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기계 학습의 재료로 전락한 삶을 탈환하라
새로운 기술이 숨 가쁘게 등장하고 발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자리에 정체되었다고 느낀다. 노동 착취와 불평등은 여전하고, 파시즘이 또다시 전 세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블랙홀과 같은 ‘가속화된 정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히토 슈타이얼은 이러한 질문에 행동주의적이고 탐구적인 작품으로 답하는 미디어아티스트다. 관람자로 하여금 동시대 현실을 이해하고 그 이면의 모순과 작동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사회적 규범과 권력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유도한다.
슈타이얼에 따르면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현실을 창조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이미지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기계가 다른 기계를 위해 만들어 내는, 인간이 그 과정을 알지 못하는 알고리듬으로 형성되는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구축한 현실에서 인간 삶의 매 순간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생산 대상이자 기계 학습을 위한 데이터 세트가 된다. 표면만을 보는 기계는 현실의 편견과 편향을 강화하며, 그 결과 온갖 스팸 이미지들이 지구 네트워크를 순환하면서 실제와 동떨어진 이상적 삶의 모습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슈타이얼의 작업은 이렇게 고도 기술이 잠식한 일상 곳곳의 풍경을 그려 내기 위해 그 기술을 직접 사용한다. 동시에 그 암울한 풍경에서 ‘객체 되기’ 혹은 ‘사물 되기’라는 새로운 연대와 접합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은 슈타이얼의 동시대 진단과 대안을 열 가지 키워드로 해설한다. 슈타이얼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빈곤한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오늘날 ‘미술과 노동’은 어떻게 변화했고 무엇을 생산하는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왜 ‘포스트프로덕션’이 되었는지 등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슈타이얼을 따라 기술이 점령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우리의 삶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 보자.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1966∼ )
동시대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미디어아티스트, 시각예술가, 영화제작자 중 한 명이다. 1966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으며 현대 미술계, 특히 뉴미디어아트와 비디오아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쿄와 뮌헨에서 영화 촬영과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을 전공했고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의 뉴미디어아트 교수로 있다. 동시대 예술, 정치, 경제, 노동, 기술의 교차점을 탐색하며 글로벌리즘, 디지털·네트워크 문화, 기계 비전·감시, 데이터 위상학, 정동 노동 등 다양한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주요 작품으로는 다큐멘터리 필름 형식의 <바벤하우젠>(1997), <비어 있는 중심>(1998), <11월>(2004)과 비디오 영상물에 간혹 설치물을 결합한 작품들인 <보이지 않는 방법: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MOV 파일>(2013), <유동성 주식회사>(2014), <면세미술>(2015), <태양의 공장>(2015) 등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전후로는 비디오 채널 영상물 <이것이 미래다>(2019), <야성적 충동>(2022) 외에 <가상 레오나르도의 잠수함>(2020), <댄싱 마니아>(2020) 같은 온라인 가상 설치 작품과 온라인 XR 유형의 작품도 발표했다. 에세이 역시 다수 발표했으며 이는 ≪스크린의 추방자들≫, ≪면세미술≫,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등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00자평
히토 슈타이얼은 첨단 기술을 활용한 작품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미디어아티스트다. 알고리듬으로 이미지를 지각하고 생산하는 기계의 한계와, 그러한 이미지로 구축된 현실의 문제점을 짚는다. 아울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상품화하는 상황에서 미술과 노동에 일어나는 변화를 밝힌다. 슈타이얼은 동시대 풍경을 암울한 모습으로 그리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연대와 접합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은 슈타이얼의 번뜩이는 사유를 열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온갖 스팸으로 둘러싸인 일상에서 우리 삶을 점령할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지은이
최소영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강사로 있다. 홍익대학교 미학과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매체미학을 전공했으며 사진, 영화, 디지털, 인공지능에 이르는 기술 매체와 이미지의 존재론적 특성, 기술과 지각의 상관관계 그리고 기술과 동시대 예술의 관계 등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챗GPT 시대 인공지능기술의 의미 연구”(2024), “가속화된 정체 – 블랙홀에서의 탈출: 가타리와 슈타이얼의 ‘포스트-미디어’ 개념을 중심으로”(2023),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인공지능예술 연구”(2022),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예술과 이미지 연구: 히토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 개념을 중심으로”(2021), “컴퓨터의 하드웨어 옹호를 통한 ‘사물’에 대한 사유”(2021) 등이 있으며 단행본으로 ≪인공지능과 예술≫(2019, 공저)이 있다.
차례
가속화된 정체: 블랙홀로부터의 탈출
01 빈곤한 이미지
02 수직 원근법
03 데이터 시대의 이미지
04 미술과 노동
05 기호 자본주의와 삶의 심미화
06 다큐멘터리의 불확실성 원리
07 인공 우둔함
08 객체 혹은 사물 되기
09 포스트프로덕션
10 일상에 대한 점령
책속으로
오늘날 생성되는 이미지 대부분은 스팸일지도 모른다. 슈타이얼이 먼 훗날 외계 지능체가 우리의 통신 기록을 살펴본다면 아마도 그가 보는 것은 스팸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지 스팸은 디지털 세계의 숱한 암흑 물질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이 이미지들은 우리 시대 들끓는 욕망의 축약본과도 같다. 거기 담긴 사람들은 탄탄한 몸매와 더불어 불경기에도 유용한 대학 학위를 갖고 있으며 주식과 코인 투자에 성공해 경제적 자립을 얻었으며 건강하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이를 수신하는 사람들은 그 광고 속 이상적 인간과는 전혀 다른 평범한 이들이다. 그들은 불완전하고 결여된 소모적 잉여로 여겨지는 듯하다.
_“01 빈곤한 이미지” 중에서
기계적 지각이 표준이 되는 시대에 우리 삶의 모든 표현은 관리, 경작, 수확, 채굴 가능한 자원이 된다. 따라서 슈타이얼은 우리 시대를 “데이터 신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오늘날 데이터 시대의 기술 혁명은 새로운 경작, 수확, 채굴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표현이 데이터 흔적에 반영되어 정보 생명정치의 자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_“03 데이터 시대의 이미지” 중에서
미술관은 “열성껏 무급 노동하는 인턴들을 직원으로 둔, 문화 산업의 공식 대리점”이자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공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과거 공장에서 그러했듯 생산과 착취가 이루어진다. 다만 미술관 인턴들이 생산하는 것은 전시회를 보면서 느끼는 감성, 경험, 즐거움과 같은 가치들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급여를 받지 못하거나 대형 전시가 끝나면 고용 계약 역시 끝나는 방식으로 착취당한다. 비물질 노동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 셈이다.
_“04 미술과 노동” 중에서
슈타이얼은 부적절한 이미지를 골라내는 일이나 기술이 미처 해내지 못한 것을 인간이 보완하는 일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그 적절함과 부적절함의 경계를 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업이 명확히 인간의 작업인지 그렇지 않은지 등의 상황이 모호할 뿐 아니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은폐되는 상황은 문제라고 본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술이 매우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한 이 기묘한 역설 자체가 인공 우둔함이라 할 수 있다.
_“07 인공 우둔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