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 0차원에서 펼쳐지다
알고리즘의 역사부터 알고리즘 기반의 정보기술로 만들어진 월 드로잉, 프로세싱™ 등…
정보기술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새로운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다
알고리즘적 사고는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양말 개기, 시장 보기, 약속 장소에 찾아가기 등과 같이 비교적 일상적이고 간단한 목표가 주어진 경우에도 단지 의식하지 않거나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는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순서와 방식, 그리고 실행을 항상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곡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오브제를 만드는 작품 활동도 얼마든지 알고리즘적 활동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논리성과 체계성만 있을 뿐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듯 보이는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적 접근방식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는 셈이다.
알고리즘적 사고를 반영해, 최근 예술계 일각에서는 스스로를 예술가나 아티스트 대신 작가 혹은 창작자(creator)로, 한 발 더 나아가 그저 만드는 자(maker), 또는 작업하는 자(worker)로 간주하는 움직임이 증가하는 추세다. 창작, 작품 등의 용어들에 켜켜이 쌓여온 해묵은 관습적 함의로부터 탈피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번거롭고 화려한 수사 없이 ‘만듦’ 자체로서 작품 활동의 근본적 의미를 담백하게 강조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시도로부터 우리는 정보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간단한 알고리즘 수식으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솔 르윗의 <월 드로잉>, 케이시 리스의 예술 프로그래밍 언어인 프로세싱™ 등이 그 사례다.
그리고 이 작업들의 중심에는 정보기술이 있다.
독일의 매체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1920∼1991)는 예술 매체(媒體, media)의 단계적 출현을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이 세계, 즉 4차원의 시공간으로부터 차원성(dimensionality)을 단계적으로 압축하고 줄여나감으로써 세계에 대한 조작성(manipulability)을 제고하는 과정으로 본다. 지난 세기, 우리는 1차원에서 길이를 마저 떼어냄으로써 0차원에 도달했다. 선에서 길이를 빼면 점(點)이 남는다. 요컨대 0차원은 점의 차원이며, 모든 차원 압축이 완료된 차원이다. 그리고 점으로 구성된 0차원을 대표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가 바로 정보기술이다.
본디 하나였으나 오랜 기간 분리되어 있었던 예술과 기술은 우리의 지금ᐨ여기에서 다시금 융합하고 있다. 정보기술, 컴퓨터, 알고리즘, 인공지능 등은 인간의 직관, 영감, 독창 또는 창의 등을 뜻 모를 숫자와 기호로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준의 정확한 계산에 의거해 그것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도구다. 이 책은 정보기술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통해 오늘날의 ‘창의’ 개념을 새로 쓰고, 정보기술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앞으로의 예술들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200자평
정보기술은 전자라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0차원을 대표한다. 우리를 둘러싼 삼라만상이 전자를 비롯한 다양한 입자들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입자의 차원인 0차원은 가장 창의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솔 르윗의 <월 드로잉>, 케이시 리스의 프로세싱™ 등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한 0차원 예술의 창작 사례를 살피며 우리에게 0차원의 관점에서 새롭게 ‘창의’ 개념을 사유하기를 요구한다. 오늘날의 창의란 오직 직감이나 직관에 의존한 것이 아닌, 알고리즘적 사고를 포함한 새로운 개념이 될 것이다.
지은이
윤나라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다. 프랑스 파리 8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학사 및 동 대학 미디어·디자인 및 동시대 예술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동 대학 미학·과학·기술 및 예술 융합대학원에서 예술 공학 논문 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작업으로 (2015), (2015), (2016), (2016), <Écouter du silence>(2017), (2018), (2020)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 “<총몽>의 사이보그 기표 연구: 인지과학의 자기조직화와 체현된 인지 개념을 중심으로”(2019), “인공지능의 탈신화화: 다큐멘터리 <알파고>와 강/약 인공지능 개념을 중심으로”(2020), “인공지능에 관한 예술공학적 이해: 인공 신경망을 활용한 예술 콘텐츠의 ‘창의’를 중심으로”(2020), “알고리즘과 콘텐츠 창작에 관한 예술공학적 이해: <월 드로잉 358번>의 두 가지 버전을 중심으로”(2021) 등이 있다. 예술단체 ‘아토’의 총괄 아트디렉터로서, 동시대 인문학과 철학의 개념을 영화 등의 대중 문화예술 콘텐츠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2020년 가을부터 <송ᐨ씨네 문화콘서트>라는 인문학 콘서트 시리즈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차례
인공지능 시대의 창의
01 알고리즘과 예술
02 알고리즘 아트
03 개념 예술의 알고리즘적 사고
04 정보기술과 예술의 만남
05 프로그래밍과 예술
06 소프트웨어 아트
07 인간의 배움과 인공지능의 학습
08 지적 발판으로서의 인공지능
09 AI 아트
10 정보기술의 0차원과 예술의 0차원
책속으로
그런데 과연 ‘임의의 결과물’을 만드는 알고리즘도 알고리즘일까? 예술 작품 활동과 알고리즘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임의성 또한 알고리즘의 주요 특성 중 하나로 간주한다. 주지하다시피, 알고리즘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즉, 과정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기만 하다면 알고리즘으로서의 기본 조건은 충족되었다는 뜻이다.
_ “02 알고리즘 아트” 중에서
이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오직 ‘컴퓨터’라는 용어만으로 정보기술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적으로 아우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이 용어를 듣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어떤 기술적 장치(device)나 특정 제품(product), 즉 정보기술의 물질적(material) 측면을 먼저 떠올린다. 이는 이 용어를 보다 신중하게 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논의에 이 용어를 도입하는 순간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논의의 중심이 정보기술의 물질적 측면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_ “04 정보기술과 예술의 만남” 중에서
프로그래밍 언어의 표기 및 구문 체계는 인간 언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모든 인간 언어가 우열 없이 동등한 가치와 특성을 가지듯, 프로그래밍 언어 또한 각각의 고유한 장점과 영역을 갖는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알면 세계 어디서든 자유롭게 의사소통 할 수 있듯이,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익혀두면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적합한 언어를 선택해 작업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언어와 프로그래밍 언어를 동시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만 있다면 양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알고리즘적으로 사유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_ “05 프로그래밍과 예술” 중에서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일 뿐 로봇이 아니며,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앞서는 데다 불멸이기까지 한 신(神)적·초월적 존재는 더욱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인공지능을 대단한 것으로 과장하고 왜곡하는 접근은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미처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 차단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_ “08 지적 발판으로서의 인공지능” 중에서
지난 세기 우리는 1차원에서 길이를 마저 떼어냄으로써 0차원에 도달했다. 선에서 길이를 빼면 점(點)이 남는다. 요컨대 0차원은 점의 차원이며, 모든 차원 압축이 완료된 차원이다. 그리고 점으로 구성된 0차원을 대표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는 정보기술이다.
_ “10 정보기술의 0차원과 예술의 0차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