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더불어 이상이 동경하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상은 김기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마키노의 이름을 언급했다.
이것은 참 濟度할 수 없는 悲劇이오! 芥川나 牧野 같은 사람들이 맛보았을 성싶은 最後 한 刹那의 心境은 나 亦 어느 瞬間 電光같이 짧게 그러나 참 똑똑하게 맛보는 것이 이즈음 한두 번이 아니오(1936년).
마키노가 죽은 다음 날인 3월 25일 일본의 일간지들은 10년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쿠타가와의 자살을 회고했다. 예술과 생활의 틈바구니에 끼여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신경증을 앓다가 죽은 창백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마키노의 죽음도 일반화되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 있던 이상은 마키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몇 개월 후 9월에 <날개>를 발표했으며, 10월에는 도쿄로 건너가 다음 해 4월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는다. 위의 편지는 그해 말경 일본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번역한 여섯 편의 단편은 모두 작가 자신과 가족사를 그린 일명 ‘사소설(私小說)’이다. 동시에 죽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젊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담은 애처로운 파노라마이기도 하다. 사실화에서 환상화로, 또 환상적 사실화로 가는 색채 변화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도 마키노만큼 자신의 내면을 충실하게 묘출한 작가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역자는 바로 이 점에 이상의 공감과 동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기는 신변잡기적 작품을 쓰던 시기다. <손톱>을 비롯해 <아비를 파는 자식>(1924), <악의 동의어>(1925)가 해당한다. 마키노 문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논의되는 것은 ‘육친 혐오’의 적나라한 표출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물론이지만 부모나 아내에 대해서도 가차 없다. <아비를 파는 자식>은 아버지에 대해, <악의 동의어>는 특히 어머니에게 칼끝이 향하지만, 그 칼날은 연기용이다. 실은 스스로를 겨누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기는 소위 ‘그리스 마키노’라 불리던 의외로 밝은 환상성의 세계다. 낭만적인 환상소설, 고대 그리스나 중세 유럽의 고전에서 제재를 취한 작풍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엘리베이터와 달빛>(1930)에 보이는 환상성과 명랑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 앞에 놓여 있는 <F마을에서의 봄>(1926)은 마키노가 신문사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해 쓴 작품으로, 전기의 사실성과 환상성이 어우러진 과도기적 작품이다.
만년 마키노는 다시 전기의 사소설적 작풍으로 회귀한다. 대신 전기의 가벼운 신변잡기적 토로는 지양되고, 신경증적 색채가 강해진다. 죽음을 현실적으로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제>(1934)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어머니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200자평
이상이 동경하던 작가 마키노 신이치. 그의 문학은 자연주의의 전통을 이은 ‘사소설’의 방류로 평가되며, 그 미학적 본질은 창백한 자의식에서 반사되는 신경증적 양상과 비애감이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은 모두 작가 자신과 가족사를 담았다. 예술에 대한 열정, 인생에 대한 몽상, 신경증과 우울감, 권태감이 그려진 가운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부모나 아내를 거침없이 폭로하는 위악성이 드러난다.
지은이
마키노 신이치는 1896년 가나가와(神奈川) 현 오다와라 시에서 태어나 39세에 자택에서 자살했다. 191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열세 명의 동인을 모아 ≪13인≫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거기에 첫 작품 <손톱>을 발표했고, 당시 자연주의의 대가였던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후 전기에는 대부분 신변잡기적 사소설풍의 육친 혐오적 작품을 썼다. 그러나 중기에는 작풍이 다소 변화되어, 이른바 환상풍의 경지를 개척하게 된다. 고향 오다와라(小田原)의 풍토에 고대 그리스나 유럽 중세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꿈과 현실을 교착시킨 환상적인 작품들로, 지적인 유머나 풍자성이 그 특징이다. 후기에 해당하는 1931년 무렵부터는 신경쇠약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작품은 다시 전기의 사소설적 경향으로 바뀌며 더욱 어두워졌다. 이런 마키노 문학은 일본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의 전통을 이은 ‘사소설’의 방류로 평가되며, 그 작품은 ‘변형 사소설’로 불린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起夫)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풍토에 발을 디디고 살면서, 이것을 서구적 교양으로 치환해 바라보고, 서구적 환상으로 장식해, 언어 예술만이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같은 이중의 영상을 작품 세계로 해, 그 신비한 지적 감각 체험에 독자를 이끌고 가는 하이칼라의 작가”라고 그의 작품의 본질을 짚었다.
옮긴이
김명주(金明珠)는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와, 일본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學) 국문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고베여자대학(神戶女子大學)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일어교육과에서 일본 문학을 가르치며, 주로 한·일 근대문학 비교 연구를 하고 있다.
차례
손톱
아비를 파는 자식
‘악’의 동의어
F마을에서의 봄
엘리베이터와 달빛
박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생사의 경계가 몽롱해져 나는 마치 몹시도 행복한 꿈에 빠진 자가 자기 볼을 살짝 꼬집어 보듯이, 까마귀 깃털 같은 것을 주워 들고 턱 아래나 겨드랑이 같은 데를 간지럽혀 보았고, 역시 참을 수 없는 간지럼증이 급습해 목숨이 붙어 있음을 인식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간지럼 감각이 남달랐다. 겨드랑이 밑이나 발바닥에 자신의 손끝이 닿는 걸 상상만 해도 금세 온몸이 숨 막힐 듯 배배 꼬이는 습성이 있었다. 어릴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기이한 전율에 사로잡혀 새파랗게 질렸던 것은, 못된 여우가 아이를 낚아채 가면 그 부슬부슬한 꼬리로 온몸을 계속 간지럽혀 죽인다는 이야기였다.
-<박제> 208∼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