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무숙의 소설은 여성 주인공이 겪는 가부장적 윤리의 억압, 이에 따르는 성적 불평등, 또 환상과 낭만으로 허구화된 사랑에의 몰입 등을 통해 여성의 삶이 유교적 전통과 관습 안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존재하는가를 보여 준다. 이런 문제의식은 한무숙이 활발한 창작 활동을 시작하는 1950년대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에 포획된 가부장제 전통 속에서 살아가는 21세기 현재에도 유효한 주제 의식이다.
이 책에 실린 <명옥이>, <감정(感情)이 있는 심연(深淵)>, <대열(隊列) 속에서>, <축제(祝祭)와 운명(運命)의 장소(場所)>, <유수암(流水庵)> 등 역시 한무숙의 작품이 지향했던 여성 삶에 대한 통찰, 성(性)과 사랑, 그리고 죽음의 탐구, 허위의식과 진정한 자아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작품의 배면에 흐르는 당대 역사와 문화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무숙이 여성의 삶에서 주목하는 주제는 무엇보다 여성의 진정한 자아 정체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이에 대한 관심이 <명옥이>에서는 주인공 경주에게 17년 만에 찾아온 보통학교 동창 명옥이가 꾸며낸 기구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자신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꿈같고 기구하고 소설적인’ 사랑을 꿈꾸는 명옥이의 비극적 로맨스는 성공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이 꾸며낸 거짓이기에 그녀의 정체성 역시 허구화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감정이 있는 심연> 역시 성(性)과 관련한 무의식과 여성 정체성의 의미를 묻고 있는 소설이다. 1957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한무숙은 유교적 가부장제와 기독교 윤리에 의해 왜곡된 성(性) 의식이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피폐화시키는가를 ‘전아’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 준다. 할머니와 어머니, 두 고모 등 네 과부 밑에서 성에 대한 죄의식을 주입받으면서 자란 주인공이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됨으로써 성적(性的) 억압과 이에 따른 정체성의 혼란을 강조하고 있다. <대열 속에서>는 4·19를 배경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당대 정권에 대한 청년들의 시위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는 한편, 그 시위 현장 안에 있는 주인공 ‘명서’의 내면 의식을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다. 6·25 피난길에 집안 운전사의 식구를 남기고 떠났던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주인공 명서는 대학생이 된 후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한다. 이런 명서의 고뇌는 시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열에 앞장서는 운전사의 아들 창수와 함께 경관의 총을 맞고 쓰러짐으로써 해결된다. <축제와 운명의 장소>는 한무숙의 성(性)과 사랑에 대한 의식이 명확하게 투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유명한 남자를 사랑했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전옥희’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운명적인 사랑과 성애(性愛)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겼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인간에게 축제의 순간임을 강조한다. 작가는 이런 주제를 주인공 전옥희와 그녀가 자신을 투사시킨 인물인 젊은 미연의 이야기를 함께 진행하면서 보여 주는데, 이 과정을 통해 전옥희는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깨달아 간다. <유수암> 역시 기생이었던 ‘경’을 통해 지난 사랑과 욕망에 대한 회한을 보여 주는 한편 홍화와 산월이 등의 인물을 통해 성과 사랑의 긍정과 함께 이것이 삶에 주는 생명력을 강조한다. 소설은 유명 정치인 정진수를 사랑했기에 사랑을 지키고자 유수암을 떠나지 않는 경을 통해 이제는 누구의 연인도 될 수 없는, 나이 들어가는 여성의 삶이 갖는 서러움과 애연함 역시 드러내고 있다.
200자평
한무숙의 소설은 여성 주인공이 겪는 가부장적 윤리의 억압, 이에 따르는 성적 불평등, 또 환상과 낭만으로 허구화된 사랑에의 몰입 등을 통해 여성의 삶이 유교적 전통과 관습 안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존재하는가를 보여 준다. 여성 삶에 대한 통찰, 성(性)과 사랑, 그리고 죽음의 탐구, 허위의식과 진정한 자아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작품의 배면에 흐르는 당대 역사와 문화 안에서 드러난다. 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의식이다. 단편 5편이 실렸다.
지은이
한무숙은 “내 의지가 참가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이 글을 쓰는 이유였다고 말했다. 1930년대 유교적 전통을 이어가는 집안의 며느리로 살았던 한무숙은 밤마다 벽에 원고지를 대고 누워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는 오로지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위안이었고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무숙 글쓰기의 여정은 인간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무숙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규수 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경남 사천의 군수였던 부친 한석명과 모친 장숙명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한무숙은 부산여자고등학교에서 서구적 교육을 받았으며, 김말봉의 소설 ≪밀림≫의 삽화를 242회에 걸쳐 그릴 정도로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화가로서 한무숙의 꿈은 1970년대에 이루어져, 몇 번에 걸쳐 서화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무숙은 1940년 매월당 김시습의 대종손의 아들인 김진흥과 결혼하는데,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양가 어른들의 결정이었다고 한다. 결혼을 통해 한무숙의 글쓰기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억압하는 여성의 꿈과 욕망을 투영하는 행위의 의미를 갖게 된다. 한무숙은 1942년에 <신시대> 현상 공모에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었고, 1943년에는 희곡 <마음>, 1944년에는 희곡 <서리꽃>이 조선연극회 현상 모집에 당선됨으로써 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등불 드는 여인>이 일어로 쓰인 작품이며, 그 이외는 희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설가로서의 등단작은 1948년 국제신보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역사는 흐른다≫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에서 8·15 해방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반영한 이 소설은 조씨 집안의 가족사를 통해 한국 근대사에 대한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장편으로 ≪빛의 계단≫, ≪석류나무집 이야기≫, ≪만남≫ 등을 발표했다. 특히 정약용의 삶을 주제 한 ≪만남≫은 한국 고유의 전통과 실학, 무속, 서학, 조선조의 당파 싸움 등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한편 한무숙은 다양한 주제로 많은 단편을 창작했는데 전후 소설 계열인 <아버지>, <군복>, <환희> 등과 불교적 주제나 분위기를 보이는 <부적>, <돌>, <우리 사이 모든 것이> 등이 있다. 소설 이외 수필집으로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이 외로운 만남의 축복≫, ≪내 마음에 뜬 달≫ 등을 출간했다.
한무숙은 1957년에 단편 <감정이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수상했고, 신사임당상(1973)과 3·1문화상 예술대상(1989), 대한민국예술원상(1991) 등을 수상했다. 또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으로 국제펜클럽대회에 참석하는 한편 한국여류문학인회 중앙위원 등을 맡는 등 여성 문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93년 한무숙 작가의 사후에 남편 김진흥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고택을 개조해 한무숙문학관을 개관했으며, 한무숙을 기념한 한무숙문학상도 1995년 제정했다. 현재 따듯한 인간애와 고결한 순결 의식을 바탕으로 존재론적 구원을 추구한 문학인으로 평가받는 한무숙은, 여성 정체성의 탐구를 통해 진정한 인간에 대한 탐색과 존재의 자기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한 여성 작가로서의 문학사적 위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
김진희(金眞禧, Kim Jinhee)는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출발과 경계로서의 모더니즘-오규원론>이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로 근대 문학 초창기 문학 장(場)의 형성, 한국 근대문학의 근대성과 탈식민성, 번역과 비교문학, 동아시아 지식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파시의 모더니티≫, ≪근대문학의 장(場)과 시인의 선택≫, ≪회화로 읽는 1930년대 시문학사≫, ≪한국 근대시의 과제와 문학사의 주체들≫, ≪소통과 교류의 동아시아≫(공저), ≪동아시아 근대지식과 번역의 지형≫(공저) ≪근대지식과 저널리즘≫(공저) 등의 연구서와 ≪시에 관한 각서≫, ≪불우한, 불후의 노래≫, ≪기억의 수사학≫, ≪미래의 서정과 감각≫ 등의 비평집, ≪김억 평론선집≫, ≪모윤숙 시선≫, ≪노천명 시선≫, ≪한무숙 작품집≫ 등의 편서가 있다. 2014년 김달진 문학상 비평 부문 수상, 2016년 김준오 시학상을 수상했다.
차례
대열(隊列) 속에서
감정(感情)이 있는 심연(深淵)
유수암(流水庵)
축제(祝祭)와 운명(運命)의 장소(場所)
명옥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 관능과 환희의 절정이 곧 부검(剖檢)에 이르는 여자의 운명에 직결되는 일이 있다더라도, 어느 시인이 말하듯, ‘성(性)’이란 인간의 귀속(歸屬)을 확증하는 축제(祝祭)의 자리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전옥희 여사는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인생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역시 같은 치우(癡愚), 같은 실수와 고통에 찬 길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그것은 패배를 정당화함으로써 인생을 긍정하려는 뜻이라기보다는, 죽음 앞에 선 사람만이 가지는 하나의 깨우침이었다.
-<축제와 운명의 장소>
이제 나는 그저 슬프다. 전아를 잃을 것이라는 기우가 이 순간이 인생의 최후의 순간이라고 다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꾸만 걸었다. 전아도 역시 자꾸만 딸아 걸었다. 목적 없이 그렇게 자꾸 걷구만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꾸부러졌다 다시 곧장 갔다가 하는 동안에, 나는 그것이 내 하숙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무엇에 씨이기나 한 것처럼, 자꾸 그 길을 걸었다. 전아도 역시 한 번도 와 본 일이 없는 그 길을, 무엇에 씨이기나 한 것처럼, 자꾸만 나를 딸아 걸었다. 그 길이 닫는 곳에서 우리는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보았던 것이다.
-<감정이 있는 심연>
애인의 사회적 지위나 초상(肖像)에 한해서만큼은 명옥이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는 완전히 도착적(倒錯的)인 것이고 명옥이의 고백은 다만 이마에 주름을 잡기 시작한 그 체중만큼은 불행을 지닌 못생긴 중년 여성의 꿈과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사회적 명사인 단려한 외모를 가진 신사는 동물이 되는 순간에만 명옥이를 찾았으리-이런 생각이 스치자, 동물이 될 수밖에 없는 명옥이가 진실로 가여웠다.
-<명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