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지리산 입산 18년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꿈꾸는 이원규 시인의 육필시집. 표제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비롯한 52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글씨 한 자 글획 한 획에 시인의 숨결과 영혼이 담겼다.
지은이
이원규는 1962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했다. 1984년 ≪월간문학≫, 1989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빨치산 편지≫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 ≪지리산 편지≫, ≪벙어리 달빛≫,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등을 출간했다.
신동엽창작상과 평화인권문학상을 수상했다.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지리산행복학교의 강사다. 지리산 입산 18년째로, 시를 쓰고 모터사이클을 타며 야생화 사진을 찍고 있다.
차례
자서
동행
부엉이
족필(足筆)
월하미인
북극성
독거
능소화
낙화
옛 애인의 집
지푸라기로 다가와
거울 속의 부처
결별
동백꽃을 줍다
성에꽃
머리핀의 안부
남과 여
잠든 나의 얼굴을 엿보다
눈꽃으로 울다
눈사람
남해 왕후박나무의 말씀
뼈에 새긴 그 이름
토란
벙어리 달빛
잡초를 기른다
단식
홀아비바람꽃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단풍의 이유
물봉선의 고백
봄비 속으로 사라지다
맹인의 아침
속도
돌아보면 그가 있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지독한 사랑
시인
첫눈
물안개
비천무
강물도 목이 마르다
단풍나무 인터넷
뇌신
벽소령 안개 사우나
돌
쏘가리 낚시
나비야 청산 가자
천적
나그네
뼈가 투명해질 때까지
활인검
입산자의 노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는
책속으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 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자서(自序)
어느새 지리산 입산 17년이 지났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달라졌다.
내 고향 문경의 삶과 서울 등의 저자거리,
그리고 지리산의 생활이 정확하게
삼등분 되는 시절과 딱 마주쳤다.
참으로 오묘한 경계다.
세상에 처음 시를 발표한 지 어느새 30년,
그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을 정도의 시력,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다.
남은 생애의 첫 출발점으로 삼아
자선 육필시집을 낸다.
육필보다 더 낮은 족필(足筆)의 시를 꿈꾸며.
2015년 새봄 지리산 하 섬진강 변
피아산방에서
이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