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서민의 삶과 애환 속에서 이웃을, 가족을, 사랑을 찾아내는 박철 시인의 육필시집.
표제시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를 비롯한 39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박철
1960/ 서울 출생
1987/ ≪창작과비평≫ 등단
2006/ 단국문학상 수상
2009/ 제11회 천상병 시상 수상
2010/ 제12회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김포행 막차≫(창작과비평사, 1989)
시집 ≪밤거리의 갑과 을≫(실천문학사, 1992)
시집 ≪새의 전부≫(문학동네, 1994)
시집 ≪너무 멀리 걸어왔다≫(푸른숲, 1996)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문학동네, 2001)
시집 ≪험준한 사랑≫(창비, 2005)
시집 ≪사랑을 쓰다≫(열음사, 2007)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시집 ≪작은 산≫(실천문학사, 2013)
소설집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실천문학사, 2006)
차례
시인의 말
사랑
개화산에서
버리긴 아깝고
달
별
나이
보푸라기꽃
반올림
기러기
참외 향기
골목길
행주강
불을 지펴야겠다
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인연
노을
굴욕에 대해 묻다
향수
한 식구에 관한 추억
노새
험준한 사랑
샛길
책방에서
김포
이별
신행(新行)
벽오동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해도
반듯하다
사랑
깃발
보석
벽오동 2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격정의 세월
연
그해 겨울
고모
슬프므로 슬프지 않다
박철은
책속으로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선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시인의 말
건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 남아 있다
하늘도 잠시 쉬는 시간,
외눈처럼 박힌 저 불멸이
헛된 기다림이 아니라
충만한 노동의 끄트머리였으면
좋겠다
예서 제로 마음의 빨랫줄 늘이니
누구든 날아와 쉬었다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