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이 책의 전래
≪삼봉집≫은 몇 차례 간행되었다. 최초의 간행은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인 1397년에 이루어졌는데, 아들 정진이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원고만을 모아 성석린·권근의 도움을 받아 두 권의 ≪삼봉집≫으로 간행했다. 권근이 서문을 썼다. 하지만 이 문집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증손자 정문형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기존의 ≪삼봉집≫에다 <경제문감>·<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을 더하여 1464년 안동부에서 목판본으로 중간했다. 중간본의 서문은 신숙주가 썼다. 이어 1467년 정문형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경제문감별집> 등을 추가했으며, 1791년 국왕의 명령에 의해 규장각에서 다시 편집하고 교정을 보아 대구에서 간행했다. 모두 14권 7책이다.
이 책의 구성
권1과 2는 부(賦), 오언 및 칠언고시(七言古詩), 육언 및 칠언절구(七言絶句), 율시(律詩), 사(詞), 악장(樂章) 등 지금의 형식으로 보아 시(詩)에 해당되는 글들을 모아놓았다. 권3은 소(疏), 전(箋), 서(書), 계(啓), 서(序), 권4는 기(記), 설(說), 제발(題跋), 전(傳), 행장(行狀), 묘표(墓表), 제문(祭文), 책제(策題), 명(銘), 찬(贊)으로, 문장 형식의 글들이다. 권5와 6은 <경제문감>, 권7과 8은 <조선경국전>, 권9는 <불씨잡변>, 권10은 <심기리편(心氣理篇)>, 권11과 12는 <경제문감별집>, 권13은 진법(陣法)과 습유(拾遺)이며 권14는 부록이다. 이 책에서는 11권과 12권의 <경제문감별집> 상·하에 수록된 글은 모두 빠졌다.
이 책의 내용
악장과 같이 조선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글도 있으나, 당시 사회의 실상과 그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는 글이 많다. 특히 정도전이 유배에 처해졌던 불우한 시기에 지어진 시문들은 고려 말의 사회 상황과 이에 따라 파생된 당시 사회문제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정도전의 사회의식도 녹아들어 있다. 이러한 점은 당대의 어떤 학자나 관료들도 따라올 수 없었던 점이며, 정도전이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상하게 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200자평
이 책은 정도전이 평생에 걸쳐 쓴 글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부, 오언 및 칠언 고시, 율시, 악장, 소, 서, 기, 제문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글들을 맛볼 수 있다. 정도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라는 격변의 시기를 살았고, 그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이다. 정도전 개인이나 그가 살았던 한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데 누가 가장 많이 기여했는가를 이야기한다면 여러 사람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가체제의 기틀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 한 명만을 꼽으라면 정도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은 몽골의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던 134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대대로 경상도 봉화의 향리 집안이었다. 당시 봉화는 안동부의 속현이었고, 따라서 가세는 매우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우씨는 혈통에 하자가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 점은 죽어서까지 정도전을 괴롭히는 약점이 되었다. 정도전의 호 삼봉은 어머니의 고향인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도전은 아버지가 이곡과 친했기 때문에, 15세에 이곡의 아들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다.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이제현으로부터 이곡, 이색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 당시 최고 수준의 성리학 학통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1360년 성균시에 합격했고, 1362년 문과에 진사로 급제해, 다음 해 충주사록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푸 돌아가자, 영주로 내려가 삼년상을 지냈다. 1370년 성균관이 다시 만들어지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에 기용되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이인임 등은 친원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정도전은 앞장서서 반대했고, 결국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농민의 생활상과 지방의 열악한 실정을 직접 체험하고 많은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영주로 갔다가 지금의 서울 삼각산 밑에 초가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곳 출신 재상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집을 허물어버렸다. 다시 부평으로 갔으나 그곳의 집마저 다른 재상이 허물어버렸다. 1383년 정도전은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면서 떠오르는 장군이었으나, 고려 중앙정부와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선택해 찾아간 것은 고려라는 나라를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정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년 뒤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정도전은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준·윤소종 등과 함께 토지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당시에 이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였으며,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창왕이 옹립되었다가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곧 폐위되고 공양왕이 옹립되었다. 정도전은 공양왕 옹립에 대한 공으로 봉화현충의군 봉해지고 공신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토지제도의 개혁은 결국 고려의 사회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넘어, 새로운 왕조를 건립할 것인가 아니면 고려 국가를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이를 둘러싼 대립 세력 간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며, 1391년 정도전은 탄핵당해 유배되었다.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출신 문제 등으로 다시 탄핵당해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잡게 되고 정도전도 풀려났다.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은 개국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문하시랑찬성사 등의 요직을 맡았다. 조준·남은 등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동시에 저술을 통해 조선왕조의 국정 이념과 국가체제의 틀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국가의 모습으로 조선왕조를 개혁하려 했다. 1396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의해 이러한 사태를 불러일으킨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그는 병을 이유로 현직에서 물러났고, 요동 정벌 계획을 더욱 구체화하고 이를 태조에게 건의했다. 다음 해 정도전은 정계에 복귀하여 동북면 일대의 성곽을 순찰하고 지방 제도를 정비했다. 하지만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의 와중에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당했다.
옮긴이
박진훈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학위논문은 <여말 선초 노비정책 연구>다. 연세대, 국민대, 한국외대, 가톨릭대, 대림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국민대 한국학연구소의 전임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명지대 사학과에 재직 중이다. 한국 중세 사회경제사를 비롯하여, 생활사, 법제사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차례
해설 ·······················7
지은이에 대해 ··················10
권1 ·······················15
권2 ·······················35
권3 ·······················49
권4 ·······················61
권5 ·······················93
권6 ······················105
권7 ······················117
권8 ······················175
권9 ······················207
권10 ······················221
권13 ······················225
옮긴이에 대해 ··················235
책속으로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然所謂得其心者 非以私意苟且而爲之也 非以違道干譽而致之也 亦曰仁而已矣
땅에 사는 백성들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써 위협할 수 없으며,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떠나갑니다. 떠나가거나 쫓아오는 간격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서 구차하게 얻는다는 것이 아니며, 도리를 어기고 명예를 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시 “오직 어짊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