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네티>는 ‘늙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장르상 ‘예술가 드라마’이지만 예술가의 말년과 종말을 그린다. 극은 12월 31일 밤, 9시 반경에서 자정 무렵까지 오스탕드의 한 오래된 호텔에서 전개된다.
미네티는 스스로를 ‘고전문학을 거부한 사람’과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라고 일컫는다. 열여덟에 처음 셰익스피어의 리어 역을 맡은 이후 그는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로 성장했고 젊은 시절 독일 전국을 순회공연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소송을 당한다. 고향인 뤼베크 시 시의원들 앞에서 리어를 공연했는데 이 시연회 후에 시의원들이 미네티를 고소한 것이다. 죄목은 “고전문학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미네티는 전 재산을 들여 이 소송에 맞섰지만 결국 “패소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외딴 시골 누이의 집 다락방에서 은둔하게 되었다. 그렇게 30년 동안 그는 무대에 설 수 없었지만 혼자 방에 갇혀 똑같은 리어 대사를 연습했다. 그의 유일한 삶의 희망은 마지막으로 리어를 공연하는 것이다.
평생 지병인 폐 질환에 시달렸던 작가는 사망하기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이를 작품 속에 다양한 변주를 통해 투영했다. 미네티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인물이다. 물질적 빈곤과 고립 상태에서도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최고의 리어 배우인 그는 혼자 연기하며 혼자 저항한다. 1970년 뷔히너상 수상 소감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삶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연극”, “정신의 불안, 죽음의 불안을 그린 연극”이며, “우리는 결국 아무 역할도 해내지 못하고 중요한 대사를 제대로 읊어 보지도 못한 채 연극을 놓쳐 버리고 만다”라고 말했다. 이런 삶을 베른하르트는 실존이라는 말 대신 ‘광대극’으로 표현한다. 미네티는 작가가 그렸던 바보 광대의 한 전형이다.
200자평
<미네티>는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배우 베른하르트 미네티(Bernhard Minetti, 1905∼1998)를 위해 쓴 헌정 작품이다. 미네티가 실제 공연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다. 노년 배우 미네티를 통해 ‘늙은 예술가의 초상’을 그렸다.
지은이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1931∼1989)는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문제 작가이며 세계 무대에서 브레히트와 더불어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다.
1931년에 출생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모국인 오스트리아와 특수한 관계에 있다. 이 관계는 베른하르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시작되어 유년기에 형성된 자아와 이후 작가의 작품에서 뿌리 깊은 콤플렉스로 자리 잡는다. 1931년 미혼모였던 헤르타 베른하르트는 사생아 출산으로 부모에게 불명예를 안기지 않기 위해 고향 오스트리아를 떠나 네덜란드 헤를렌에서 혼자 아기를 낳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기도 했던 헤르타는 돈을 벌기 위해 출산 후에 바로 갓난아기를 탁아소에 맡기고 한 달에 한두 번 잠깐 짬을 얻어 아기를 보러 갔다. 이를 두고 훗날 베른하르트는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 하며 유아기 최초의 상처에 대해 언급했다. 한 살이 채 안 된 어린 베른하르트는 그 후 오스트리아에 사는 외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1970년대에 출간된 그의 자전소설에서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향토문학 작가인 외할아버지와 이야기꾼이었던 할머니에게서 사랑받으며 자란 유년 시절을 그의 삶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때로 기억한다. 어머니 헤르타가 독일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일곱 살 난 베른하르트를 데려다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어린 베른하르트는 어머니의 새로운 가족과 다니던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헤르타는 말썽만 피우는 아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그를 부적응 아동과 청소년을 따로 합숙시켜 훈육하는 교육 시설에 보낸다. 이때 학교에서 받은 가혹한 체벌과 감금, 그리고 나치 소년단인 동급생들의 폭력에 시달린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훗날 베른하르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오스트리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기저를 이룬다.
베른하르트 문학이 오스트리아 사회에 일으킨 돌풍은 오스트리아의 나치 독일 합방 50주년과 빈 부르크테아터의 100주년 기념 공연작인 <영웅광장>(1988)에서 정점을 찍는다. 정치권에서는 그의 작품과 공연에 대해 검열과 금지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여론을 부추겼으며 당시 집권 여당인 자유당 대표였던 하이더는 수도 빈에서 베른하르트를 몰아내고 그의 작품을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89년 사망 이틀 전 직접 공증을 마친 유언장에서 베른하르트는 저작권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자신의 작품이 출판·공연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베른하르트의 이 처사는 나치 시대 때 문인들의 망명에 비견될 수 있는 일종의 “사후(死後) 문학적 망명”(한스 횔러)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옮긴이
류은희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대, 대구대, 배재대에서 독일 문학과 독일어를 강의했고 경북대학교 사범대 독문과에서 Post-doc, 동아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 대전 상생문화연구소 번역실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해체와 소멸≫(독문)이 있고, 역서로 소설 ≪소멸≫(공역), 평전 ≪베른하르트. 죽음을 넘어선 글쓰기≫, 희곡 ≪미네티≫와 ≪서구의 삶 혹은 아폴리네르의 기억≫, 평론서 ≪소설의 곡예사. 토마스 만, 그의 문학과 세계≫, 편역서 ≪토마스 베른하르트≫(토마스 베른하르트 연구회 편) 등이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관한 논문으로는 <‘오스트리아’ 콤플렉스>, <반자서전적 문학>, <죽음의 의식과 연극적 상상력>을 비롯해 여러 편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경
제2경
제3경
에필로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미네티: 인간들은 매일같이
고전문학으로 피신하지
고전문학에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니까
그리고 고전회화로
고전음악으로 피신해
구역질이 나
고전 속에서 인간들은 자기네끼리
아무런 방해 없이 즐길 수 있어
그러나 예술가란
이런 파렴치한 것을 거부해야 해
≪미네티≫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