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희곡 <3cm>의 창작 모티브 중 몇몇은 실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의 대학 시절, 명륜동에 소재한 카페 ‘장 주네’ 여사장이 살해된 사건이 작품의 기원이 되었다. 화가(석현)와 바이올리니스트(지연)의 관계는 작가가 가깝게 지내던 미술과 선배의 젊은 시절 에피소드에서 차용한 것이다. 또 석현이라는 인물의 형상화 과정에는 작가의 개인사가 개입되어 있으며, 작품의 가장 암울한 모티브인 ‘요르단으로 떠난 어머니’, ‘혜화동 태극당 제과’는 작가의 요절한 대학 동기의 사연과 관계있다. 극 중 지연이 개업하려던 카페 상호이자 작품 제목이기도 한 ‘3cm’는 작가가 자주 드나들었던 카페의 실제 상호다.
이처럼 작가의 개인적 경험들이 직조되어 있는 희곡 <3cm>는 ‘진부한 멜로드라마’를 한 편 쓰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에서 출발했다. 결과적으로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화가 석현과 바이올리니스트 지연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부터 둘이 연인으로 맺어지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3cm>는 이런 진부한 전개를 따르지 않을뿐더라 멜로드라마다운 결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목표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리며 아쉬움과 그리움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 ‘3cm’라는 숫자로 구체화되어 선연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말’에서 ‘3cm’라는 물리적 거리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제목 ‘3cm’는 어긋남과 그로 인한 필연적인 그리움의 거리를 상징한다. 어쩌면 산다는 건 그 자체가 어디로부턴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어긋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언젠가 확연히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어긋남, 내가 필연이라 믿고 있는 삶의 동기와 과정의 어긋남, 그저 내가 아닌 타인과의 어긋남, 생각과 행동의 어긋남… 동시에 그 어긋남이 야기한 거리(距離)는 그리움의 고통이 내재하는 힘겨운 노력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서로의 차이는 다가섬의 동기이자 엇갈림의 징후.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피차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서로를 느끼려는 순간 그것만큼의 불편함을 수반하는 것. 원래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연민은 결핍된 시간의 울타리 안에 쉽사리 구속되지 않는 법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2010년 극단 하땅세 제작, 조태준 연출로 대학로소극장 ‘스튜디오 76’에서 초연되었다. 25일간 전 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후 지원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자평
희곡 <3cm>는 화가 석현과 바이올리니스트 지연이 우연히 만나 교감하고 정서적 거리를 좁혀 가는 과정을 그린다. 짧게만 느껴지는 물리적 거리 ‘3cm’는 정서적 거리로 환원되었을 때 영원히 닿지 않을 듯한 아쉬움의 거리로 다가온다.
‘3cm’는 살면서 닿고자 했던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리며 느끼게 되는 거리감을 상징한다. 어떤 땐 꿈과 이상이, 어떤 땐 연인이 그 정도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간다. 그보다 자주, 삶의 동기와 과정, 생각과 행동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어긋난다. ‘3cm’는 이 모든 어긋남으로 이루어진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들이 직조되어 탄생한 이 작품은 초연 때 25일간 전 회 전석 매진으로 공연성을 인정받았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후 지원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은이
조태준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同)대학원을 졸업하고 앙토냉 아르토의 연극 이론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객원교수를 거쳐 배재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2년 미국 루이지애나 대학교(ULL) 커뮤니케이션학과 방문교수를 지냈다. 공연 창작 현장에서 극작가 및 연출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으며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고 현재 극단 인공낙원 대표, 극단 하땅세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창밖의 앵두꽃은 몇 번이나 피었는고>, <3cm>, <푸른 개미가 꿈꾸는 곳>, <아랑, 꽃잎처럼>, <오늘이> 등이 있으며, 연극 <유령소나타>, <예외와 관습>, <루나사에서 춤을>, <목소리>, 뮤지컬 <포비든 플래닛>, <애랑연가>, <규방난장>, 오페라 <류퉁의 꿈> 등을 연출했다. 또한 연극 이론 및 극작술, 공연 미학에 관련한 논문과 칼럼을 여러 편 썼으며,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연극≫(천재교과서, 2018)을 공동 집필했고, 번역 희곡 ≪유령소나타≫(지만지, 2014)와 <바다에서 온 여인>(지만지, 2015), <로칸디에라>(지만지, 201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지만지, 2018), ≪헤다 가블레르≫(지만지, 2018), ≪건축가 솔네스≫(지만지, 2019), ≪루나사에서 춤을≫(지만지, 2020), ≪로스메르스홀름≫(지만지, 2020)을 펴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 인기척
2. 소실점, 혹은 구도 잡기
3. 낯선 음악을 위한 튜닝
4. 시간의 원근법
5. 레가토−기억
6. 윤기 나는 빨강과 절대음 A
7. 사람이 배경인 정물
8. 코다 없는 도돌이표
9. With or Without You
10. 그리움의 거리 3cm
작가의 말
조태준은
책속으로
석현 : 그날 이후 난 빨간색 꿈을 참 많이 꿨어. 이상하지? 꿈이 컬러로 보이고 말이야.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야. 조금씩, 조금씩. 나도 한참 뒤에 가서야 알았어. 다들 내 그림을 신기하게 보는데 처음엔 영문을 모르겠더라고.
도영 : 신기하게 본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열광했었지. 졸업 전시회 때 기억나냐? 네가 출품한 ‘꿈꾸는 숲속의 아이’ 연작 시리즈 말이야! 제목 맞나? 아무튼… 우리보다도 박 교수님이 더 흥분했었잖아. 나중엔 기자들까지 불러 오고. 그때 그 불타는 듯한 붉은 숲의 강렬함… 한마디로 끝내줬었다.
석현 : 그랬었나…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말이야, 색맹 이전의 색채 세계에 대한 기억 자체가 희미해졌다는 거야.
-47쪽
지연 : 제목이 뭐예요?
석현 : 제목이요? 무제요.
지연 : 무제?
석현 : 무제 몰라요? 제목이 없다구요. 헌데 최근에 그 그림의 제목을 생각해 냈어요. 아주 우연히요.
지연 : 그게 뭐죠?
석현 : 3cm! 3mm도 아니고 3m도 아닌 3cm! 어제의 붓질과 오늘의 붓질이 만들어 내는 그 유사함과 차이의 거리. 우리가 발전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매일매일의 어긋남 같은 거, 대상을 응시하는 시선이 그려 내는 절망의 낙차, 아니면 내 존재의 삐딱함이 만들어 내는 지상으로부터의 기울기…
-82쪽
석현 : (신랄한 어조로) 뭐예요, 지난 며칠 동안 날 갖고 논 거예요? 오다가다 시간 때울 데가 없어서 여기 와서 노닥거린 겁니까?
지연 :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석현 : 그럼 뭐예요? 저 같은 부류의 인간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적당히 간섭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연 :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로. 정말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처음 여기 오던 날, 인테리어 공사 계약을 했어요. 공사가 시작되는 걸 보고 막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요. 그래서 비를 피하려다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된 거예요. 거기까진 정말 우연이에요. 맞아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어요. 공사가 일주일 정도 걸린다기에… 하지만 결코 장난은 아니었어요. 화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막상 들어와 보니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했구요. 여기 들어온 순간 왠지 나도 모르게 마치 새로운 삶의 문턱에 들어선 거 같았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내내 그랬어요.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거 같았어요.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그렇지만 가슴 설레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정말이에요.
-88-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