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이광웅 시인의 시를 되새기는 이 순간, 마음이 무겁다. ‘투사’로서의 삶에 가려진 그의 ‘시’의 ‘속살’을 이제야 눈여겨보게 되었다는 때늦은 후회와 더불어, ‘목숨을 걸고’ ‘진짜’로 살아가려 한 ‘시인’의 순정한 마음이 ‘지금 여기’의 경박한 현실을 되짚어 보게 하기 때문이다.
먼저, ‘산 같은 침묵을 깨뜨리고’(<햇빛의 말씀>) ‘슬픔의 바다’에 뛰노는 ‘빛(새)’의 언어(<사회 참관>)를 길어 올린 이광웅 시의 저수지를 엿보기로 하자. <대밭>은 이광웅 시의 원형질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경쾌하고 감칠맛 나는 언어의 질감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서 꿈틀거린다. ‘대밭’의 언어는 민족사의 아픔을 승화하는 서정의 결을 풍성하게 보여 주고 있다. 시인은 민족적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구체적 언어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 내고 있다.
어느 순간 시인의 시에서 ‘대밭’의 언어가 사라졌다. 시인은 ‘대밭’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아니, 버렸다. ‘대밭을 떠내밀며 잠을 설’치던 풍요로운 유년의 풍경이 ‘지저분한/ 간음의 꿈’을 견디는 앙상한 중년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다. 그사이 이른바 ‘오송회 사건’이 가로놓여 있다. 치욕스런 역사의 해프닝(아이러니)이 한 시인의 삶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1982년 월북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전·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20여 일의 모진 고문 끝에 ‘교사 간첩단’으로 둔갑되었다. 주동 인물로 지목된 이광웅 시인은 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7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다. 시인은 억울한 감옥 생활을 통해 삶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후 1988년 복직되었으나 이듬해 전교조에 가입하면서 다시 교단에서 밀려난다. 그는 고문과 투옥 후유증으로 1992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시인은 20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예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렇듯 진실은 늘 한 발자국 더디게 온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간음의 꿈’마저 쓰다듬으며 다시 일어선다. 시인은 ‘무겁고 고단한 잠’ 벗어 버릴 ‘쉼터를 구하지 못하’고 ‘낯선 광야, 낯선 밤’ ‘아무 데나’ 쓰러진다. 이 ‘이슬 젖은’ ‘잠자리’에서 시인은 ‘항행하는 유령의 배와/ 피 냄새 나는’ 우리의 ‘역사’를 대면한다. 이 ‘빈터’에는 ‘그리운’ 유년의 ‘물결’이 ‘너울’거리기도 하고, 고통스런 ‘어제의 편력’이 출렁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 과거의 기억에 안주하거나 몰입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 그 자체는 ‘밤 가운데’ 사라지는 ‘별똥별’일 뿐이다. ‘살찐 송아지’의 ‘닳아지는 목숨’을 통해 ‘회생의 기름방울’을 채워 주신 선조들처럼, 시인은 자신의 삶(언어, 기억)을 통해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정화하고자 한다.
200자평
1982년, 해맑은 제자들을 사랑하고, 소박한 이웃을 아끼던 시인 이광웅이 투옥된다. 월북 시인 오장환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교사 9명이 고문 끝에 간첩단으로 둔갑한 일명 ‘오송회 사건’이다. 그는 비록 복권을 기다리지 못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지만, 그가 남긴 시는 아직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그 누구보다 소박하고 투명한 언어로 진짜 삶을 이야기하는 그의 시를 만나 보자.
지은이
이광웅(1940∼1992)은 1940년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태어났다. 이리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당시 교내 문학상인 ‘남성문학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적 관심을 받기도 했다. 원광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원광여종고, 군산제일고등학교 등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했다. 1967년 ≪현대문학≫ 유치환의 추천, 1974년 ≪풀과 별≫ 신석정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한다. 1982년 월북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전·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된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다. 이들은 20여 일의 모진 고문 끝에 ‘교사 간첩단’으로 둔갑되었다. 주동 인물로 지목된 이광웅 시인은 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7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다. 이후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되었으나 이듬해인 1989년 전교조에 가입하면서 다시 교단에서 밀려난다. 이광웅 시인은 20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예를 되찾는다. ‘오송회’ 사건 재심에서 광주고등법원이 관련자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사건 피해자 및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다. 이에 대법원은 2011년 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 배상을 판결한다.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정의와 진실을 되찾은 양심의 값진 승리라 할 수 있다.
1985년 첫 시집 ≪대밭≫을 시작으로 둘째 시집 ≪목숨을 걸고≫(1989), 셋째 시집 ≪수선화≫(1992)를 출간했다. 교육문예창작회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1992년 12월 22일 고문과 투옥 후유증으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전북 군산의 금강 하구에 자리한 이광웅 시인의 시비(詩碑)에는 우리 시사(詩史)에 길이 남을 그의 대표작 <목숨을 걸고>가 새겨져 있다.
엮은이
고인환은 1969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예천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제7회 젊은평론가상(2006)을 받았다. 저서로 ≪결핍, 글쓰기의 기원≫(2003),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2003),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2005), ≪공감과 곤혹 사이≫(2007), ≪한국 문학 속의 명장면 50선≫(2008), ≪한국 근대 문학의 주름≫(2009), ≪작품으로 읽는 북한 문학의 변화와 전망≫(공저, 2007)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재미있고 알찬 글을 읽고 쓰기 위해 학생들과 고민하는 한편, 한국작가회의 산하 민족문학연구소에서 민족 문학, 비서구 문학, 동시대 한국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차례
제1시집 ≪대숲≫
유치한 저녁상
면도의 날
바깥 풍경
보충 수업 10년
李鍾根
예언서
주시 망상
꿈
비의 暗層
대밭
버림받은 하늘
한밥집 식탁
램프의 아침
묵은 노우트
달빛
종이꽃
제2시집 ≪목숨을 걸고≫
양담배
그때 그 순간 악마가…
사회 참관
바깥의 노래
담 안의 노래
햇빛의 말씀
징역 생각난다
목숨을 걸고
전라도 거리
연
달동네 꽃동네
눈 다친 아이
심연
아들 생각
작은 평화
밤 그늘
아름다운 영혼은
순서 정해진 여자의 마음
크리스마스카드만 해도
제자
제자들이 죽어 가고 있다
제3시집 ≪수선화≫
폭설의 광야에서
옆 사람의 웃음
황야의 등불
마음이 넓은 사람
떠나지 않는 사람
수선화
시
전향서 쓰듯
장군봉 아래 운동장 아이들
이웃의 얼굴
시인에게
시인의 취미
봄의 속삭임
오빠는 운동권이 아니었어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목록
≪초판본 가람 시조집≫ 이병기 지음, 권채린 엮음
≪초판본 고석규 시선≫ 고석규 지음, 하상일 엮음
≪초판본 고원 시선≫ 고원 지음, 이석 엮음
≪초판본 고정희 시선≫ 고정희 지음, 이은정 엮음
≪초판본 구상 시선≫ 구상 지음, 오태호 엮음
≪초판본 구자운 시전집≫ 구자운 지음, 박성준 엮음
≪초판본 권구현 시선≫ 권구현 지음, 김학균 엮음
≪초판본 권환 시선≫ 권환 지음, 박승희 엮음
≪초판본 김관식 시선≫ 김관식 지음, 남승원 엮음
≪초판본 김광균 시선≫ 김광균 지음, 김유중 엮음
≪초판본 김광섭 시선≫ 김광섭 지음, 이형권 엮음
≪초판본 김규동 시선≫ 김규동 지음, 이혜진 엮음
≪초판본 김기림 시선≫ 김기림 지음, 김유중 엮음
≪초판본 김남주 시선≫ 김남주 지음, 고명철 엮음
≪초판본 김달진 시선≫ 김달진 지음, 여태천 엮음
≪초판본 김동명 시선≫ 김동명 지음, 장은영 엮음
≪초판본 김동환 시선≫ 김동환 지음, 방인석 엮음
≪초판본 김민부 시선≫ 김민부 지음, 김효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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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김상용 시선≫ 김상용 지음, 유성호 엮음
≪초판본 김상훈 시선≫ 김상훈 지음, 남승원 엮음
≪초판본 김소월 시선≫ 김소월 지음, 이숭원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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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김조규 시선≫ 김조규 지음, 추선진 엮음
≪초판본 김종삼 시선≫ 김종삼 지음, 이문재 엮음
≪초판본 김춘수 시선≫ 김춘수 지음, 이재복 엮음
≪초판본 김현승 시선≫ 김현승 지음, 장현숙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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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님의 침묵≫ 한용운 지음, 이선이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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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박노춘·함윤수 시선≫ 박노춘·함윤수 지음, 차선일 엮음
≪초판본 박두진 시선≫ 박두진 지음, 이연의 엮음
≪초판본 박목월 시선≫ 박목월 지음, 노승욱 엮음
≪초판본 박봉우 시선≫ 박봉우 지음, 이성천 엮음
≪초판본 박성룡 시선≫ 박성룡 지음, 차성연 엮음
≪초판본 박세영 시선≫ 박세영 지음, 이성천 엮음
≪초판본 박용래 시선≫ 박용래 지음, 이선영 엮음
≪초판본 박용철 시선≫ 박용철 지음, 이혜진 엮음
≪초판본 박인환 시선≫ 박인환 지음, 권경아 엮음
≪초판본 박재삼 시선≫ 박재삼 지음, 이상숙 엮음
≪초판본 박정만 시선≫ 박정만 지음, 조운아 엮음
≪초판본 박종화 시선≫ 박종화 지음, 최경희 엮음
≪초판본 박팔양 시선≫ 박팔양 지음, 추선진 엮음
≪초판본 백두산≫ 조기천 지음, 윤송아 엮음
≪초판본 백석 시전집≫ 백석 지음, 이동순 엮음
≪초판본 변영로 시선≫ 변영로 지음, 오세인 엮음
≪초판본 서정주 시선≫ 서정주 지음, 허혜정 엮음
≪초판본 설정식 시선≫ 설정식 지음, 차선일 엮음
≪초판본 송욱 시선≫ 송욱 지음, 신진숙 엮음
≪초판본 신석정 시선≫ 신석정 지음, 권선영 엮음
≪초판본 신석초 시선≫ 신석초 지음, 나민애 엮음
≪초판본 심훈 시선≫ 심훈 지음, 최도식 엮음
≪초판본 오규원 시선≫ 오규원 지음, 이연승 엮음
≪초판본 오상순 시선≫ 오상순 지음, 여태천 엮음
≪초판본 오일도 시선≫ 오일도 지음, 김학중 엮음
≪초판본 오장환 시선≫ 오장환 지음, 최호영 엮음
≪초판본 유완희 시선≫ 유완희 지음, 강정구 엮음
≪초판본 유치환 시선≫ 유치환 지음, 배호남 엮음
≪초판본 윤곤강 시선≫ 윤곤강 지음, 김현정 엮음
≪초판본 윤동주 시선≫ 윤동주 지음, 노승일 엮음
≪초판본 윤석중 시선≫ 윤석중 지음, 노현주 엮음
≪초판본 이광웅 시선≫ 이광웅 지음, 고인환 엮음
≪초판본 이동주 시선≫ 이동주 지음, 김선주 엮음
≪초판본 이상 시선≫ 이상 지음, 이재복 엮음
≪초판본 이상화·이장희 시선≫ 이상화·이장희 지음, 장현숙 엮음
≪초판본 이성선 시선≫ 이성선 지음, 김효은 엮음
≪초판본 이용악 시선≫ 이용악 지음, 곽효환 엮음
≪초판본 이육사 시선≫ 이육사 지음, 홍용희 엮음
≪초판본 이은상 시선≫ 이은상 지음, 정훈 엮음
≪초판본 이찬 시선≫ 이찬 지음, 이동순 엮음
≪초판본 이탄 시선≫ 이탄 지음, 이성혁 엮음
≪초판본 이하윤 시선≫ 이하윤 지음, 고봉준 엮음
≪초판본 이한직 시선≫ 이한직 지음, 이훈 엮음
≪초판본 이형기 시선≫ 이형기 지음, 정은기 엮음
≪초판본 임영조 시선≫ 임영조 지음, 윤송아 엮음
≪초판본 임학수 시선≫ 임학수 지음, 윤효진 엮음
≪초판본 임화 시선≫ 임화 지음, 이형권 엮음
≪초판본 장만영 시선≫ 장만영 지음, 송영호 엮음
≪초판본 전봉건 시선≫ 전봉건 지음, 최종환 엮음
≪초판본 정공채 시선≫ 정공채 지음, 오태호 엮음
≪초판본 정지용 시선≫ 정지용 지음, 이상숙 엮음
≪초판본 정한모 시선≫ 정한모 지음, 송영호 엮음
≪초판본 조명희 시선≫ 조명희 지음, 오윤호 엮음
≪초판본 조벽암 시선≫ 조벽암 지음, 이동순 엮음
≪초판본 조병화 시선≫ 조병화 지음, 김종회 엮음
≪초판본 조지훈 시선≫ 조지훈 지음, 오형엽 엮음
≪초판본 조향 시선≫ 조향 지음, 권경아 엮음
≪초판본 주요한 시선≫ 주요한 지음, 김문주 엮음
≪초판본 천상병 시선≫ 천상병 지음, 박승희 엮음
≪초판본 최남선 시선≫ 최남선 지음, 김문주 엮음
≪초판본 한하운 시선≫ 한하운 지음, 고명철 엮음
≪초판본 한흑구 시선≫ 한흑구 지음, 이재원 엮음
≪초판본 홍사용 시선≫ 홍사용 지음, 차성연 엮음
≪초판본 황석우 시선≫ 황석우 지음, 김학균 엮음
책속으로
●대밭
대밭에 살가지 쪽제비 시글시글 댓가치를 분질러 놓으며 댓잎사귀 짓이겨 놓으며 바스락 소리 밤새 끊어지지 않는 밤이 깊었다. 새암 두덕에 두룸박 소리 긁히고 부딪히고 쌀 씻는 소리랑 큰동세 작은동세 주고받는 목소리 뒤세뒤세할 때까지 한쪽 귀퉁이 이불귀를 끌어 잡아댕겨 가며 대밭은 떠내밀며 잠을 설쳤다.
사랑채에서 울려오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무섭고 선보러 오는 사람네의 수다스런 언변 뒤에 감추어 둔 비밀스런 험상들이 무서워서 얼굴에 껌정을 칠하고 대밭을 빠져나가 북산으로 달아나 간 큰고모의 안부가 걱정돼서 할머니는 새벽부터 물레질이 잦았다. 새때가 지나면은 실 자새의 윙윙 소리는 퍼지고 퍼져서는 장지문을 다 흔든 후에 벽장문을 다 흔든 후에 부엌에까지 들어가서 새로 회삿물한 부뚜막을 흔들었다.
용수를 박고 막 떠 온 젖내기를 좋아하는 만주 아저씨가 오는 날은 우리 동네에는 있지도 않은 유태인 무서운 이야기는 끓는 라디오의 군부대신 연설처럼 열기가 올라오고 멀고 먼 옛날 절의 사진에 잠적 불출하셨다는 할아버지네 할아버지네 지하수처럼 흘러간 애사에 가슴 아파하는 날은 밀밥을 먹으면서 타국 가서 왼 식구가 시한에도 이불 없이 웅숭거리고 뼈 마디마디 곱았다는 사랑방에 들어 어느새이 괭이처럼 코를 고는 오직 아저씨를 위하여서 어머니는 나를 불러 대밭에 가서 술국 끓일 명아주 잎을 따게 했다. 지는 햇빛 속에 바람 소리 속에 섞여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대밭은 나의 상아탑이었다.
해방 직후 팔봉 지서장을 살은 육촌 재종형이 인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남쪽 어딘가로 도망치던 구름 낀 밤이 있었고 해방되기 전부터 공산당을 해 온 오상리 아저씨가 수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북쪽 어딘가로 도망치던 추적추적 비 내리던 밤.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고 말짱허니 갠 하늘이 되어 눈부시게 해가 빛났다. 땅거미 진 저녁이 내리면 어느새이 대밭에 자러 들온 참새 떼가 짹재그르짹재그르 떨어지는 햇빛 받고 시냇물 흐르듯이 끝없이 울어 대고 까막까치가 또 끝없이 짖어 대고 볼먹은 부엉이의 울음소리도 보태어 자동차의 이 소란을 극한 대낮의 홍수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지금은 없는 그 새나라의 대밭이 그립다.
●그때 그 순간 악마가…
형사가 나를 고문했을 때
“네놈은 김일성주의자! 그랬을 적엔 네놈에겐 반드시 배후가 있다. 배후 내놔라.” 하고 드디어 고문의 막바지를
무지막지한 구둣발로 성큼 딛고 올라섰을 때
내 오장육부는 문드러진 채 일제히
소리치고 있었다.
지옥의 망령처럼 기진의 단애에서, 최후의 젖 먹던 힘
발악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김일성주의자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자유 대한민국에 사는 한
김일성주의자면 어떻고
호치민주의자면 어떻단 말이오?
내가 모르는 소리를
당신들은 들이대지만
자신을 속이는 국가관을 들먹이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아무리 고문해 봤자
나에겐 배후 인물이 없고 당신들은 아무런 정보도 캐낼 수 없소.
그러니 약질의 가짜 간첩을 괴롭히지 말고
진짜 간첩 거물을 좀 잡아 보시오.
아무 배후 인물 없는 미물을 갖고 놀지 마시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고문을 중단하시오.
비행기고문,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전기고문…
지겨운 고문.
고문을 중단 못할 바에야
어서 나를 총살시키시오.
원양어업이란 말보다 먼바다 고기잡이가 더 좋은 것이 사실 아니오?
개인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인민이 사대주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뭐가 나쁘오?”
형사가 이를 갈았다.
“내 이런 악질은 처음 보겠군. 이 새끼가 드디어 발길질을 시작했군.”
그때 그 순간 악마가 와서
심장이 든 내 가슴을 악마가 와서 난도질을 했다. 그러나
매와 고문과 그 견딜 수 없는 치욕에도
나는 살았다.
내가 까무러침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알았다.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노동 계급답게
노동 계급의
삶의
뿌리의
그
향기답게
살아남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시
시는 말의 예술이라 흔히들 말하지만
결코
말도
말의 예술도
아니다.
숨결
맥박
따순 손길
말 없는 바라봄
뜨건 뺨 부빔…
역사의 토양에 깊이 뿌리 내리고
미래의 하늘에 주렁주렁 열매 맺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