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적인 노래의 배경
헤이안 시대의 문학은 궁정을 중심으로 귀족 사회라고 하는 극히 일부 계층에 의해 지탱되었다. 뛰어난 와카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람들의 입에 오른 것은 와카만이 아니다. 어떤 사회라도 그렇지만 특히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타인의 일에 관심이 많다. 시시콜콜한 사건이라도 사적(私的)일수록 오히려 소문의 재료로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연애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도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무엇보다 궁정 문학으로서 화려하게 입에 오르내린 와카도 원래 ‘풍류인(色好み)’들이 연애의 매개체로 사용한 것이므로 와카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그것은 다양한 흥미를 충족하는 화젯거리이기도 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으로 어떤 노래를 읊었는지, 사람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적인 상황에서 읊어진 다수의 노래는 그 자체만으로는 완성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읊어진 사정을 모르면 제3자는 노래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와카는 비교적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 마치 대화처럼 주고받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사적으로 읊어진 노래는 항상 일정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사랑의 어릿광대 헤이추
주인공 헤이추는 다이라노 사다훈(平定文)으로 추정된다. 나리히라와 함께 ‘호색가(好き者)의 쌍벽’이라고 일컬어지던 인물이다. 다만, 나리히라는 모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진정한 풍류인으로 평가받으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연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지만, 헤이추는 설화 인물로 그려지면서 철저히 희화화되고 사랑을 위해 농락당하는, 말하자면 어릿광대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이미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도 헤이추 희화화의 경향이 엿보인다. ‘헤이추’라는 이름만으로 아마 당시 사람들은 ‘아, 그 이로고노미(色好み)’ 하고 그게 누군지 금방 알았을 것이다. 이미지가 이미 고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헤이추가 언급될 때마다 거기에 새로운 이미지가 파생하고 더해져 갔다. 그야말로 있을 법한 이야기가 켜켜이 새롭게 추가되어 갔다. 근대 문학 속에서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竜之介)는 〈호색(好色)〉에,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는 〈소장 시게모토의 어머니(少将滋幹の母)〉에 그런 헤이추를 등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희화화한 헤이추를 그리고 있다.
다이라노 사다훈
905년,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이 편찬될 무렵, 사다훈은 가인으로 활약해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다. 이른바 6가선(六歌仙) 시대가 지나 마침내 와카가 융성기를 맞이하는 시기다. 그는 혈통으로는 황족의 계보를 잇는 귀공자였으나 관인으로서는 계급이 낮았고 행실 문제로 관직을 박탈당한 적도 있다. 소심하고 사람 좋은 사다훈은 관료로서 입신출세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모노가타리 안에서 몇 차례 드러나는 것처럼, 왠지 부모를 어려워하고 구속당하는 심정을 여자에게 하소연하는 모성애에 호소하는 남자, 그런 보호 아래에서라야 살아갈 수 있는 남자였다.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몰두하거나 외골수적인 정열을 불태우는 연애담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가 정취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젠체하기 때문에, 심하게 사람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 외 다양한 이유를 근거로 관계를 서둘러 끝내고 있다. 연애의 정서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다. 현대풍으로 말하자면 자기 기분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그것은 결코 강한 남성의 표상은 아니다. 정열적인 나리히라와는 다른 성격의 호색가, 즉 ‘스키모노(好き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에 이르러 나리히라와 쌍벽을 이루는 남자라고 칭하지만, 타입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고금와카집》에 사다훈의 와카는 9수가 채록되었다. 관인으로서는 실격이었던 사다훈이지만 가인으로서는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흥적인 사랑의 노래
《헤이추 모노가타리》 속 와카는 장소에 임해서 즉흥적으로 읊은 노래가 대부분이다. 한 수의 와카로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와카가 만들어진 사정을 자세히 알고 남녀가 주고받는 말로 해석하면 그것들은 비길 데 없이 흥미롭다. 돌출되거나, 약간 모자란 비유와 다소 우아함을 결여한 용어, 위아래가 잘 안 맞는 것도 그 행간을 메워 가면 남녀의 다양한 밀당의 양상이 드러난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에게서 뜻밖의 어두운 면이나 변화의 기분을 읽어 낼 수 있다. 그것은 의외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상황이 많다. 작자는 이렇다 할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자질구레한 일상성 안에서 여자에게 말을 거는 수단으로서 노래가 어떤 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써서 남기려 했다. 그 때문에 남녀를 둘러싼 배경이나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 갖가지 인간관계를 꼼꼼하게 써 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장면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묘사라고 하는 표현법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모노가타리에서는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다. 장면 설정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노가타리 문장의 연결 방법으로서 구두점을 찍어 장면 전환을 꾀하기보다 뭔가 말은 조금 부족하지만, 주위의 상황을 소재로 시점을 남녀 번갈아 가며 서술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소개하는 우타 모노가타리 그 세 번째 책. 우타 모노가타리란 일본 고유의 정형시 와카와 그 와카가 지어진 배경을 이야기로 소개하는 시와 소설 사이의 독특한 문학 형식이다. 헤이추라는 당대 제일 풍류남의 연애담을 와카와 함께 소개한다. 와카라는 낯선 시 형식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다. 바람둥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고 인간적인 헤이추의 모습이 정겹다.
옮긴이
민병훈은 일본의 센슈대학(専修大学)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 입학해 《이세 모노가타리》를 중심으로 하는 우타 모노가타리 연구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2001)를 취득했다(문부성 국비 장학생). 박사 과정 중에 집필한 논문 〈《伊勢物語》六段の〈あくたがはといふ河〉考−地史的視点から−〉가 《国語と国文学》에 게재되었다. 귀국 후 2002년 9월 대전대학교 일어일문학과의 전임 강사로 임용되어 현재 비즈니스일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歌物語の淵源と享受》, 《わかる日本文化》(공저, 외국어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出雲文化圈と東アジア》(공저), 《한 권으로 읽는 일본 문학사》, 《일본어 독해와 작문 I, II》(공저, 외국어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등이 있고 역서로 《이세 모노가타리》, 《다케토리 이야기》, 《야마토 모노가타리》, 《일본 신화 이야기》 등이 있으며, 최근의 논문에 〈다자이후와 탕치의 고장 쓰쿠시(筑紫)−나라, 헤이안 문학을 중심으로−〉, 〈《大和物語》の構造と叙述上の特色〉, 〈《大和物語》126段〈零落した筑紫の桧垣〉攷〉,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 아즈마쿠다리(東下り) 관련 단에 수용된 야치호코(八千矛) 신화〉, 〈헤이안 문학에 보이는 여성의 이동 양상과 원형〉, 〈《이세 모노가타리》에서 《야마토 모노가타리》로−남녀관계를 통해서 본 화형(話型)의 양상−〉 등이 있다.
차례
1단 사랑의 화(恋の禍)
2단 노래 경연(歌合戦)
3단 조카(長歌)를 보내다(長歌をやる)
4단 단념(断念)
5단 벗(友)
6단 들판의 휘파람새(野の鶯)
7단 허무한 기도(むなしい参篭)
8단 벚꽃 문답(桜問答)
9단 어떤 사랑의 전말(ある恋のてんまつ)
10단 보지만 만나지 못한 사랑(見れど逢わぬ恋)
11단 맺지 못한 사랑(実らぬ恋)
12단 무책임한 말(なおざりごと)
13단 칠석(七夕)
14단 마타리(女郞花)
15단 흔들리는 여심(揺れる女心)
16단 연인인 여자들(恋人の女たち)
17단 억새 풀숲에 숨긴 승려(花すすきの中の僧)
18단 미덥지 못한 편지 전달자(たよれぬ文使い)
19단 국화 도둑(菊盗人)
20단 국화의 번영(菊の栄え)
21단 국화와 노인(菊と翁)
22단 고삐 풀린 말로 인한 화(放れ馬の厄)
23단 호색가 남녀(好き者同士)
24단 오미 지방 장관의 딸(近江守の女)
25단 노래의 길잡이(歌のしるべ)
26단 누구의 눈물이 더할까(涙くらべ)
27단 부모가 지키는 사람(親の守る人)
28단 이름을 도용당한 남자(名を借りられる)
29단 여러 만남(さまざまの出会い)
30단 단풍 문답(紅葉問答)
31단 소일 삼아 부르는 노래(歌のすさび)
32단 삼 년, 삼천 년 문답(三年, 三千年問答)
33단 여자의 원망(女の恨みごと)
34단 눈으로 지켜보면서도(目に見す見す)
35단 해변의 노래(浜辺の歌)
36단 졸참나무가 늘어선 문(楢の木ならぶ門)
37단 푸른 줄 여인(若菰の女)
38단 비구니가 된 사람(尼になる人)
39단 도미노고지에 사는 우대신의 모친(富小路の右大臣の御母のこと)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또 이 남자에게는 편지를 써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 상대가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넌더리도 내지 않고 때때로 연서를 보냈다. 그 여자는 남자를 아주 싫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답장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는
“지금 드리는 이 편지를 읽어만 주신다면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보았소’라고만 말씀해 주세요”
라고 써 보냈다. 그러자 여자는
“보았소”
라고만 적어 보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노래를 읊어 보냈다.
여름 열기에 타는 듯한 이내 몸 너무 괴로워
보았소 한마디에 소리 높여 웁니다
夏の日に 燃ゆるわが身の わびしさに
みつにひとりの 音をのみぞなく
여기에 다시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무의미하게 흘러 고인 눈물이 내게 있다면
이것으로 끄시라 보게 해 드릴 텐데
いたづらに たまる 涙の 水しあらば
これして 消てと 見すべきものを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날이 지나가는데, 여자와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남자가
한숨 소리가 응어리져서 굳고 할 바 모르는
내 어깨를 짓눌러 주체하기 어렵소
なげきをぞ こりわびぬべき あふごなき
わがかたききて 持ちしわぶれば
하고 읊어 보내자 여자는 답가를 보냈다.
누구로 인해 굳어진 한숨인데 왜 느닷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제 탓을 하시나요
たれにより こるなげきをか うちつけに
荷なひも 知らぬ われにおほする
〈2단 노래 경연(歌合戦)〉에서
또 이 남자에게는 연서를 주고받던 여자가 있었는데, 만나지 못하고 세월만 흐르자 남자가 노래를 읊어 보냈다.
오직 나만이 타오르는 것인가 언제까지나
연기만 피워 대는 후지산과 같구나
われのみや 燃えてかへらむ よとともに
思ひもならぬ 富士の嶺のごと
여자의 답가
후지산 위에 태우지 못한 생각 불태우세요
신조차 끌 수 없는 덧없는 연기이니
富士の嶺の ならぬ思ひも 燃えば燃え
神だに消たぬ むなし煙を
그러자 다시 남자가 노래를 보냈다.
신이 아니라 그대가 꺼 주세요 누구 때문에
살아 있는 육신을 태우는지 아시죠
神よりも 君は消たなむ たれにより
なまなまし身の 燃ゆる思ひぞ
이에 대한 여자의 답가
마르지 않은 몸을 태운다지만 도리 없지요
물이 아닌 저로선 끌 방도를 모르니
かれぬ身を 燃ゆと聞くとも いかがせむ
消ちこそしらね みづならぬ身は
이런 식으로 답가도 잘 보내오고 재기(才器)도 있었지만, 여자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어울리지 않는 사이입니다”
하고 편지 왕래를 끊어 버렸다.
〈11단 맺지 못한 사랑(実らぬ恋)〉에서
또 이 남자에게는 이런저런 기회로 자주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이 남자와 전부터 관계가 있던 여자의 친구였기 때문에, 편지를 쓰려 해도 왠지 거북한 생각이 들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 여자가 자신을 헐뜯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는 새로운 여자와 겨우 편지를 왕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자가
귀로만 듣던 누구나 건넌다는 만남의 여울
저도 빠지지 않고 건너게 되었네요
音にのみ 人の渡ると 聞きし瀬を
われものがれず なりにけるかな
이렇게 읊어 보내자 남자는
삼도의 강을 어찌 건너지 않고 지나치겠소
소문으로만 듣고 끝낼 작정이었나
渡り川 いかでか人の のがるべき
音にのみやは 聞かむと思ひし
라고 써 보냈다. 그런데 그 후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16단 연인인 여자들(恋人の女た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