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호기심 때문에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연암 박지원처럼, 미중 역시 코끝 가려움증이 원인이 되어 잠을 설치다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게 된다. 시야를 가리는 모래 폭풍으로 줄을 잡아야만 길을 다닐 수 있는 ‘열하’ 마을 장로들은 짐승이면서 짐승의 경계를 넘어선 미중의 말하기를 금지한다. 그러나 기이한 것을 채집하러 다니는 제국의 어사가 등장하자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다시 미중에게 말할 것을 요구한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미중이 들려주는 너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 감화되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저마다 이해관계 때문에 끝내 떠나지 못한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이후 다시 부상한 알레고리 계열의 희곡이다. 인문학적 깊이와 사유를 갖춘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2007년 손진책 연출, 극단 미추 제작으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초연했다. 2007년 대산문학상 희곡상, 동아연극상 대상과 희곡상을 수상했다.
200자평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그의 저서, 특히 <열하일기>에서 소재를 취한 우화적 작품이다. 모래 폭풍이 부는 ‘열하’라는 마을에서 말[言]을 하는 네발 달린 동물 미중(연암)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풍자했다.
지은이
배삼식은 19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극작을 전공했다. 1999년 서울공연예술제 초청작인 <11월>에 참가하며 희곡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 김상열연극상, 2009년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주공행장>, <거트루드>, <하얀 앵두>, <3월의 눈>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열하일기 만보(熱河日記 漫步)>는
배삼식은
책속으로
연암: 그렇다.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이 마을에도 모래바람 철에는 길 잃은 사람들이 찾아들곤 하였다. 그들 중에는 가끔 그 짐승에 대한 소문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이 밥 한 끼 잘 얻어먹자는 희떠운 수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들창 너머로 먼지 자욱한 벌판을 바라보면서 그 귀가 희고 얼굴이 불그레하던, 술 잘 먹고 괴상한 얘기 잘하던 짐승을 떠올리곤 까닭 없이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공연히 쓴웃음을 지어 보기도 하였던 것이나, 이내 고개를 흔들고, 쉴 새 없이 집 안으로 몰려드는 모래를 퍼내러 달려가곤 하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