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더 큰 희망≫은 외관상으로는 빈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마지막으로 빈을 둘러싼 전투에서 수류탄에 의해 산화하는 반(半) 유대소녀의 이야기로 전쟁 소설을 연상케 한다. 두 명의 “잘못된”(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엘렌은 초라한 집에서 유대인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두 명의 “잘못된” 조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특권을 가진 박해하는 자들에게도, 차별과 배척을 당하는 박해받는 자들에게도 속하지 않는 그녀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희를 통해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 더 큰 희망의 밝은 빛을 믿으면서 죽음에 뛰어드는 어린이들에 관한 서정적 이야기다. 느슨하게 엮어진 일련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는 다큐적, 역사적, 자전적 현실이 시적 현실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이 시적 현실에서 나치의 비밀경찰에 쫓기는, 언제 집단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르는 아이들이 유희와 연극을 통해 현실에 저항하고 거부의 몸짓을 한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도, 히틀러라는 이름이나 유대인 또는 나치스라는 개념도 언급되지 않는다. 게슈타포는 비밀경찰, 유대인은 잘못된 조부모를 둔 사람, 제복을 입은 아이들은 히틀러 유겐트로 에둘러 표현된다. 어른들은 개체로서가 아니라 기능에 따라 등장하므로 이름이 없다. 소설은 이름이 있는 엘렌과 유대인 아이들에 의해 주도된다. 또 다른 특징은 현실세계와 환상(꿈)의 세계가 교차하는 점이다. 특히 여주인공의 소망과 불안이 낮과 밤의 꿈을 통해 표현된다. 표현양식 면에서도 사적 표현과 시적 표현이, 내적 독백과 대화가, 전지적 서술과 인물 시각적 서술이 교차한다.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독특한 묘사가 압권이다.
200자평
1948년 출판된, 오스트리아의 반(半) 유대인 작가 일제 아이힝거의 장편소설이다. 빈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끝내 전투에서 수류탄에 의해 산화하는 반(半) 유대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15세의 소녀 엘렌의 시각으로 유대인들이 겪는 굴욕, 불안, 절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일련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10개 장에서 현실과 환상이, 서사적 표현과 시적 표현이, 전지적 서술과 인물 시각적 서술이 교차한다.
지은이
일제 아이힝거는 1921년 유대인 어머니와 비유대인 아버지의 딸로 빈에서 태어났다. 의학대학에 다니던 중 자전 요소가 강한, 첫 작품이자 유일한 장편 소설인 ≪더 큰 희망≫을 집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더 큰 희망≫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1949∼1950년에 일제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피셔 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1년 새로운 시대의 문학을 주창한 47그룹의 모임에 참가했으며, 1952년 단편 <거울 이야기>로 47그룹 상을 수상했다.
주요 출간도서로는 단편집 ≪교수대 아래에서의 연설≫(1952), 단편집 ≪내가 사는 곳≫(1963), 작품집 ≪나쁜 낱말들≫(1976), 단편집 ≪나의 언어와 나≫(1978), 자서전 ≪영화와 숙명≫(2001) 등이 있다. 페트라르카 상(1982), 프란츠 카프카 상(1983), 대 오스트리아 국가 문학상(1995) 외 다수의 상을 받았다. 현재 빈에 거주 중이다.
옮긴이
김충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외국문학연구소장, 사범대학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의 시문학≫(공저), ≪민족문학과 민족국가 1≫(공저), ≪추와 문학≫(공저), ≪프란츠 카프카: 인간·도시·작품≫, ≪표현주의 문학≫이, 역서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메두사의 뗏목≫, ≪아침부터 자정까지≫, ≪병사 다나카≫, ≪구원받은 알키비아데스≫, 페터 슈나이더의 ≪짝짓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쟁≫,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 프란츠 베르펠의 ≪거울인간≫,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프리드리히 헤벨의 ≪니벨룽겐≫, 슈테판 하임의 ≪6월의 5일간≫ 등이 있다. 독일 표현주의 문학과 카프카에 관한 논문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 교수다.
차례
큰 희망
부두
성스러운 땅
낯선 권력을 위한 봉사
불안에 대한 불안
위대한 연극
할머니의 죽음
날개의 꿈
놀라지 마라
더 큰 희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녀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저 아래로 깊숙이.
아무도 그녀를 붙들 시도를 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녀가 매달릴 별 하나 없었다. 엘렌은 그녀의 모든 인형과 장난감 곰들의 팔을 지나 떨어졌다. 공이 굴렁쇠를 통과해 떨어지듯 그녀는 자기를 놀이에 끼워 주지 않았던 마당의 아이들 사이로 떨어졌다. 엘렌은 엄마의 팔을 통과해 떨어졌다.
반달이 그녀를 붙들었으나, 아이들 요람처럼 비열하게 기울어지더니 다시 내동댕이쳤다. 구름이 새털이불이고 하늘이 파란 천장이란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늘은 열려 있었다. 치명적으로 열려 있었다. 엘렌은 떨어지면서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들은 아직도 그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뛰는 것이라고, 그리고 위로 떨어지는 것을 나는 것이라고 했던 이 불쌍한 어른들. 언제 그들은 깨닫게 될 것인가?
−21~22쪽
“주는 게 바로 지니는 거야.”
아이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았다. 캄캄한 꿈속에서 들리는 천사의 밝은 목소리 같았다. 주는 것이 바로 지니는 것이야.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서 빼앗는 것을 내주어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로 인해 점점 더 가련해질 테니까. 너희의 장난감, 너희의 외투, 너희의 모자와 너희의 목숨을 내주어라. 모든 걸 줘 버려라, 그러면 지니는 것이다. 빼앗는 자는 잃어버린다. 그들이 너희의 몸에서 옷을, 머리에서 모자를 잡아채면, 웃어라, 왜냐하면 주는 것이 바로 지니는 것이니까.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것인 굶주림과 불안을 잃어버린, 배부른 자들과 안도하는 자들을 비웃어라. 너희의 마지막 빵조각을 내주고, 계속 굶주리도록 하라. 마지막 땅뙈기를 내주고, 계속 불안해하라. 너희 얼굴의 광채를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빛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190~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