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주의 초기 시집 《프로엠》의 국내 첫 완역이다. 이 시집은 출판 연도로만 본다면 《사물의 편(Le parti pris des choses)》의 후속 작품이지만, 1부에 실린 작품들은 1919∼1935년 사이에 쓴 것으로 《사물의 편》을 쓰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쓴 것들이다.
이 책에는 〈1928년의 사랑관(觀)〉, 〈시선의 방식〉, 〈말을 통한 사물들의 변형에 대해〉, 〈표현의 비극〉, 〈수사학〉, 〈〈조약돌〉 서문〉 등 작가의 대표작을 비롯해 총 57편의 산문시가 실렸다. 서문 격인 장 폴랑에게 보내는 편지〈모든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를 필두로 한 1부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법 가르치기〉(44편),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쓴 2부 〈덧붙인 쪽들〉10편), 〈《인간》의 첫 번째 주석들〉(1편), 4부 〈나무줄기〉(1편)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 제목인 ‘프로엠’은 서론, 서문 또는 노래의 서곡을 뜻하는 그리스어 ‘προοίμιον prooímion’에서 유래한 라틴어 ‘prooemium’에서 온 수사학 용어다. 퐁주는 현대에 더는 사용되지 않는 이 낱말을 되살려 그의 글쓰기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그 새로운 글쓰기는 산문(prose)과 시작품(poème)을 아울러 산문과 운문이라는 전통 장르 구분을 넘어서는 글의 형식뿐 아니라, 창작과 비평을 아우르는 메타시라는 글의 속성으로, 무한한 의미 가능성에 열린 텍스트를 지향한다.
열린 텍스트는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보여 준다. 그것은 주체의 편협한 관점에서 사물을 규정하고 관념화하기를 거부하고 그 무한한 본성을 왜곡함 없이 바라보려는 시선의 한 방식이다.
시인은 사물과 언어의 간극을 표현 불가능성으로 인식하는 대신, 그 간극에서 쉼 없이 드러나는 사물의 낯선 특성들에 말을 입힌다. 그가 표현의 비극에서 느낀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아 말 없는 사물의 목소리가 되어 줄 수 있게 하는 글쓰기, 그는 그것을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라고 밝힌다.
쓴 지 한 세기가 다되어 가는 그의 글은 여전히 전위적이다. “혁명가 또는 시인의 자세로만” 살기로 한 그의 관심사는 사물을 향한 글쓰기의 끝까지 가는 일이었다. “사물들의 두께” 속으로 여행을 떠난 그의 글 속으로 떠날 읽는 이들의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가 그랬듯이.
200자평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주의 초기 시집 《프로엠》의 국내 첫 완역이다. 〈1928년의 사랑관(觀)〉, 〈시선의 방식〉, 〈말을 통한 사물들의 변형에 대해〉, 〈표현의 비극〉, 〈수사학〉, 〈〈조약돌〉 서문〉 등 작가의 대표작을 비롯해 총 57편의 산문시가 실렸다.
지은이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는 1899년 3월 27일 프랑스 남부 도시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나이 스물 무렵부터 시를 발표하고 1926년에 첫 시집을 펴냈지만, 당시 그의 글은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30년대의 젊은 퐁주는 글쓰기 이외에도 당시 근무하던 출판사의 노조 활동을 주도하고 좌파 시위에 참가하는 등 정치·사회의 다양한 쟁점에 활발히 뛰어들었다. 그가 불공평한 사회를 개혁하려 나선 공산당과 초현실주의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초현실주의 제2차 선언문에 공동서명하고 공산당에 가입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자가당착에 빠진 현실 개혁 운동과 이념의 틀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한 그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던 이들과 1940년대에 결별한다.
그가 작가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사물의 편》(1942)을 읽은 사르트르가 〈인간과 사물)〉(1944)이라는 평론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는 조약돌, 달팽이와 같은 평범한 사물들에 글 쓰는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초월적 관념을 부여하는 대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 했다.
퐁주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사물의 편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글쓰기로 프랑스 시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시인이다. 솔레르스,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탈구조주의의 사상가들뿐 아니라, 프랑스 예술현상학의 독보적인 현상학자 말디네 등 다양한 갈래의 문인들이 그의 작품 세계에 주목하였고, 1960년부터 문학계의 흐름을 장악한 《텔 켈》 그룹의 문인들은 구조주의로 시작하여 탈구조주의로 이어지던 시대정신 변화의 물결이 일기 전부터 그 보이지 않는 시작점에 시인 퐁주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를 정신적 지주로 여겼다. 프랑스 사회 전반에 개혁을 몰고 온 68혁명보다 훨씬 앞선 1910년대 말부터 그는 통념에 길든 말에 저항하는 글쓰기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하나를 보여 주며 자신만의 혁명을 실천한 시인이었다.
옮긴이
정선아는 이화여자대학교 외국어교육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0 대학에서 랭보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현대시에 관심을 두고 앙드레 뒤 부셰, 이브 본푸아, 자크 뒤팽, 필립 자코테, 베르나르 노엘과 같은 프랑스 전후 1세대 시인들, 드니 로슈, 클로드 루아에ᐨ주르누, 크리스티앙 프리장과 같은 축어시 시인들 그리고 장ᐨ미셸 몰푸아, 앙투안 에마즈 등 프랑스 주요 현대 시인에 관한 다수 논문을 저술했다.
저서로는 《Poésie & paysage(시와 풍경)》(공저, 2010), 《현대프랑스 문학과 예술》(공저, 2006), 역서로는 《르베르디 시선》(2019), 《어떤 푸른 이야기》(2005), 《현대시와 지평 구조》(2003)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예술의 실재 인식 방편으로서 그림자와 반영: 르베르디와 니체의 단장(斷章)에서〉, 리오타르, 바르트, 오카르, 글리상의 시와 이론을 분석한 〈언어예술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예술 사회학적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 철학에 영향 받은 현대시 사례 연구인 〈덧없는 삶의 순간포착과 언어 놀이−세실 메나르디의 《황금빛》에서〉가 있다.
차례
1부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법 가르치기
비망록
말의 미래
《사파트》 머리말
셰익스피어의 정치 견해
증언
세계의 형태
발걸음과 도약
1928년의 사랑관(觀)
시선의 방식
파도
말을 통한 사물들의 변형에 대해
예술의 허무주의식 정당화
표현의 비극
우화
우리 온실 속 산책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법 가르치기
보통 독수리
반과거 또는 나는 물고기들
한 시작품의 주석들
현자(賢者)의 표류
심해어들
대기실
어린 나무
말의 변덕
어린 나무의 시
꿈에서 나온 문장들
파르나스
바위
가면 조각들
살아야 할 죽음
할 말 없다
나의 나무
유령이 뿌린 전단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수사학
술래잡기
법과 예언가들
글 쓰는 이유
순진무구한 원천들
행복하게 사는 이유
소송 대리권
시절(詩節)
〈조약돌〉 서문
2부 덧붙인 쪽들
Ⅰ 《부조리의 추론》을 읽으며 한 성찰
Ⅱ
Ⅲ
Ⅳ
Ⅴ
Ⅵ
Ⅶ
Ⅷ
Ⅸ
Ⅹ
3부 《인간》의 첫 번째 주석들
《인간》의 첫 번째 주석들
4부 나무줄기
나무줄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아! 일은 정말 심각해졌다, 거의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분명, 그는 그것을 느꼈다, 이내 두 배로 가차 없이, 그가 내게 자신의 실망감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책이 나를 우스꽝스럽게 아니면 혐오스럽게 보이게 할 주변 모든 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때부터, 나는 마음먹었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나는 생각했다(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이 쓰레기를 출판하는 것뿐이라고,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목매는 평가를 얻으려면.”
–<모든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 중에서
2.
그는 곧바로 알아차릴 거다 사물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그리고 그것들이 제 가치대로, 그리고 그것들 자체로, 자신들을 말해 달라고 하는 말없는 청원을, 말없는 간청들을,−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지닌 통상 가치를 떠나,−가리지 말고 그렇지만 척도를 갖고, 그런데 어떤 척도: 그것들 고유의 척도.
–<시선의 방식> 중에서
3.
내가 나를 표현하려 할 때면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말은 상투적이고 그것 자체를 표현한다: 그것은 나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나는 숨이 막힌다.
말에 저항하는 기법을 가르치는 일이 쓸모 있는 것은 그때다, 말하고자 하는 것만을 말하는 기법, 말을 능욕하고 굴복시키는 기법을. 요컨대 수사학을 세우는 일, 더 정확히 말해 자신만의 수사학을 세우는 기법을 가르치는 일은 사회 복지 사업이다.
–<수사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