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구상 시의 근본적 인식은 종교적 문답과 철학적 형이상학에 기대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맨 앞자리에는 분단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월남한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이 내재해 있으며,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된 폐허적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1950년대 초기 시는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의 핍진한 실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낭만주의적 자의식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녔던 시인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쟁투가 벌이는 분단과 전쟁의 파국 앞에서 폐허적 현실을 명징하게 묘파하려는 태도로 일관한다.
60년 넘게 여전히 분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남북한의 현실은 1950년대를 전후한 분단의 맹아적 공간 속에서 초토화된 현실을 노래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따뜻한 봄의 도래를 꿈꾸었던 시인의 선지자적 표정을 새삼 주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현실을 응시하면서도 미래를 견인하는 예지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구상은 그가 노래했던 영원한 오늘을 살아 낸 시인에 해당한다.
전쟁의 참화로 인해 쑥대밭이 된 초토의 폐허를 응시하던 시인은 삼라만상의 천변만화하는 다면체적 표정 속에서 시적 감흥을 얻고, 만물이 영원의 지향을 내포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표정을 선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유무정의 여부를 떠나 이미 그대로 진선미의 시적 향유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은 세계의 초월적 표정을 수용하는 구도자적 종교인의 자세를 보여 준다. 시인에게는 대지적 자연의 변화무쌍한 사계절의 표정이 곧 인간세의 다른 표정으로 느껴진다. 즉 오늘을 사는 영원의 표정을 자연물로부터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인간이므로 순수와 영원을 지향함에도 늘 내면의 죄를 짓고 오욕칠정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팔십 노구에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갈구할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이 오늘과 영원을 함께 살면서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던 낭만적 소년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절망의 현실에서 절망을 노래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 절망과 폐허의 참혹한 영토에서 따뜻한 봄날 새싹의 아름다움을 예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시인의 낭만적 구도자의 표정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시인은 영원한 오늘의 시인으로 거듭난다.
200자평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조아적이요 반역사적이요 현실도피적이며 절망적이고 반동적인 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구상의 시집 ≪응향≫에 내린 평가다. 문학적 분단을 야기한 ≪응향≫ 필화사건 후 월남한 그는 분단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명징한 시선으로 직시한다. 그가 결국 폐허 속에서 찾아낸 것은 절망이 아니라 초월이었다. 영원한 오늘을 응시하는 말씀의 구도자 구상의 작품을 만나 본다.
지은이
구상(具常, 1919∼2004)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다. 1938년 원산 근교 덕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 수료 후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1941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다. 1942∼1945년 ≪북선매일신문≫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46년 북한 원산에서 시집 ≪응향≫ 필화 사건을 겪은 뒤 월남한다. 월남 이후 1948∼1950년 ≪연합신문≫ 문화부장, 한국전쟁 기간인 1950∼1953년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 1953∼1957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1961∼1965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겸 도쿄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20여 년 넘게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교육인으로서는 1952∼1956년 효성여대 부교수, 1956∼1958년 서울대 강사, 1960∼1961년 서강대 강사, 1970∼1986년 하와이대학교 극동어문학과 교수, 1973∼1975년 가톨릭대 신학부 대학원 강사, 1976∼1998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대우교수 등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을 펴낸 뒤, 1953년 사회평론집 ≪민주고발≫, 1956년 시집 ≪초토의 시≫, 1960년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 1975년 ≪구상 문학선≫, 1976년 수상집 ≪영원 속의 오늘≫, 1977년 수필집 ≪우주인과 하모니카≫, 1978년 신앙 에세이 ≪그리스도 폴의 강(江)≫, 1979년 묵상집 ≪나자렛 예수≫, 1980년 시집 ≪말씀의 실상≫, 1981년 시집 ≪까마귀≫, 시문집 ≪그분이 홀로서 가듯≫, 1982년 수상집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 1984년 자전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1985년 수상집 ≪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1986년 ≪구상 시전집≫, 수상집 ≪삶의 보람과 기쁨≫, 1987년 시집 ≪개똥밭≫, 1988년 수상집 ≪시와 삶의 노트≫, 시집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시론집 ≪현대시창작 입문≫, 이야기 시집 ≪저런 죽일 놈≫, 1993년 자전 시문집 ≪예술가의 삶≫, 1994년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 1995년 수필집 ≪우리 삶, 마음의 눈이 떠야≫, 1996년 연작 시선집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 1998년 시집 ≪인류의 맹점에서≫, 2001년 신앙 시집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2002년 시집 ≪홀로와 더불어≫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펴낸다.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서 시집이 번역 출간되었으며, 1955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57년 서울시 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학민국 문학상 본상, 1993년 대학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4년 5월 11일 작고했고,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인 구상은 서울에서 출생해 북의 원산, 일본의 도쿄, 미국 하와이 등을 거치면서, 동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 조예가 깊은 명상가였다. 초기의 낭만주의적 지향은 해방 공간 좌우익의 대립과 북한 문단 재편기에 ≪응향≫ 필화 사건을 입으며 상처를 입게 되고, 기자로서의 직분과 신앙적 고민을 아우르면서 이후 형이상학적 인식에 기반한 시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폐허적 분단 현실의 참담함을 노래한 <초토의 시> 연작에서 시작된 그의 시적 여정은 ‘영원한 오늘’을 노래한 구도자적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한 오늘’을 사는 낭만적 구도자의 표정으로 우리 앞에 살아 있다.
엮은이
오태호는 1970년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태어났다. 1993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1998년 <황석영의 ≪장길산≫ 연구>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과 삶에 대해 더욱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된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2000년부터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비롯한 교양과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되었고 이후 여기저기에 잡문을 쓰고 있다. 2004년에는 <황석영 소설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2005년에는 소설 평론들을 모아 ≪오래된 서사≫를, 2008년에는 시 평론들을 모아 ≪여백의 시학≫을, 2012년에는 소설 평론집 ≪환상통을 앓다≫를 출간하는 등 세 권의 평론집을 상재했다. 2012년 현재 글쓰기 등을 강의하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차례
초토의 시·1
초토의 시·2
초토의 시·3
초토의 시·4
초토의 시·5
초토의 시·6
초토의 시·7
초토의 시·8
초토의 시·9
초토의 시·10
초토의 시·11
초토의 시·12
초토의 시·13
초토의 시·14
초토의 시·15
초토의 시·16
밭 일기·1
밭 일기·3
밭 일기·6
밭 일기·10
밭 일기·56
밭 일기·61
그리스도 폴의 강·4
그리스도 폴의 강·15
그리스도 폴의 강·43
거듭남
풀꽃과 더불어
시
나
한 알의 사과 속에는
詩論
詩語
눈
具常無常
臨終告白
壽衣
저승의 문턱에서
松嶽 OP에서
鎭魂曲
날개
어른 세상
실체와 실상
꿈
그림과 추억
가슴의 불
민들레
마음의 구멍
新綠
내 안에 영원이
나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
시심
枯木
가장 사나운 짐승
말씀의 實相
마음의 눈을 뜨니
두 가지 箴言
마을 밤
漢拏山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詩人은 어께나 재듯이 친구 하나를 끌고 호기 있게 들어선다.
娼女는 반갑고도 사뭇 미안스러워 어쩔 바를 모른다.
방에 들어 흘깃하면 松·鶴 수틀 아래 합장한 예수 아기의 힌 석고상이 매달려 있다.
詩人은 올 적마다 쓰디쓴 웃음을 풍기며
—이건 네 아이 얼굴이가?
퉁겨 묻고는
—너도 막달레나이냐
혼자 중얼댄다.
眞露 한 병과 스루메 한 마리가 상 위에 얹혀 들어온다.
엎친 술을 한두 잔 켜고 나서는 이제 남은 흥정을 부쳐야 했다.
—이 친구 색씨 하나 똑 딴 것으루 데려와!
—아주 마음 좋은 사모님으로 말이야
—빨랑, 빨랑, 졸려
호통에 못 이겨 부시시 이러서 나간 娼女는 얼마쯤 후 방문을 빼꼼히 열고 눈짓으로 詩人을 불러 내간다.
—저, 저, 저 손님 다리 하나 없으시죠.
—응, 왜 그래, 상이용사야
—아마 동무 애들이 안 받을 거에요, 그, 그래서 선생님 형편이라면 제가 모시죠.
—으음
詩人은 이 最上級의 善意 앞에 흠찍 놀라면서
—그래, 그래 그래야 나도 새장가 들지
하고 얼버무려 버린다.
惡의 껍질 같은 칠흑 어둠이 덮인 娼窟 마당에다 詩人은 오줌을 깔기면서 이 굴속에도 비록 光彩는 없으나 별과 詩가 깃들어 있음을 다사하게 녁인다.
●무참하게도 군데군데
내장을 드러내고 있는
漢江
썩어 냄새가 나는
연탄빛 흐름 위에
매연을 뒤집어쓴 하늘과
그 속에 병든 희부연 태양이
汚物처럼 번득인다.
강 복판 여기저기
浚渫船과 포크레인이
無法者들처럼 힘을 誇示하여
轟音을 발하고
철교와 인도교 위를
차량들이 꼬리를 물어
—황금의 偶像을 쫓는 무리들과
—새 모세를 찾는 무리들을 싣고
미친 듯이 달린다.
엉성한 잡초 사이 웅덩이에서
입술을 축인 물새 한 마리가
애절한 울음을 남기고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는데
여위어서 찰싹이지도 못하는
절망의 흐름 위에
그 옛날 출렁이고 넘치던
추억의 강을 그리며
멀건히 우러른 나의 눈에
南山도 우거지상이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大地가 숨 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江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太陽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永生한다.
●내가 달마다 이 연작에다가
허접스런 이야기를 골르다시피 하여
시라고 써 내니까
젊은 시인 하나가 하도 이상했던지
“그러면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겠네요” 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다.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에는
진·선·미가 깃들어 있다.
죄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서
마치 어린애처럼
맛보고 누리는 것이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