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봄 물결(Вешние воды)≫(1872)은 투르게네프의 문학 세계와 상상력의 특징인 ‘바다 콤플렉스’가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로 이 소설은 바다, 심연, 수영, 잠수, 익사 등과 같은 물의 모티프를 다수 가지고 있고, 사랑과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바다 콤플렉스’를 보여 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봄 물결≫에서 물의 모티프나 이미지는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즐거운 세월, 행복한 나날이 봄 물결처럼 흘러가 버렸다”는 독일 낭만주의 시인 울란트의 옛 로망스에서 인용한 소설의 제사(題辭)를 통해 표면으로 부상한다. 곧이어 나오는 액자소설의 외부 이야기에서 나이 든 주인공이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탄식하면서, 마음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세월을 지긋이 관조할 때 물의 모티프는 다양한 형식의 은유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물의 모티프와 이미지는 작품의 내부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기능적 의미를 갖고 다채로운 형태로 일관되게 등장한다. 이 점은 특히 ≪봄 물결≫의 내부 이야기의 전반부에 펼쳐지는 사닌과 젬마의 사랑 이야기와 후반부에 전개되는 사닌과 폴로조바의 불륜 이야기가 ‘서사의 물길’을 따라 반전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폭넓게 발견된다.
즉 물의 이미지는 젬마에 대한 사닌의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외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미학적 요소로써 기능한다. 특히 공원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사닌이 젬마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화자는 “만약 그 순간 젬마가 그에게 ‘바다에 뛰어들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면, 그녀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그는 심연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라고 사닌의 사랑을 물의 모티프를 이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봄 물결≫ 내부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 사닌과 폴로조바의 불륜 이야기로 반전되는데, 여기서도 물의 모티프는 중요하다. 내부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소덴으로 간 소풍이 사닌과 젬마가 사랑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후반부에서 비스바덴으로 떠나는 사닌의 여행은 사닌이 폴로조바의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 그녀의 노예로 전락하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두 여행은 모두 물의 고장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여행의 결과는 정반대다.
요컨대 ≪봄 물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물의 모티프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특이한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곳곳에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서사의 물길’을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200자평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투르게네프가 쓴 작품. ‘물’이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사랑과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뤘다.
지은이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1818∼1883)는 러시아 중부 오룔 현의 부유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투르게네프는 당시 러시아 귀족 가정의 전형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모스크바대학 문학부와 페테르부르크대학 철학부,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했다.
독일 유학 시절, 유럽 사상의 영향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온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후진성, 특히 농노제의 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러시아 농촌과 자연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한 ≪사냥꾼의 수기≫(1852)를 발표하고,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당대 러시아 사회의 가장 민감한 문제들을 다뤄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았던 투르게네프는 임종의 자리에서 사상적 위기를 겪고 펜을 꺾었던 톨스토이에게 다시 문학으로 돌아와 달라고 유언하고 1883년 9월 4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라승도는 196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198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에 입학하여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노어과에 진학하여 러시아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군에 입대하여 육군 중위로 임관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군복무와 함께 생도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주 오스틴에 소재한 텍사스 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학과에서 수학했다. 2004년 8월 <문학수력학: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유동적 안티유토피아>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봄 물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제발 클류버 씨를 내 약혼자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나는 그분의 아내가 절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분에게 거절했어요.”
“거절했다고요? 언제 말입니까?”
“어제 했어요.”
“본인에게 말했나요?”
“본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요. 그분이 어제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젬마! 그럼, 당신은 나를 사랑해 주시는 건가요?”
그녀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 왔을까요?” 하고 그녀는 속삭였고 두 손을 힘없이 벤치에 내려놓았다.
그는 얼굴을 들어 대담하게 똑바로 젬마를 보았다. 그녀도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그를 마주보았다. 반쯤 감긴 그녀의 눈은 가벼운 행복의 눈물로 덮여 젖어 있었다.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지 않았다…. 아니, 소리는 없지만 행복한 웃음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젬마!” 하고 사닌은 환성을 질렀다.
“당신이 나를 사랑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이건 나 자신도 예기치 못한 것이에요.” 하고 젬마가 나직이 말했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하고 사닌은 계속 말했다. “그저 몇 시간 머물려고 프랑크푸르트에 왔을 때는 여기서 내 평생의 행복을 얻게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평생이요? 정말로요?” 하고 젬마가 물었다.
“평생토록, 영원토록 말이에요!” 하고 사닌은 감격스럽게 소리쳤다.
만약 그 순간 젬마가 그에게 ‘바다에 뛰어들 수 있어요?’ 하고 말했다면, 그녀가 마지막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벌써 심연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공원을 나와 시내의 거리가 아니라 교외의 좁은 길을 따라서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