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수필은 많은 사람들, 평범한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심미적인 글쓰기다. 쓰는 이나 읽는 이 모두 여타의 문학 장르에 비해 심리적 장벽이 낮다. 장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시나 소설, 혹은 극과 달리 수필을 특별한 문학적 수련이 없어도 쓸 수 있는 글쓰기로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문학 대중에게 사랑받는 적잖은 수필들이 수필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쓰였을 뿐만 아니라 수필가들이 모여 형성된 수필 문단의 글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것은 비단 특정한 사람들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물론 심미적 장벽이 높은 것이 한 문학 장르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닐 테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장르 간의 심미적 수준이란 사실상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헛된 프레임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좋은 글이 있을 뿐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을 둘러싼 담론적 규정들, 혹은 문학 제도나 현상들은 수필의 독보적인 지점을 제시하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 준다. 수필문단의 활황(活況)과 더불어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꺼지지 않는 의심이야말로 수필 장르의 고유한 속성을 드러내는 대목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으로 수필의 거점과 확장 가능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동시에 좋은 수필이 지닌 강한 대중적 흡인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읽기 쉽고 쓰고 싶게 하는, 혹은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유인하는 힘은 어떻든지 이 심미적 글쓰기의 핵심적 거점이며, 따라서 이 분야의 수월한 글들은 대중적 동기에 기초한 수필 장르의 속성과 매력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1910∼2007) 선생은 이 심미적 글쓰기의 특성과 매력을 한껏 보여 준 대표적인 수필가다. 그는 좋은 글들을 통해 수필이 무엇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필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수필로서 탁월하게 정리해 준 바 있다. 피천득 선생은 수필에 대한 장르적 자의식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개진한 수필가였다.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하는 <수필>은 이 심미적 글쓰기의 성격과 높이를 생생하게 드러낸 빼어난 글이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쉽지만, 결코 아무나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한 인간의 성품이 내용과 문체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글의 심급(審級)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자질(資質)의 하나이다. 그러한 점에서 수필은 사람의 됨됨이, 혹은 그 됨됨이가 주는 매력과 결코 뗄 수 없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에서 많은 이들이 감동을 얻고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의 글에서 어떤 심미적인 인간상(人間像)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다고 선생이 밝힌 바 있듯이, 피천득의 수필에서 독서 대중은 그의 “향취와 여운”을 느낀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심미적이고도 그윽한 일인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글을 발표했으면서도 평생 한 권 정도 분량의 수필을 남긴 선생에게서 우리는 수필의 한 본령을 보게 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優雅)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평정한 절제와 산뜻한 자유의 정신, 소박하되 세련된 균형 감각을 수필의 심미성으로 정의하고 있는 선생의 글에서 우리는 수필의 한 모범을, 그리고 매력적인 한 “인생의 향취와 여운”을 경험하게 된다.
200자평
수필 하면 흔히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인연>이라 할 만큼 피천득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필가다. 그의 수필은 삶에 핍진한 문학적 글쓰기, 심미적 생명 감성의 실천적 글쓰기를 보여 준 매력적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예술화한 생의 한 감동적인 면모와 조우하게 된다.
지은이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은 1910년 5월 29일 지금의 서울 종로에서 가죽신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피천득이 태어나던 당시 부친 피원근은 한성(漢城)의 중심부, 즉 지금의 종각에서 종로 5가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해 상당히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구한말의 거부(巨富)였는데, 피천득의 나이 여섯 살(1916) 때 사망하였다. 아홉 살 때 모친마저 세상을 뜬 이후 삼촌 집에서 성장했다. 모친을 여윈 1919년, 서울 제일고보 부속국민학교에 입학해 1923년 4학년을 수료하고, 같은 해 서울제일고보에 입학해 1926년 졸업했다.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을 지닌 ‘금아(琴兒)’는 유년기부터 피천득의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호이다. 춘원의 권유로 16세 때인 1926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공보국중학교(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서 수학했는데, 이 무렵 평생의 정신적 스승이 된 도산 안창호를 만나게 된다. 1929년에는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예과에 입학하고 이듬해인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처음으로 발표한 뒤 <소곡>(1931), <가신 님>(1932), 그리고 수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1933), <나의 파일>(1934)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1931년에는 후장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1937년 졸업한 뒤 귀국해서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오일사에 잠시 근무했다가 경성중앙상업학원 교사로 부임한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시를 강의했고, 1954년 미 국무부 초청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선생은 1947년 ≪서정시집(抒情詩集)≫(상호출판사), 1959년 ≪금아시문선(琴兒詩文選)≫(경문사), 1969년 문집 ≪산호(珊瑚)와 진주(眞珠)≫(일조각), 1976년 수필집 ≪수필≫(범우사)을 출간했고 같은 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정음문고)을 번역·간행했다. 1980년에는 그간 발표한 산문과 시를 선해서 ≪금아문선(琴兒文選)≫과 ≪금아시선(琴兒詩選)≫(일조각)을 출판했고, 1993년에는 시집 ≪생명≫과 ≪삶의 노래≫(동학사), 1996년에는 수필집 ≪인연≫(샘터), 1997년에는 <피천득 문학 전집>, 2001년에는 영문판 시 수필집 ≪A Skylark≫(샘터)을 간행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1), 인촌상 문학부문(1995), 자랑스런 서울대인상(1999)을 수상한 바 있다.
부인 임진호(林珍鎬) 여사 사이에서 2남(세영, 수영) 1녀(서영)를 두었으며, 장남 세영은 연극배우 및 성우, 라디오 DJ로 활동하다가 캐나다로 건너가 30여 년을 살다 부친의 권유로 귀국해 경북 문경에서 수목원을 운영하고 있고, 차남 수영은 의대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선생의 수필에 자주 등장하는 막내딸 서영은 도미(渡美)해 현재 보스턴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엮은이
김문주(金文柱)는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9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조지훈 시에 나타난 생명의식 연구>로 석사 학위를, <한국 현대시의 풍경과 전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 ≪서울신문≫(문학평론), 2007년 ≪불교신문≫(시)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08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주관 제9회 ‘젊은평론가상’, 2011년 제6회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대산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형상과 전통≫, ≪소통과 미래≫, ≪수런거리는 시, 분기하는 비평들≫, ≪백석 문학 전집1·2≫(편저) 등이 있다. 현재 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계간 ≪서정시학≫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Ⅰ. 종달새
수필
新春
早春
종달새
봄
빠리에 부친 편지
오월
가든 파티
장미
여성의 미
모시
워터 스키
꿈
선물
플루트 플레이어
너무 많다
보기에 따라서는
여성의 편지
장난감
家具
눈물
맛과 멋
호이트 콜렉션
전화
시골 한약국
長壽
黃浦灘의 秋夕
용돈
금반지
이사
보스턴 심포니
Ⅱ. 서영이
엄마
그날
찬란한 시절
서영이에게
어느 날
서영이
서영이 대학에 가다
딸에게
瑞英이와 蘭英이
외삼촌 할아버지
인연
유순이
島山
島山 선생께
春園
셰익스피어
陶淵明
로버트 프로스트 Ⅰ
로버트 프로스트 Ⅱ
찰스 램
부르크의 愛國詩
餘心
痴翁
어느 學者의 肖像
아인슈타인
Ⅲ. 皮哥之辯
나의 사랑하는 생활
멋
反射的 光榮
皮哥之辯
이야기
잠
久遠의 女像
낙서
은전 한 닢
술
순례
비원
紀行小品
토요일
여린 마음
초대
기도
우정
1945년 8월 15일
콘코드의 찬가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
유머의 기능
문화재 보존
送年
晚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나는 깨끗한 침대에 누웠다가 하루에 한두 번씩 덥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 주지 못한 비로드 바지를 사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실 한 폰드 반을 사 주고 싶다. 그리고 내 것으로 점잖고 산뜻한 넥타이를 몇 개 사고 싶다. 돈이 없어서 적조하여진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해 오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오만 원, 아니 십만 원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한다. 나는 나의 시간과 기운을 다 팔아 버리지 않고,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이라도 남겨서 자유와 한가를 즐길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잔디를 밟기 좋아한다. 젖은 시새를 밟기 좋아한다. 고무창 댄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기를 좋아한다. 아가의 머리칼을 만지기 좋아한다. 새로 나온 나뭇잎을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를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남의 아내의 수달피 목도리를 만져 보기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을 한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