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른 한편≫은 20세기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화가이자 삽화가로 활동했던 알프레트 쿠빈(1877∼1959)이 1909년에 발표한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창작의 부진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쿠빈은 갑작스런 창작열에 휩싸여 8주 만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칸딘스키, 막스 다우텐다이, 토마스 만 등 당대의 많은 예술가, 작가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었던 이 작품에서 쿠빈은 소아시아 부근 어딘가에 존재하는 “꿈의 왕국”의 초현실적인 모습과 그 몰락의 과정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을 문명화된 유럽 사회와 그 몰락의 상징적 묘사로 이해하면, 이 작품의 현실 묘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 하나가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세기 전환기 유럽의 문명과 그 몰락이 사실성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꿈의 왕국”의 몰락 과정은 외견상 지극히 사실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쿠빈이 실제로 묘사하고자 한 것이 문명화된 유럽 사회와 그 암울한 미래라면 그러한 사실성은 단지 주관적인 인상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허구적 세계에 사실성의 포장을 덧씌워 주는 가장에 불과하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대상 하나하나를 보면 사실적인 묘사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작품의 주제와 실질적인 묘사의 대상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실의 모사와는 지극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작품 속에 묘사되는 1차적인 사실이 작품의 실제 내용과 오로지 상징적인 차원에서만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상징을 통해 작품의 실제 내용이 보다 과장되고, 극적이며, 주관적인 방식으로 전달되는 작품들은 쿠빈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향은 기본적으로 자연주의 이후 빠르게 진행된 아리스토텔레스적 리얼리즘의 붕괴 및 서술 관점의 내면화·주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많은 작가들이−쿠빈의 경우처럼 급진적인 방식은 아니라 하더라도−이와 같은 경향을 보여 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구스타프 마이링크, 레오 페루츠, 프리츠 폰 헤르츠마노프스키, 올란도, 프란츠 카프카, 알프레트 쿠빈 등의 환상 문학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한편≫이 단적으로 보여 주듯, 이들의 작품이 보여 주는 환상적 세계는 다름 아닌 ‘주관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인식된 세계’의 모습이다. 낭만주의 이후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환상 문학이 유독 이 시기에 다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을 사실성의 강요로부터 해방해 준 당대의 문학사적 조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200자평
독일 환상 문학의 대표 작가인 알프레트 쿠빈의 유일한 장편 소설. ≪골렘≫과 함께 20세기 초 독일 환상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19세기 말 몰락하는 유럽 문명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그려 낸다. 극단적으로 주관화된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세계의 본질을 재구성해서 보여 주는 이 희귀한 환상성은 이후 현대적인 환상 문학의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해 준다.
지은이
알프레트 레오폴트 이지도르 쿠빈은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이 주도한 “청기사파” 화가 중 한 명이자, 기괴하고 환상적인 그림과 삽화들로 20세기 전반 큰 명성을 얻었던 화가였다.
쿠빈은 1877년 4월 10일에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영토였던 북부 보헤미아의 라이트메리츠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쿠빈과 요한나 예니 쿠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879년에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 본토의 잘츠부르크로 이주한 쿠빈은 1883년에 다시 잘츠부르크 근교의 첼 암 제로 이주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쿠빈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고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직업 교육에도 실패하고, 병약한 체질로 군 입대도 수포로 돌아갔다.
방황과 실패로 점철된 쿠빈의 청소년기는 1898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막을 내린다. 뮌헨으로 이주해 루트비히 슈미트 로이테의 사립 그림 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비슷한 또래의 다른 젊은 예술가들을 만나 교류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예술가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막스 클링거의 작품에서 예술적·기술적 영감을 얻은 쿠빈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악몽과도 같은 환상적 내면세계를 표현해 낼 예술적 수단을 고안해 내고 본격적인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선 1900년경부터 흑백 에칭 기법을 이용한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왕성하게 창작했으며, 동시에 뮌헨의 예술가들이 모이던 슈바벤 지역의 카페 슈테파니와 카페 엘리테에서 다양한 문인들 및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907년에 쿠빈은 처음으로 책의 삽화를 그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이를 위해 잉크와 펜을 이용한 새로운 기법을 발전시켰다. 에드거 앨런 포의 독일어판 소설집 1권의 삽화와 더불어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장편 소설 ≪골렘≫의 삽화가 이때 그려졌다.
직접 그린 삽화들과 함께 1909년 출간된 ≪다른 한편≫은 칸딘스키 등의 예술가들과 막스 다우텐다이, 토마스 만 등 당대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호평을 받았다. 이후 쿠빈은 삽화 의뢰를 다수 받게 되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집 두 권, 오토 폰 율리우스 비어바움의 작품집, 빌헬름 하우프, 도스토옙스키, E. T. A. 호프만의 소설집 등에 삽화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삽화 작업을 통해 “기괴한 문학(schwarze Literatur)”의 삽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그의 창작과 전시 활동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가 교류하던 청기사파의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쿠빈은 츠비클레트에서 외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쿠빈은 뮌헨의 예술계와 접촉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재개했지만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위기를 겪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는 동안 쿠빈은 츠비클레트에 머무르면서, 왕성한 편지 왕래를 통해서만 외부 세계와 접촉했다.
전쟁이 끝나자 삽화 의뢰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쿠빈은 힘이 남아 있는 동안 계속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1950년과 1952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80세 생일을 맞이했던 1957년에는 뮌헨, 뉴욕 등 각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창작 활동은 1958년까지, 그러니까 결국 죽음으로 끝난 8개월간의 투병 생활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쿠빈은 1959년 8월 20일에 숨을 거뒀다.
옮긴이
홍진호는 서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독일 자연주의와 세기 전환기 문학에 대한 연구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연구 분야는 자연주의와 세기 전환기 독일 문학, 환상 문학, 독일 공연 예술 등이다. 역서로는 슈니츨러의 ≪라이겐 (아나톨, 구스틀 소위)≫, 그림 형제의 ≪독일 전설≫(공역)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세기 전환기 문학 속의 성(性)>, <환상과 현실 : 환상 문학에 나타나는 현실과 초자연적 사건의 충돌>, <<꿈의 노벨레> : 꿈속의 현실과 현실 속의 꿈>, <통계로 살펴본 독일 연극과 공연 예술의 현황> 등이 있다.
차례
1부 부름
1장. 손님
2장. 여행
2부 페를레
1장. 도착
2장. 파테라의 창조물
3장. 일상
4장. 마력(魔力)에 사로잡혀
5장. 교외
3부 꿈의 왕국의 몰락
1장. 적
2장. 외부 세계
3장. 지옥
4장. 환영−파테라의 죽음
5장. 결말
에필로그
부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의 두 눈이 다시 감겼다. 공포스럽고 끔찍한 삶이 그 얼굴에 들어섰다. 얼굴은 카멜레온처럼−끊임없이−수백, 아니 수십만 번이나 변했다. 그 얼굴은 순식간에 차례차례 젊은 사내의 얼굴로, 여자의 얼굴로, 아이의 얼굴로, 백발 노인의 얼굴로 변했다. 살이 쪘다가 수척해졌으며, 칠면조처럼 혹이 났다가는 아주 조그맣게 쭈그러들었다. 곧이어 거만하게 부풀어 올라 팽창하고 늘어나더니 비웃음과 선량함, 악의적인 기쁨과 증오를 표현했으며, 주름으로 가득 찼다가는 다시 돌처럼 반들반들해졌다. 이 모든 것들은 마치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비밀과도 같았다. 나는 돌아설 수가 없었다. 마법의 힘이 나를 붙들어 매고 있었으며, 경악이 내 위로 흘러내렸다. 이제 동물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자의 얼굴이 나타나더니, 곧 자칼처럼 뾰족하고 교활해졌다. 부풀어 오른 콧구멍을 가진 야생 수말로 변하더니, 새처럼 변했다가, 다음에는 뱀과 같이 변했다. 끔찍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혐오스럽고 피범벅이며 사기꾼 같고 비겁하며 흉측한 얼굴을 나는 봐야만 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천천히 평온이 찾아왔다. 번개 같은 것이 몇 번 얼굴에 지나갔지만, 일그러지고 끔찍한 얼굴이 사라지고 내 앞에는 다시 인간 파테라가 잠을 자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입술은 열에 들떠 있었고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다시 그 기이한 목소리를 들었다.
“보았느냐, 내가 지배자다! 나 역시 절망을 했었으니, 그때 나는 내가 가진 폐허에 왕국을 건설했다. 내가 지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