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민족적 격동기의 기록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은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의 문집(文集)이다. 오늘날 수천 종의 문집이 있지만 대부분 조선 시대 것이고, 고려 시대 문집은 30여 종이 채 안 된다. 문집이란 개인의 저작물을 수집해 문체별로 정리한 것이기에 그 저자의 일생이 오롯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된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이승휴의 문집은 그만큼 귀할 수밖에 없다.
이승휴가 살아간 시대는 국난의 시대였다. 거듭된 몽고의 침입으로 민중의 삶은 피폐했으며, 고려 왕실은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승휴는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몽고의 5차 침입을 만나 삼척에서 항전했으며, 이때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다. 전쟁으로 인해 40세가 넘어서야 관직에 들어섰지만 원나라의 간섭과 부원 세력의 발호로 어지러운 정세에서 꾸준히 시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탐관오리를 탄핵하다 1280년 충렬왕의 실정을 간언해 마침내 파직되었다. 그의 글에는 이러한 고려 후기의 시대적 고통과 혼란, 이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고종에서 충렬왕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사행 기록인 <빈왕록>은 원나라 수도인 대도의 풍물과 황실의 연회, 사절 접견 의례 등을 알 수 있어 더욱 귀한 자료가 된다.
중국을 감동시킨 문장
이승휴는 강화도 낙성재에서 당대에 문명을 떨치던 최자(崔滋)와 알게 되었으며 이후 최자가 지공거로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면서 그의 문생이 되었다. 1273년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자 이승휴는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 책봉을 하례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올린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문신들의 탄복을 받았으며, 동행했던 송송례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
구성과 내용
≪동안거사집≫은 <잡저(雜著)>와 <행록(行錄)> 4권으로 구성되었다.
<잡저>의 첫머리는 1359년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잡저>는 한문 문체의 하나로 일정한 체제가 없는 것이 특색이지만, 그렇다고 잡동사니 글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체는 다르지만 논리가 타당하고 정연하며 저자의 성정(性情)이 잘 나타나 있다. 문집에서 잡저는 저자를 평가하는 가름대라고 할 수 있다. <잡저>에는 기(記)·계(啓)·서(書)·법어(法語) 등 10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특히 그중 사륙문은 이승휴 만년의 글들로, 그의 뛰어난 문장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잘 드러난다.
<행록> 1, 2, 3권은 모두 시집으로, 권1에는 19수, 권2에는 23수, 권3에는 1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는 문인들과의 교유시도 있고 기행시도 있고 감흥을 읊은 시도 있지만, 특징적인 것은 관로(官路)에 있는 사람들에게 준 시다. 당시 과거에 합격해도 권력가의 추천 없이는 임용되기 어려운 관로의 모습과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 준다.
권4는 <빈왕록(賓王錄)>이다. 내용은 이승휴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 다녀온 후 남긴 사신록(使臣錄)이라 할 수 있다. 1273년 원(元)이 황후·황태자를 책봉하면서 그 사실을 고려에 알려오자, 원종(元宗)은 아들 순안공 왕종(順安公王悰)을 하진사(賀進使)로 삼고 송송례(宋松禮)·이분성(李汾成)·정인경(鄭仁卿) 등을 수행 관원으로 삼아 원나라에 파견했다. 서장관인 이승휴는 1273년 윤 6월 9일 고려를 출발해 7월 29일 원도(元都)에 도착했다. <빈왕록>은 바로 이 사행(使行) 길 연도(沿道)의 풍물을 시로 읊으면서 자세한 서문을 붙였고, 대도(大都)에 도착해서는 원 황제와 황후를 만나는 사절의 행차를 기록했기 때문에 보기 드문 사료(史料)적 가치를 지닌다.
옮긴이 진성규 교수는 1995년 김경수 교수와 함께 ≪제왕운기≫를 첨부해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을 간행한 바 있으며, 이로부터 13년 후인 2008년, 전문을 새로 번역해 ≪동안거사집≫을 출간했다. 이번에 12년 만에 다시 출간하는 ≪동안거사집≫은 진 교수의 수십 년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완결본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출간한 지만지 클래식 ≪동안거사집≫을 바탕으로 그간 발견한 오류들을 바로잡고 번역을 새로이 했으며, ≪동안거사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이승휴의 시 두 수를 부록으로 추가했다.
200자평
≪제왕운기≫ ≪빈왕록≫의 저자로 유명한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의 문집이다. 채 30종이 안 되는 고려 시대 문집 중 하나로 그의 인생과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몽고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 간섭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그의 글에는 고려 후기의 정치 사회적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어 역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특히 북경에 사절로 다녀온 사행록인 <빈왕록>은 원나라 황실의 연회며 사절 접대 의례 등을 알 수 있어 더욱 귀한 자료다.
지은이
이승휴(李承休)의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다.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좌전(左傳)>과 <주역(周易)> 등을 익혔다. 14세에 아버지 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밑에서 양육되었다. 그 후 몽고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천도(遷都)한 강화도로 들어가서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 관계를 맺게 된다. 29세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환도하지 못하고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1263년 나이 40세에 이르러 강도에 들어가 당시 유력자들에게 구관시를 지어 보내고 다음 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벼슬을 시작했다. 1273년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했다. 원나라에서 올린 그의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다. 동행했던 송송례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 충렬왕 6년에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된 후 국사(國事)와 세론(世論)에 일절 함구하고자 했다. 77세를 일기로 고단한 생을 마쳤다. 저서로 ≪제왕운기≫와 ≪동안거사집≫이 남아 있다.
옮긴이
진성규는 경북 예천에서 출생했다. 은풍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3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예천의 대창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년 여 공무원 생활을 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및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문학석·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 중앙연구원) 및 부산여대(현 신라대)를 거쳐 현재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현재 중앙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진각국사 혜심연구≫, 공저로는 ≪신라의 불교사원≫, ≪인물로 본 한국불교사상사≫, ≪한국사상사입문≫ 등이 있다. 역서로는 ≪서하집(西河集)≫,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계와문집(溪窩文集)≫, ≪경기금석문대관(京畿金石文大觀)≫ 등이 있다.
차례
동안거사이공문집서
동안거사 잡저 1부
촌거자계문
보광정기
간장사기
승제 윤보에게 올리는 계
진양목백 상서 이산에게 보내는 편지
진양서기 정소에게 보내는 편지
단모부
공이 보내 준 답서
전 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 광정대부 삼중대광첨의중찬…
불호혜화상에게 보내는 편지
몽산화상이 법어를 내려 준 데 대해 사례해 올림
화상이 보낸 법어
두타산 간장암 중창기
원나라 구양 승지의 제
동안거사 행록 권 제1
강릉 전 사또가 가지고 있는, 명황이 늦게 일어나는 그림
전 사또 갱화시
무릉도 가는 길을 바라보다
전 사또 갱화시
병과시
구관시
경원 이 시중
시령 유 평장
또 읊다
최 판추에게
한 추밀원사에게
유 내상
최 직강
원 소경
허 소경
한림 박항에게 주다
태부 최수황, 사관 김승무·홍저에게 주다
안집사 김 중서가 죽헌에 쓴 제액에 차운하다
11월 3일에 동지·팔관·원정과 폐하께서 황제 처소에…
수다사에서 머물러 짓다
서울에 들어와 다시 행자 운을 쓰다
눈 속에 봉암상국께서 좋은 음식을 내린 것에 사례한다
최 직강이 눈을 읊은 시 30운에 차운하다
전별에 사례하는 시
동안거사 행록 권 제2
관사로 돌아와 다시 앞 시의 운을 써서…
황려북루의 판상시에 차운하다
안집사인 병부 진 시랑을 모시고 진주부 서루에 올라 판상시에…
6월 안집사 진 시랑을 모시고 정선현을 구경 갔는데…
등명사 판상에 차운하다
8월 상순에 대산 절정에 올라, 재미로 한 수 짓다
후죽 붓대를 관한의 제공에게 부쳐 주며
서기 관아의 정원에 잣나무를 심고, 한 수를 쓰다
11월 초하루 동지와 팔관의 두 표문을 받들고…
황·이 두 영공이 주고받은 시에 차운하다
12월 상순에 다스리는 곳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다시 전운을 사용해 동년 국자박사 최수황과…
한림 안유가 보내 준 이별시에 차운해 답하다
병인 정월 큰 눈이 열흘 넘게 왔다. 안집사…
(1266년) 2월 3일에 부에서 출발해…
국박 최수황의 희우시에 차운하다
경원 이 시중이 어가를 모시고 삼랑성을 구경하며…
유 내상의 장미연시에 차운하다
사업 허공이 사물에 부쳐 육예시를 지었는데…
우물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활쏘기
말 몰기
이·유 두 영공이 주고받은 시에 차운하다
유 내상에게 바치는 시
백 중서가 지공거가 된 김 좨주를 축하한 시에…
앞 시의 운을 빌려 써서 기사 박항에게 주다
동안거사 행록 권 제3
단양 홍 승제의 석상가에 차운하다
직강 정과 시랑 박이 승선에 임명되어…
사관 이인정이 임 태사를 애도한 시에 차운하다
상국 김이 중서성의 채 피지 않은 작약꽃을 두고…
김 시어를 애도하다
시어 김승무를 다시 애도하다
박 승제에게 올리다
다시 정 직강의 축하시 운자를 써서 박 승제에게 올리다
다시 전운을 써서 죽당의 세 학사에게 올리다
이 시랑
김 대제
정 직강
우제
김 상국의 퇴조시에 차운하다
퇴조시의 운자를 다시 써서 박 승제에게 올리다
박 승제의 시에 화답하다
상서 김정이 박 승제에게 올린 시에 차운하다
국학박사 이필이 상서 김정의 시에 차운해…
관장 최곡이 방문을 와서 써 준 시에 차운하다
동안거사 행록 권 제4
빈왕록
(1273년) 이달(6월) 11일 패강 도중 바로 읊다
(1273년 6월) 12일 금암으로 가는 길에…
길은 분수령으로 지나기에 한 수 남겨 두다
(1273년) 이달(6월) 29일에 비로소 동경에 …
(1273년) 7월 9일 사로에서 길을 떠나…
(1273년) 이달(7월) 16일 악두참에 도착해…
(1273년) 이달(7월) 29일 신산현에 이르러…
(1273년) 이달(7월) 그믐날 병풍산을 경유해…
(1273년) 8월 4일 연경에 들어가려고…
차운해 봉답하다
(1273년) 중추절 이튿날 정 시랑의 기신재에…
(1273년) 이달(8월) 21일 후저를 모시고…
(1273년) 이달(8월) 24일 황제 폐하께서…
(1273년) 이달(8월) 28일은 바로 황제의 성절이다…
(1973년) 9월 1일 중서성이 강 선사를 시켜…
(1273년) 이달(9월) 7일 중서성이…
(1273년) 그 이튿날(9월 8일) 후저께서…
행차가 소문의 동쪽 교외로 나오니…
즉석에서 차운해 답하다
이달(9월) 25일 압록강까지 돌아와서…
10월 2일 행차가 흥의역에 이르니…
편집 후에 우연히 씀
부록
하운
경진년(1280, 충렬왕 6) 간쟁으로 파직되었는데 중찬 유경이 병중에도 위로하러 옴을 사례함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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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몇 년이나 몰락해 강산에 부쳐졌던가?
다시 서울을 밟으니, 꿈결 같아라.
옛 친구는 모두 천상의 귀한 몸 되었는데,
학철의 곤궁함 누가 구제해 주리?
서로 만나니 얼굴 모양 변했다고들 하고,
말을 하자니 먼저 입이 굳어짐이 부끄럽다.
일찍이 금란지계 맺은 인연 적지 않아,
때때로 회포 풀고 한 번씩 갓을 털기도 한다네.
幾年流落寄江山 更踏京塵似夢間
故舊皆爲天上貴 困窮誰救轍中乾
相逢盡怪形容變 欲語先羞舌脥頑
曾忝金蘭緣不淺 寬懷時復一彈冠
<태부(太傅) 최수황(崔守璜), 사관(史館) 김승무(金承戊)·홍저(洪佇)에게 주다>
예식을 마친 뒤 (…) 모든 시신(侍臣)에게 전해 주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전상(殿上)에 올라가는데, 우리 일행에게는 갈아입지 말라고 명령했다. 정해 준 좌석 위차는 서편 제1항(行) 은 황태자, 한 위차를 건너서는 대왕 여섯, 두 위차를 건너서는 우리 영전(令殿), 그 뒤 열에는 대왕 일곱, 또 두 위차를 건너서는 우리 후저(侯邸), 그 뒤 열에는 안(安)·동 승상(董丞相)을 수석으로 한 10여 명의 관원, 여기서 두 위차를 건너서 우리 열인데, 재신(宰臣)과 재신 다음 제관(諸官)들의 뒤 열 중심에도 우리 열, 상서(尙書)와 시랑(侍郞)의 뒤 열 중심도 우리 열이었다. 참상(參上), 참외(參外)의 뒤 둘째 열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으며, 맨 뒤 열 끝에는 여러 나라의 사절 보좌들이 앉았다. 동편에는 여러 궁주(宮主), 공주(公主) 20여 명이 각기 시녀 두세 명씩을 데리고 띄엄띄엄 앉고, 좌석이 없는 자로서 선사(宣使), 봉어(奉御), 수재(秀才), 영사(令史) 무리는 앞에 벌여 섰는데 전내(殿內)는 하도 넓어서 지면이 남아돌았다. 후 학사의 말이, “이 전정(殿庭)은 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데, 이번 시연(侍宴) 인원이 겨우 7000명이오” 했다. 황태자가 일어서서 헌수를 하는데 당상과 당하에서는 피리와 쇠북을 간간이 연주하고, 증산(繒山)과 수악(繡嶽)에서 기악(伎樂)들이 앞다투어 정재(呈才)를 하니,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장엄하고도 경건했으며, 앞 열에서는 여섯 대왕이 차례대로 헌수했다. 신시(申時) 초에 파했는데, 부로(父老)들의 말이 “병란 이후 이 같은 예수(禮數)는 아직 있지 않았다”고 했다. 아, 나는 지금 얻어 보았도다!
<빈왕록(賓王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