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7세기의 서구화와 세속화 현상이 러시아 문학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성자전 양식에서 해방된 전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온갖 유형의 협박과 약속들로 가득 찬 재치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피카레스크소설이 출현한다. 불안한 17세기에 안정된 삶과 정체성의 보장에 관한 당시 민중의 요구를 텍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문학 장르는 시대와 장소의 변천에 조응해 문학예술의 방법이 바뀌는 데 따라 자유롭게 설정되고 폐기되어 왔다. 17세기 이전까지의 문학 장르는 실제적인 기능과 연관되어 주로 정치적·도덕적 기능을 갖는 반면에, 17세기에 문학 장르는 점진적으로 순문학적 기능을 갖기 시작한다. 17세기의 대표적인 문학 장르에는 생애전, 이야기, 풍자 등이 있다.
1. 17세기 러시아 전기문학
중세 러시아 전기문학의 장르 가운데 하나인 성자전은 주로 비잔틴문학을 모방한 것으로, 허구적이면서 전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성자전의 세부적인 내용에는 중세 러시아인들의 심리와 작가 자신의 상상력이 흥미롭게 반영되어 있다. 성자전은 인물 묘사의 기본 원칙과 일정한 규범적 구조를 요구한다.
중세 문학에서 중세적 관점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17세기 초 “혼란의 시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혼란의 시기를 겪은 17세기 러시아는 서구 문물의 본격적인 수용 및 서구에 대한 민족주의적 경계와 적개심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공존하는 모순된 사회였다. 모순이 공존하는 시대의 문학 텍스트 속에는 절대적 기준보다는 상대적 기준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그러한 시대에 대상 인물의 평가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17세기의 전기문학 작품들은 성자전의 전통적인 요소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과도기적인 생애전으로 발전된다.
<라자레보 마을의 울리야니야 이야기>
이 텍스트의 장르는 중세적 성자전이라기보다는 일상적 이야기나 가족 연대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적 개인이 중세적 성자를, 인간적 고통이 중세 성자가 겪는 악마적 유혹을 대치한다.
저자는 어머니 울리야니야라는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즉 전기 작가와 대상 인물과의 친밀함이 잘 드러나 있다. 인물에 대해 잘 모르는 서술자가 서술하듯이 객관적이고 상투적인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상의 전반적인 생애를 열성적이며 일관성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또한 울리야니야가 살았던 시대와 생활 관습이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주사제 아바쿰의 생애전>
자서전 형식의 생애전으로, 중세의 전형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성자전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구교도 문학작품으로 간주된다. 또한 사상적으로 보수적인 텍스트지만, 반면에 예술적으로는 사적인 편지 형식의 독창적인 텍스트다. 전통적인 성자전 장르에 관심을 쏟은 아바쿰은 경직된 성자전 형식을 파괴하고, 자서전적인 회고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는 문장에 민중 언어를 과감하게 혼합했다. 개인적인 삶의 고난과 러시아인들의 생활양식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사회적 불의와 권력층과 교회에서 나타나는 질서 문란과 횡포를 폭로한다.
2. 17세기 러시아 피카레스크식 이야기
순수하게 문학적 장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17세기의 대표적인 장르는 ‘포베스트(Повесть)’와 ‘풍자’다. 17세기에는 매우 다양한 문체가 발달한다. 포베스트 문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카레스크식 이야기로, 우리는 이것을 악한소설 또는 건달 소설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 소설은 유럽 여러 나라에까지 파급되어 많은 독자층을 형성했다. 러시아 건달 소설은 과거의 성자전, 빌리나, 서사시, 스카스카, 포베스트라는 장르들을 기억한다. 따라서 건달 소설 안에는 과거의 장르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새로운 표현 양식을 만들어 내게 된다.
<사바 그룻친 이야기>
사바가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초로 한다. 이 작품은 중세 문학 가운데 생애전의 전통과 피카레스크소설과 같은 새로운 문학적 요소들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의 기본 사상은 기도와 참회를 통한 죄인의 구원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아버지와 자식의 문제, 즉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중세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돌아온 탕아’의 테마가 드러난다.
<프롤 스코베예프 이야기>
사기꾼 건달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로, 현실 논리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테마를 기초로 냉소적 리얼리즘을 보여 주기도 한다. 주인공에게는 사기꾼이라는 칭호가 붙지만, 화자의 동정을 받는, 밉지 않은 악한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행위를 신이나 악마의 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에 의지한다. 인물을 형상화하고 심리묘사를 사실적으로 하면서 작가는 생동감 넘치는 유머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의 대표적인 귀족들인 보야르와 스톨니크의 오만과 자존심을 대상으로,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의 문벌제도에 대한 풍자며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200자평
17세기의 서구화와 세속화 현상이 러시아 문학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성자전 양식에서 해방된 전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온갖 유형의 협박과 약속들로 가득 찬 재치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피카레스크소설이 출현한다. 불안한 17세기에 안정된 삶과 정체성의 보장에 관한 당시 민중의 요구를 텍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옮긴이
조주관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OSU) 대학원 슬라브어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데르자빈의 시학에 나타난 시간 철학(Time Philosophy in Derzhavin’s Poetics)>이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학술위원을 역임하고, 2000년 2월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데르자빈의 시학에 나타난 바로크적 세계관과 토포이 문제>(교과부장관상 수상)가 있고, 대표 저서로 ≪러시아 문학의 하이퍼텍스트≫, ≪러시아 시 강의≫,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 ≪고대 러시아문학의 시학≫(문광부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러시아 현대비평 이론≫, ≪시의 이해와 분석≫, ≪주인공 없는 서사시≫, ≪자살하고픈 슬픔: 안나 아흐마또바 시선집≫,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검찰관≫, ≪루슬란과 류드밀라≫, ≪타라스 불바≫, ≪중세 러시아 문학(11∼15세기)≫, ≪16세기 러시아 문학≫, ≪17세기 러시아 문학≫, ≪17세기 러시아 풍자문학≫, ≪참칭자 드미트리≫, ≪노브고로드의 바딤≫ 등이 있다. 현재 18세기 러시아 문학 시리즈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차례
라자레보 마을의 울리야니야 이야기
슬픔과 불행 이야기
사바 그룻친 이야기
프롤 스코베예프 이야기
주사제 아바쿰의 생애전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여보, 당신 알고 있어! 안누시카를 찾았어!” 그러자 그의 아내가 물었다. “여보, 그 아이가 어디 있는데요?” “아, 글쎄 도둑이며 사기꾼에다 비방자인 프롤 스코베예프가 그 아이와 결혼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