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강물의 흔적을 좇아 지도를 그리듯 내면에 주름 잡힌 시간으로 시를 써내려 간 황규관 시인의 육필시집.
표제시 <삼례 배차장>을 비롯한 44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황규관
1968/ 전주 출생
1993/ <지리산에서> 외 9편으로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
1998/≪철산동 우체국≫(내일을여는책) 출간
2000/ ≪물은 제 길을 간다≫(갈무리) 출간
2007/ ≪패배는 나의 힘≫(창비) 출간
2011/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실천문학사) 출간
차례
자서
지리산에서
내 조국이 식민지일 때
해방 연서 1
어두운 골목
집 앞에서
태풍
해바라기를 보고
가을 소나기
동네 한 바퀴
유토피아
과거로 지은 집
간통 이후
새해 아침에
철산동 우체국
봉천동
푸른 작업복을 입으며
빈 들에서
귀거래를 생각하며
씨를 뿌리고
서리꽃 찰나
눈 쌓인 벌판
불 소리
저녁 산사에서 길을 생각하다
병산서원 배롱나무
냉장고만 돈다
폭포
삼례 배차장
선데이 서울
일몰을 보다
허락받지 못한 데서
변절
견디기 힘든 근질거림
죄 안에 길이 있다
용접 불꽃을 보며
열 돌을 맞은 인천노동자문학회 벗들에게
가을 산
쇳소리
장외 투쟁
비창(悲愴)
예감
자본을 읽자
경계
인간의 길
냇물
황규관은
책속으로
삼례 배차장
나는 그곳이 두려웠다
퇴학당한 형들의 불량스런 표정이
공중변소 회벽에 칼자국으로 새겨졌다고도 하고
간밤에 여고생 한 명이 공중변소 뒤안에서
돌림빵당했다고도 했다
아침저녁 등하굣길
내 눈길은 항상 버스가 들고 나는 배차장을
두근두근 바라보곤 했다
내가 가 보지 못한 봉동 금마 같은 곳에서
버스가 지친 몸을 부리러 오기도 하고
박카스 한 병 마시고 기운 차려 떠나는 배차장이
전북여객 붉은색 줄무늬 같은 불을
내 심장에 댕기곤 했다
두려움은 그리움의 그림자인가
중학교 삼 년 기르고 싶은 머리처럼
나에게 드리워진 검은빛 삼례배차장
한때 가 보지 못한 세상의 입구였으나
결국 세상의 전부였던 삼례배차장
나는 그곳에서 여기까지 왔으나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했다
자서(自序)
지나간 것들을 다시 불러 보는 일은
떠난 당신의 뒷모습만 가슴에
담아 두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렇게 무모한 길을
한동안 가야 할 것 같다.
여기에 모인 시들이
바람이 되어 지평선을 넘어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