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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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집≫은 경종 3년(1723)에 교서관(校書館) 철활자(鐵活字)로 인행되어 34권 17책으로 출간된 것이 유일한 간행본이다. 최규서(崔奎瑞)는 그의 <약천집 서(藥泉集序)>에서 저자의 글을 경세의 문장이라고 평하면서 당(唐)나라 육지(陸贄)의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에 견주어 비교했다. 정조는 약천의 상소문을 “명백하고 간절해 관각(館閣)의 나침반이자 나루를 건너는 뗏목으로 삼아야 한다”고 극찬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해미에 있는 약천의 사당기에서 “당쟁이 격렬해진 뒤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대부분 편파적이었으나, 유독 약천 남 공은 시종 공정함을 잃지 않았고, 의논이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지조가 확고했으니, 세상에 드문 위인이었다”고 평했다.
이 책에서는 약천집 권3, 권4, 권5, 권6에 실려 있는 소차 12편을 뽑았는바,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청한 내용(2편), 인재의 공평한 등용을 아뢴 내용(2편), 흉년을 만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위해 대여곡을 탕감하고 제도를 바꿀 것을 청한 내용(2편), 형벌의 적정한 집행을 강조한 내용(4편), 그리고 맨 끝에 국경 문제를 다룬 내용(2편)을 뽑았다. 약천은 무리한 형 집행을 반대하면서도 살인자에게는 반드시 상명(償命)을 해야 함을 강조했다. 상명이란 목숨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뜻으로 살인자에게는 사형을 집행해야 함을 이른다. 지금 사형제 폐지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번 참고할 만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경 문제는 독도의 영유권 문제로 더욱 관심을 끄는 내용이다. 여기에 뽑은 소차는 일부 내용을 삭제하고 발췌했음을 밝히며, 자세한 내용은 ≪약천집≫ 6책이 이미 국역 간행되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약천은 붕당 정치의 전성기였던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에 걸친 삼조(三朝)의 대신으로 정치, 경제, 군사, 의례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經世家)이자 문장가다. 약천의 국방 사상과 역사관, 정치사상 및 붕당에 대한 견해 등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연구되고 있고,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조명을 받고 있다. 약천의 글을 통해 공평한 법 집행과 국토 수호, 난민 구제, 통치자의 자세 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정조에게 관각의 나침반이자 나루를 건너는 뗏목이라고 극찬받은 약천 남구만의 소차(疏箚, 상소문)를 소개한다. 이 책에서는 34권 17책에 달하는 ≪약천집≫ 중 약 5%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소차 12편을 가려 뽑았다. 약천은 이 글들을 통해 간언(諫言)부터 국경 문제까지 다양한 정치적 현안에 대한 그의 신념을 밝힌다. 현재도 뜨거운 감자인 독도 영유권과 사형제 존폐 여부에 대해 약천에게 조언을 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은이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호는 약천(藥泉) · 미재(美齋),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약천은 붕당정치의 전성기였던 효종, 현종, 숙종에 걸친 삼조의 대신으로 정치, 경제, 군사, 의례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이자 문장가다.
약천은 인조 7년(1629)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약천은 어려서는 외증조모인 이씨 부인(李氏夫人)에게 글을 배우다가 부친에게 가학을 전수받고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우기도 했다. 약천은 18세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온 후 내외종으로 근친이었던 김익희(金益熙)에게 의탁했는데, 김익희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 효종(孝宗)과 송시열(宋時烈)의 총애를 받아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1651년 7월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 때(1656)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해 가주서로 선발된 뒤 특지(特旨)로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이후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했다. 다음 해 사서, 정언, 문학 등에 제수되어 경연에 참가했다가 당시 유림의 종장(宗長)이었던 송준길(宋浚吉)의 인정을 받고 문인(門人)이 되었다.
30세에 춘당대(春塘臺)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고 병조 정랑, 비변사 낭청이 되었으며, 임금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상(喪)에 친림(親臨)하는 것을 간언해 막았다. 31세에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부수찬, 부교리가 되었으며, 7월 빈전(殯殿)에 서계(書啓)를 올렸다. 이해 12월 이조 정랑이 되었고, 이후 34세까지 헌납, 경상도 진휼어사, 교리, 응교, 집의 등을 역임했다. 36세에 동부승지, 예조 참의, 대사성, 대사간이 되었으며, 37세에 부친상을 당해 39세에 복을 마친 뒤 형조 참의, 공조 참의, 병조 참의에 제수되며, 40세에 전라 감사, 우승지가 되었다.
41세에 대사성으로서 학제(學制) 개편 등을 시도했으나 곧 체직되었다. 이에 광진(廣津) 아차산(峨嵯山) 근처 약수암(藥水巖)에 거처하며 ‘약천(藥泉)’이라 자호했다. 42세에 잠시 고향인 결성(結城)으로 내려갔다가 청주 목사가 되어 기민 구제 등에 힘썼는데, 후에 그 치적을 기려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했는데, 특히 이 시기는 저자의 국방 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로 이즈음의 저술을 주목할 만하다. 여연(閭延), 자성(慈城), 우예(虞芮), 무창(茂昌) 등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설치하고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의 도로를 개통해 서북 지방의 실질적인 방어책을 세우고 국경을 확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주체적인 구토 회복(舊土回復) 의식과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46세에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 참판으로 동지경연, 비변사 진휼청 당상을 겸하고 이어서 형조 참판,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3차 예송(禮訟)의 발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결성으로 돌아온 뒤 고신(告身)을 빼앗기는 등 이후 몇 년간 시련을 겪었다. 50세(1678) 10월 형조 판서, 한성부 좌윤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다음 해 2월 남인의 영수인 윤휴(尹鑴)와 허견(許堅)을 탄핵하다가 거제(巨濟)로 유배되고 말았다. 52세 때(1680)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같은 해 모친상을 당해 복을 마치고 54세가 되던 해에 동지중추부사, 대사간, 병조 판서가 되고,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즈음 서인들 사이에서는 훈척(勳戚)의 부정과 비리를 두고 젊은 사류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약천은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金煥)의 처벌 등에서 박세채(朴世采),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해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했는데, 특히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김환을 처벌하는 것만이 정국 수습의 방안이라고 주장해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김익희 등의 노론과 대립했다. 또한 윤증(尹拯)의 유현(儒賢) 대우 및 복상(卜相)과 관련해서 김수항(金壽恒)과 대립하면서 46차례나 정사(呈辭)하는 등 갈등을 빚었으나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59세(1687) 7월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1688년,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약천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 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또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생질이자 문인(門人)인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았다. 62세(1690)에 방환되어 몇 년간 문생(門生)들과 유람과 강학으로 소일하는데, 당시 약천의 문인으로는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이상명(李尙命), 최석항(崔錫恒), 정제두(鄭齊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후일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해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 왕후가 복위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약천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약천은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張希載)의 주벌을 반대한 일로 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부역(賦役)의 균등을 꾀하고, 과거의 개혁책을 구상하고, 서북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성경(盛京)의 지도를 올리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의 제시와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70세(1698)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치사를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장희재의 일로 다시 탄핵을 받아 74세(1702)에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방환되고, 79세(1707)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숙종 37년(1711) 약천이 83세의 나이로 졸하자 숙종은 애통의 교서를 내리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명했다. 소론 정권이 득세한 경종 2년(1722)에 약천은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고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다음 해인 1723년에 손자 남처관(南處寬)이 문집을 간행했다.
옮긴이
성백효(成百曉)는 시골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연수원 연수부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했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부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 편찬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책임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로 있으면서 동양 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사서삼경과 ≪퇴계집≫, ≪율곡집≫, ≪다산집≫, ≪왕조실록≫, ≪여헌집≫, ≪우계집≫, ≪약천집≫ 등 100여 종의 역서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간재의 성리설 소고>, <연암의 학문 사상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청함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청한 소
경연을 열고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일 것을 논한 차자
인재의 공평한 등용을 아룀
인재 등용을 아뢴 소
인재 물색의 명령에 따라 소회를 아뢴 소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대여곡을 탕감하고 제도를 바꿀 것을 청함
대여곡(貸與穀)을 탕감할 것을 청한 소
청주에 있으면서 폐단에 대해 아뢴 소
형벌의 적정한 집행을 강조함
내수사(內需司)의 일을 논한 소
세미선(稅米船)을 파손한 죄인을 곧바로 형벌해서는 안 됨을 논한 소
살인한 자에게 상명(償命)하는 일을 논한 차자
우의정을 사직하면서 세 가지 옥사(獄事)를 아뢴 차자
국경 문제를 아룀
북쪽 변경의 세 가지 일을 아뢰고 이어 지도(地圖)를 올린 소
북로(北路)의 사정을 아뢴 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후세에 인물을 등용하는 병폐는 문벌을 소중히 여기고 화려한 문장을 우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오직 서울과 삼남(三南) 지방의 사람들뿐이요, 양서(兩西)와 동북(東北) 지방은 한 사람도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인재가 제대로 등용되지 못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