리어를 빼놓고 네루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네루다의 생애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격동의 20세기, 특히 혁명과 반동이 교차되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네루다라는 렌즈를 통해 세계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엿보고, 뜨겁게 사랑하고 저항했던 한 사람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관찰한다.
“모두의 노래”를 불렀던 네루다의 성좌들
이 책에는 소년을 시인으로 키운 조력자들이 여럿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도서관 사서 아우구스토 윈터는 네루다에게 바라가스 빌라와 입센의 책을 건네주며 그의 독서 편력을 지원했고, 오를란도 메이슨은 어린 소년의 가슴에 사회 정의의 불씨를 심는 데 일조했다. 시인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정치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는 아라공, 엘뤼아르, 예렌부르크, 레제, 피카소, 아라공, 르코르뷔지에 등 네루다와 교류했던 공산당원들이 등장한다. 미스트랄을 비롯해 스페인어권의 위대한 작가 로르카, 바예호, 파스, 보르헤스와의 일화도 소개된다. 네루다는 ‘언어의 외교관’인 번역가이기도 해서 릴케, 조이스,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옮겼다. 이처럼 네루다의 초상에는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어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 자신의 삶을 “모든 삶으로 이루어진 삶”으로 이해한 시인은 “모두의 노래”를, 자아와 비아의 경계를 초월하여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네루다의 기저를 이루는 이 사랑의 보편성이 오늘날에도 그의 시를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200자평
20세기 대표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파블로 네루다 전기다. 저자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일련의 화려한 수식 어구로 요약되기 힘든 네루다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광대한 시 세계를 상세하게 그려 낸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세 번의 결혼을 비롯하여 우여곡절을 거듭한 내밀한 연애사가 교차하는 가운데 네루다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를 거듭했는지 보여 준다.
지은이
애덤 파인스타인(Adam Feinstein)
많은 신문과 잡지에 스페인·라틴아메리카 문학에 관한 글을 발표했으며, ≪번역 현대시(Modern Poetry in Translation)≫에 수록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마리오 베네데티의 작품을 번역했다. BBC 라틴아메리카국(局)에서 근무했으며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 ≪엘 문도≫의 런던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옮긴이
김현균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에서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국내에 알리고 스페인어권에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루벤 다리오 시선 『봄에 부르는 가을 노래』, 파블로 네루다 시집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네루다 시선』, 세사르 바예호 시집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 로베르토 볼라뇨 시집 『낭만적인 개들』, 로베르토 볼라뇨 소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부적』, 『안트베르펜』, 마리오 베네데티 소설 『휴전』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김수영 시선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Arranca esa foto y úsala para limpiarte el culo)』,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Tengo derecho a destruirme)』, 한국 현대문학선 『끝이 시작되었다(Por fin ha comenzado el fin)』(공역)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각각 멕시코, 스페인, 콜롬비아에서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는 『낮은 인문학』, 『차이를 넘어 공존으로』, 『라티노/라티나 : 혼성 문화의 빛과 그림자』, 『스페인어권 명작의 이해』, 『세계를 바꾼 현대 작가들』(이상 공저),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등이 있다.
최권행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몽테뉴와 신세계’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17세기 프랑스 소설’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지하 시집 『화개(花開)』를 샤를 쥘리에와 함께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레나테 자하르의 『프란츠 파농 연구』, 미셸 드 몽테뉴의 『에세 I, II, III』(심민화 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몽테뉴와 정치의 인간화”, “몽테뉴의 독자와 자유인의 공동체” 등의 논문이 있다.
차례
감사의 말
머리말
1. 비밀, 그림자, 포도주 그리고 비
2. 산티아고의 보헤미안
3. 아시아의 고독
4. 귀향, 새로운 투쟁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5. 스페인의 비극−터닝 포인트
6. 생명 구출의 임무
7. 멕시코의 매혹, 결혼 그리고 비극적 전보
8. 풍요로운 마추픽추 산정에서 흙먼지 이는 지상의 가난으로
9. ‘눈먼 쥐들의 해’−네루다의 도피 생활
10. 델리아와 마틸데−동유럽의 곡예
11. 승리한 영웅 돌아오다
12. 새로운 체제
13. 또 다른 쿠바 위기
14. 노벨상과 최후의 열정적 사랑
15. 마지막 시간−독수리의 혼
옮긴이의 말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우구스토 윈터는 나의 문학적 탐욕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그걸 벌써 다 읽었니?”라고 물으며 바르가스 빌라의 새 책과 입센의 책, 로캉볼 연재소설을 건네주었다. 나는 타조처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아우구스토 윈터는 이제껏 내가 본 최고의 도서관 사서였다. 그의 방 한가운데에는 톱밥 난로가 놓여 있었는데, 나는 긴긴 겨울날에 쓰인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거기에 눌러앉아 그 여름의 석 달을 보냈다.
– 26쪽
조개껍데기를 비롯해 바다를 떠올려 주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네루다의 평생 습관이 이미 시작되었다. 또 다른 작가 마누엘 레린은 파블로가 “마치 고향의 해안선을 그리워하듯, 그의 집 거실에서 바다의 사물과 모티프에 둘러싸여 있던” 모습을 회상했다.
– 302~303쪽
나는 인간의 문화에 심오하게 기여한 모든 것이 숭고하다고 봅니다. 나는 초서, 비용, 베르세오, 알리기에리와 더불어 눈부시게 탄생한 위대한 시 언어에서 롱사르의 멋진 피아노 연주, 셰익스피어의 분노와 보석, 바흐나 톨스토이의 목재 강도(强度)를 거쳐,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또한 피카소와 폴 엘뤼아르에 이르기까지 토템 부족의 신비한 음악적 비밀을 숭배합니다. 마법과 기교는 예술의 영원한 양 날개이지만, 나는 모닥불 위에서 불타고 있는 문화를 구하는 대신(비록 그것이 자신의 손을 태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모닥불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시의 배반자는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366~367쪽
아마도 네루다가 숨어 지낸 기간이 없었다면 모두의 노래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를 통해 네루다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보는 방식을 새롭게 쓰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그는 아메리카를 바꿔 놓고 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작업은 극도로 제약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리로 나가 걸어 다닐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구속에 대한 반란이 모두의 노래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 416쪽
만약 당신이 이야기하는 꿈이 야심을 의미한다면, 나는 그 모든 꿈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현실적 야심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상원 의원이 되는 것도, 대통령 혹은 심지어 이슬라네그라의 읍장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만사가 다 잘 진행되었다. 작가로서의 나의 작업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한 번도 꿈이나 야심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육체의 기관이 확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시를 쓴다는 것이 보는 것, 듣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내 안에 담긴 그 무엇이었다.
– 677~678쪽
“내 취미는 조개와 낡은 책과 낡은 신발을 수집하는 것입니다. 파리에서의 나는 외교관 시인과 사회주의자의 칵테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꾸밈없는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당신들을 몹시 두려워하는데, 지금은 마치 당신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군요.” …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꼽으라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말처럼, 아주 통속적으로 대답하지요. 낡을 대로 낡은 단어를 가지고요. ‘사랑’이라는 단어 말입니다. 그 단어는 쓰면 쓸수록 더 강해지지요. 아무리 남용하더라도 해로울 게 없는 말이기도 하고요.
– 764~765쪽
이제 파리를 영원히 떠날 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네루다에게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그는 대사관 침실에서 싸구려 망원경을 통해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의 황금색 돔 지붕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망원경은 어린이용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네루다는 결코 세상에 대한 아이 같은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 7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