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파스테르나크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작품
1913년 그의 최초의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 1916년 12월 두 번째 시집 ≪장벽을 넘어서≫가 출간되었다. 연상적 이미지와 때로는 해독되지 않는 은유로 가득 찬 첫 시집에 대해, 몇몇 젊은이 그룹 사이에서는 환호를 받으며 인정받았지만, 미래주의 경향의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그의 새로운 시학은 거부되고 이해받지 못했다. 사실상 파스테르나크가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인정받고 유명해지는 것은 세 번째 시집 ≪삶은 나의 누이≫를 통해서다.
1917년 여름에 창작된 이 시집의 출판은 1922년에야 가능했다. ≪삶은 나의 누이≫는 파스테르나크를 독자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가장 중요한 시집으로 손꼽힌다. 시들은 창작 동시에 1917년부터 개별적으로 발표됐으나, 시집으로 발행된 것은 1922년 모스크바와 이듬해 베를린에서였다.
시집은 파스테르나크의 초기 창작의 특징인, 이미지와 은유 측면에서의 난해성을 보인다. 비논리적인 연상을 비롯해 신조어와 방언의 사용, 나아가 비문법적인 언어 구사 등은 이러한 난해성을 강화한다. 러시아에서도 현재까지 시집의 난해성과 관련한, 각 시에 대한 활발한 ‘포럼’이 웹상으로도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난해성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집을 파스테르나크의 ‘논리’(비논리가 논리가 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집이 레르몬토프에게 헌정됐다는 점, 즉 시집에는 그와 그의 창작 세계의 열정적 파토스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성에서 여느 서정 시집과는 다른 점을 보인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 작품은 소설적 요소와 서정시적 요소가 공존하는, 두 장르의 혼합 형태를 띠고 있다.
서정시이면서도 소설 같은 시
총 50편 시 가운데 49편의 시가 10개의 연작시 그룹에 속해 있는 이 책의 구성은 소설적·서정시적 요소가 혼합된 형태를 띠는 점에서 보통 서정 시집과는 다르다. 1917년 여름에 시 대부분이 쓰였고(부제가“1917년 여름”) 그때 옐레나 비노그라트와 보낸 날이 스토리 라인을 형성한다. 즉 이 연작시의 기저에 비노그라트와의 만남·이별의 사건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집을 한 편의 소설 형태로 만드는 사랑에 대한 플롯은 1922년 최초 판본의 연작시 구성에도 나타나 있다. 소설적 측면에서 본다면 첫 연작시 <새들이 노래할 때가 아닌지>는 그녀를 만나기 전 도입의 역할을, <초원의 서>와 이후 연작시들은 본론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연작시에 포함되지 않은 첫 번째 시 <악마를 기억하며>는 작품 전체의 제사(題詞)가 되는 것이다.
한편 시집은 독자적인 여러 서정시가 모여 이루어진 형태를 띠기도 한다. 대부분의 연작시가 여러 주제와 모티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소설적인 이야기체로 이어진 시들 간의 논리적·내용적인 연관성은 그리 긴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실상 이 같은 시집의 소설 및 서정시적 요소 모두를 심층적으로 단일하게 결합시켜 주는 것은 각 시마다 반복되어 드러나는‘자연’을 중심으로 한 모티프 및 이미지라 할 수 있다.
200자평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시집이다. 파스테르나크를 독자적인 시인으로 인정받도록 한 중요한 작품이다. 수록된 총 50개 시 가운데 49개의 시가 10개의 연작시에 해당하며, ‘자연’을 중심으로 한 모티프로 플롯을 구성한다. 작품들은 은유, 환유 등의 비유법의 사용이 두드러지며 작가 특유의 이미지화, 연상화 기법 등으로 인해 난해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만의 독특한 시 창작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음미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특별한 맛을 충분히 느껴 볼 수 있다.
지은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2월 10일(구력으로 1월 29일, 19세기 시인 푸시킨의 사망일) 모스크바에서, 톨스토이의 ≪부활≫ 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와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로잘리야 카우프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예술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회화를 접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음악과 철학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은 음악과 철학 공부를 중단하고 1912년부터 문학에 전념한다. 대학 시절 여러 문학 동아리 ‘상징주의’, ‘미래주의’에 참여했던 그는 191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창작 전기의 주요 특징은 1930년대 초 이전에 이미 파스테르나크의 고유한 창작적 경향이 확립됐다는 데 있다. ≪삶은 나의 누이≫에서 그의 “자연 철학”이 결정적으로 형성됐다면, 세 서사시 <1905년>, <시미트 중위>, <스펙토르스키>에서는 “역사 철학” 역시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삶과 미학적 신조’의 제시와 함께 ≪삶은 나의 누이≫에서 형성된 근본적인 창작 경향은 다소 변형되고 진화됐을 뿐 이후의 창작 전체를 관통한다. 위 세 서사시 또한 이 시집의 시학이 역사 테마 차원에서 전개된 예다. 창작 후기는 1932년에 시집 ≪제2의 탄생≫을 발행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시집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창작 전기의 난해성을 버리고 의미의 명료성을 추구했다. 1933년에는 작가동맹 대표단과 우랄 지방을 여행한다. 가혹한 비평적 공격을 받게 되는 1930년대 후반기에 그는 창작 활동을 중단한다. 1935∼1941년 번역에 몰두해 셰익스피어의 희곡, 그루지야 시인들, 바이런 및 기타 유럽 시인들의 시를 번역한다. 세계대전 발발로 치스토폴에 피난했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1943년에 시집 ≪새벽 열차를 타고≫를 발행한다. 1945년에는 ≪닥터 지바고≫의 집필을 시작한다. 1946년에는 1955년까지 이어지는 소비에트문학의 즈다노비즘 시기가 시작되어 같은 해 작가동맹 제1서기 파데예프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1948년부터는 창작의 발표 기회가 막혀 번역으로 생활을 연명하게 되고 그 이후 셰익스피어와 괴테의 작품을 번역·출판한다. 1954년에는 잡지 ≪즈나먀≫에 <닥터 지바고에 실릴 시> 10편이 수록된다. 1955년에 ≪닥터 지바고≫ 집필을 완료한다. ≪닥터 지바고≫는 1956년에는 잡지 ≪노비미르≫를 비롯해 국내에서 출판이 거부되고, 1957년에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어로 출판된다. 1958년에는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판되고 같은 해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정된다. 1959년에는 파스테르나크의 마지막 시집이자, <유리 지바고의 시>와 시기적으로도 특성에서도 밀접하게 관련된 시집 ≪날이 맑아질 때≫가 파리에서 출간되고, 이어 1960년에 그는 페레델키노에서 사망한다. 1988년에는 잡지 ≪노비미르≫에 ≪닥터 지바고≫가 게재되고 파스테르나크의 복권이 이루어진다.
옮긴이
임혜영은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동 대학원 노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 작가의 일반 철학적 관념에 비추어 본 시와 산문>이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최근의 <파스테르나크의 “삶은 나의 누이” 에 나타난 레르몬토프 전통>, <러시아 문학과 여성신화: 파스테르나크의 “페테르부르크”, “변주 있는 한 테마”, ‘파우스트 연작시’를 중심으로>, <파스테르나크와 신비주의: “닥터 지바고”에 나타난 신비체험을 중심으로> 이외 다수가 있다. 역서로는 ≪시간과 공간의 기호학≫(공역)과 ≪삶은 나의 누이≫가 있다. 파스테르나크를 비롯해 러시아 모더니즘에 관한 연구 논문 발표를 지속하고 있다.
차례
1. 악마를 기억하며
새들이 노래할 때가 아닌지
2. 이 시들에 관해
3. 그리움
4. “삶은 나의 누이고 오늘 넘쳐흘러…”
5. 우는 정원
6. 거울
7. 소녀
8. “나뭇가지를 시험해 보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그대는…”
9. 비
초원의 서
10.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네
11. 미신 때문에
12. 만지지 마시오
13. “그대는 이 역할을 그리도 능숙하게 했소!…”
14. 발라쇼프
15. 사랑의 모방자들
16. 사랑의 한 본보기
사랑하는 여인의 여가
17. “향기로운 나뭇가지를 흔들고…”
18. 노 젓기를 멈추고서
19. 봄비
20. 경찰들의 호루라기
21. 여름 별들
22. 한 영국 작가의 교훈들
철학에 몰두
23. 시란
24. 영혼이란
25. 땅의 질병들
26. 창작이란
27. 우리의 뇌우
28. 여대리인
그녀가 지루하지 않도록 편지로 쓴 노래
29. 참새 언덕
30. 사랑하는 이여, 그대에게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이오?
31. 라스파트
로마놉카
32. 초원
33. 무더운 밤
34. 훨씬 더 무더운 새벽
내 영혼을 분리하려는 시도
35. 무치카프
36. 무치카프 찻집의 파리들
37. “손님맞이는 난폭했고, 도착도 무모한 것이었네…”
38. “내 영혼을 분리하려는 시도…”
귀로
39. “삶은 얼마나 졸리게 하나!…”
40. 집에 와서
옐레나에게
41. 옐레나에게
42. 그들의 경우처럼
43. 여름
44. 영원할 순식간의 뇌우
후기
45. “사랑하는 이여, 난 무섭소! 시인은 사랑할 때…”
46. “단어들을 떨어뜨리자…”
47. 있었네
48. “사랑한다는 건 천둥소리 가운데 산책하는 것…”
49. 후기
50. 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삶은 나의 누이고 오늘 넘쳐흘러
봄비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네.
그러나 장신구 단 사람들은 거드름 피우며 투덜대고
귀리 속의 뱀들처럼 체면 차리며 비꼰다네.
나이 든 이들에겐 이에 대한 그들만의 변명이 있다네.
뇌우 때에는 두 눈과 잔디가 연보라색처럼 보이고
지평선이 축축한 목서 냄새를 풍기기에 즐겁다는
내 자아여, 그대의 변명은 말할 것도 없이, 말할 것도 없이 우습다오.
2.
단어들을 떨어뜨리자,
정원이 호박과 레몬 껍질을 떨어뜨리듯.
분산시켜 그리고 아낌없이,
힘껏 애써, 애써, 애써서
풀이할 필요가 없다네,
왜 나뭇잎은
그리도 장엄하게
꼭두서니와 레몬의 빛을 튀기는지.
3.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네. 그러나 검은 뇌우의
자루에 둘러싸인 풀들은 아직 휘어지지 않았네.
먼지만이 비를 삼켜 환약이 됐네.
부드러운 가루에 묻힌 철처럼.
건조한 마을은 빗방울의 치유를 채 기다리지 못했네.
양귀비는 혼미해질 정도로 무성했네.
호밀은 염증으로 열이 났고
단독(丹毒)에 걸려 잔털도 났네. 신은 열로 인해 헛소릴 했네.
-<무더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