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세 모노가타리≫는 헤이안 시대 전기에 성립한 우타모노가타리(歌物語) 작품으로, ≪이세 모노가타리≫라는 제목 외에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의 일기라는 의미의 ≪자이고추조 일기(在五中将日記)≫,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모노가타리라는 의미의 ≪자이고가 모노가타리(在五が物語)≫라는 제목으로도 불렀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와카를 중심에 두고, 대체로 나리히라 또는 나리히라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전개되는 단편 모노가타리집이다. 전본(傳本) 대부분은 와카 209수를 포함한 12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을 보면 나라(奈良) 가스가 마을(春日の里)에서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 임종을 앞둔 남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일견 한 남자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단은 주인공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아 모든 단의 남자를 동일인으로 보기 어려우며, 나리히라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각 단은 대부분 ‘옛날, 한 남자가 있었다’로 시작해 그 ‘남자’와 상대방이 와카를 읊은 경위에 대해 설명하는 짤막한 우타모노가타리로, 그중에는 지문 1행에 와카 1수의 짧은 단도 다수 있다. 전체 와카 209수 중 나리히라의 노래는 45수 정도이며, 그 외는 다른 가인의 와카로 ≪만엽집(万葉和歌集)≫, ≪고금 와카집(古今和歌集)≫, ≪후찬 와카집(後撰和歌集)≫, ≪습유 와카집(拾遺和歌集)≫, ≪쓰라유키집(貫之集)≫, ≪다다미네집(忠嶺集)≫ 등에서 확인되며, 작자 미상의 와카도 다수 포함한다. 이러한 와카를 ‘옛날, 한 남자’의 노래로 삼아 모노가타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125단에 걸쳐 한 남자의 일대기풍으로 이야기를 배열하고 있지만, 나리히라의 일대기가 아니라 완전한 허구에 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나리히라의 와카와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도입한 단에도 역시 허구를 가미해서 창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가집이나 설화집으로 부르지 않고 모노가타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25단 중에서 다섯 단 정도는 서민층의 이야기이지만 이를 제외하면 모두 나리히라 또는 나리히라와 닮은 남자의 연애와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와카를 읊은 때의 남자와 주변 인물의 세세한 심경의 동요를 간결한 문장으로 기록함으로써 와카가 가진 서정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대체로 와카를 중심에 두고 산문을 통해서 결론을 맺고 있으며, 또한 지문에 묘사된 남녀의 심정과 정황이 와카의 서정을 고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와카와 산문이 교착하는 지점에서 파생하는 섬약한 영탄이 ≪이세 모노가타리≫의 묘미이며, 이 점이 칙찬 와카집(勅撰和歌集)과 매우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금 와카집≫ 와카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고토바가키(詞書)는 노래를 읊은 사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뿐이지만, ≪이세 모노가타리≫의 지문은 때와 인물을 서두에서 소개하고 사건이 경과함에 따라 움직일 수 없는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는 모노가타리적 방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세 모노가타리≫ 마지막 단인 125단에는 ‘옛날, 한 남자가 병에 걸려 이제 곧 죽을 것처럼 생각되어 이렇게 읊었다. “결국에 가는 길이라고는 이미 들어 알지만 어제 오늘 일이라 생각도 못했는데(つひにゆく 道とはかねて 聞きしかど きのふけふとは 思はざりしを)”’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고금 와카집≫에서는 이 와카의 배경으로 ‘병이 들어 약해졌을 때 읊었다−아리와라 나리히라 조신(朝臣)’이라는 고토바가키를 붙이고 있다. ≪고금 와카집≫의 머리말과 ≪이세 모노가타리≫의 지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세 모노가타리≫의 지문은 ‘옛날’, ‘한 남자’라고 하는 특정한 때와 인물을 제시하고 ‘죽을 것처럼 생각되어’라고 하는 절박한 심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금 와카집≫은 ‘결국에 가는(ついにいく)’으로 시작되는 와카만을 문학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세 모노가타리≫는 와카뿐 아니라 지문 모두에서 문학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문에 의해 와카는 모노가타리의 일부로서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 모노가타리≫를 가집이라 칭하지 않고 ‘우타모노가타리(노래이야기)’라고 일컫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200자평
이 아름다운 시구는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시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일본 고유의 정형시 와카와 그에 얽힌 사랑 이야기들을 엮었다. 주인공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로 추정된다. 125편의 노래와 글이 우리를 헤이안의 낭만으로 인도한다.
옮긴이
민병훈은 일본의 센슈대학(専修大学)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 입학해 ≪이세 모노가타리≫를 중심으로 하는 우타모노가타리 연구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2001)를 취득했다(문부성 국비 장학생). 박사 과정 중에 집필한 논문 <≪伊勢物語≫六段の<あくたがはといふ河>考−地史的視点から−>가 ≪国語と国文学≫에 게재되기도 했다. 귀국 후 2002년 9월 대전대학교 일어일문학과의 전임 강사로 임용되어 현재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재직하는 동안 국제협력센터장, 신문방송사 주간 등을 역임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국일본문화학회 편집이사, 학술이사, 고전분과이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일본어문학회 학술이사, 한국일어일문학회와 대한일어일문학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에 ≪歌物語の淵源と享受≫, ≪일본의 신화와 고대≫, ≪わかる日本文化≫(공저,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出雲文化圈と東アジア≫(공저), ≪한 권으로 읽는 일본 문학사≫ 등이 있으며, 최근 5년간의 주요 논문으로 <모노가타리의 유리론−박해와 도망의 심층−>, <야마토타케루의 영상−서국 정벌담을 중심으로−>, <≪土佐日記≫における楫取蔑視の視座>, <神話に見る英雄の神性>, <≪土佐日記≫に見る送別の諸相>, <≪竹取物語≫の主題と方法>, <≪土佐日記≫の方法−<前の守>と<船君>と−>,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성립 시론−모노가타리의 시조성−>, <神話における征討者と統治者の映像> 등이 있다.
차례
제1단 관례(初冠)
제2단 서경(西の京)
제3단 히지키모(ひじき藻)
제4단 서편 건물(西の対)
제5단 관문지기(関守)
제6단 아쿠타가와 강(芥河)
제7단 돌아가는 파도(かへる浪)
제8단 아사마 봉우리(浅間の嶽)
제9단 아즈마 하향길(東下り)
제10단 논 위의 기러기(たのむの雁)
제11단 하늘을 떠가는 달(空ゆく月)
제12단 도둑(盗人)
제13단 무사시 등자(武蔵鐙)
제14단 망할 닭(くたかけ)
제15단 시노부 산(しのぶ山)
제16단 기노 아리쓰네(紀有常)
제17단 방문 뜸한 사람(年にまれなる人)
제18단 흰 국화(白菊)
제19단 저 구름처럼(天雲のよそ)
제20단 단풍잎(楓のもみじ)
제21단 서로 다른 세상(おのが世々)
제22단 천 일 밤을 하룻밤이라(千夜を一夜)
제23단 우물 벽(筒井筒)
제24단 아즈사 활(あづさ弓)
제25단 만나지 못하고 자는 밤(あはで寝る夜)
제26단 중국 배(もろこし船)
제27단 대야에 비친 모습(たらいの影)
제28단 만나기 어려워졌나(あふごかたみ)
제29단 벚꽃 하연(花の賀)
제30단 아주 뜸하게 만났던 여자(はつかなりける女)
제31단 좋습니다, 풀잎처럼(よしや草葉よ)
제32단 베실 꾸리(倭文のをだまき)
제33단 물가 후미진 곳(こもり江)
제34단 마음을 열지 않는 냉담한 여자(つれなかりける人)
제35단 거품 엮은 끈(あわ緒)
제36단 칡덩굴(玉かづら)
제37단 허리끈(下紐)
제38단 사랑이라고 하는(恋といふ)
제39단 미나모토노 이타루(源至)
제40단 사랑에 목숨을 건(すける物思い)
제41단 자초(紫)
제42단 어떤 이의 길(たが通ひ路)
제43단 소문만 성한(名のみ立つ)
제44단 전별식(馬のはなむけ)
제45단 가는 반딧불(行く蛍
제46단 사이좋은 친구(うるわしき友)
제47단 당신 부르는(大幣の)
제48단 나를 기다리는 곳(人待たむ里)
제49단 젊디젊어서(うら若み)
제50단 동그란 계란(鳥の子)
제51단 국화(菊)
제52단 창포를 베며(あやめ刈り)
제53단 만나기 힘든 여자(逢いがたき女)
제54단 냉담한 여자(つれなかりける女)
제55단 당신의 말(言の葉)
제56단 풀로 엮은 초막(草の庵)
제57단 사랑에 지친(恋ひわびぬ)
제58단 황폐해진 처소(荒れたる宿)
제59단 히가시야마 산(東山)
제60단 귤꽃(花橘)
제61단 소메카와 강(染河)
제62단 꽃잎 떨어진 가지(こけるから)
제63단 늙은 여자의 머리(つくも髪
제64단 구슬 발(玉簾)
제65단 아리와라씨 남자(在原なりける男)
제66단 미쓰 해변(みつの浦)
제67단 눈꽃 피어 있는 숲(花の林)
제68단 스미요시 해변(住吉の浜)
제69단 사냥의 명을 받은 칙사(狩の使)
제70단 어부의 낚싯배(海人のつり舟)
제71단 신의 담장(神のいがき)
제72단 오요도의 소나무(大淀の松)
제73단 달 속의 계수나무(月のうちの桂)
제74단 첩첩 산(重なる山)
제75단 청각채(海松)
제76단 오시오 산(小塩の山)
제77단 봄과의 이별(春の別れ)
제78단 야마시나의 친왕(山科の宮)
제79단 천 길 나무 그늘(千ひろあるかげ)
제80단 쇠락한 집안(おとろえた家)
제81단 소금가마(塩竈)
제82단 나기사노인(渚の院)
제83단 오노(小野)
제84단 피할 수 없는 이별(さらぬ別れ)
제85단 그치지 않는 눈(目離れせぬ)
제86단 나름대로 살면서(おのがさまざま)
제87단 누노비키 폭포(布引の滝)
제88단 달도 찬미 안 해요(月をもめでじ)
제89단 헛소문(なき名)
제90단 벚나무 꽃(桜花)
제91단 아쉬워해도(惜しめども)
제92단 발판 없는 작은 배(棚なし小舟)
제93단 차이 나는 신분(たかきいやしき)
제94단 단풍도 꽃도(紅葉も花も)
제95단 견우성(ひこ星)
제96단 아마노사카테(天の逆手)
제97단 마흔 살을 축하하는 연회(四十の賀)
제98단 세공한 매화 나뭇가지(梅の造り枝)
제99단 활 경기의 날(ひをりの日)
제100단 망우초(忘れ草)
제101단 기이한 등나무 꽃(あやしき藤の花)
제102단 속세의 번잡함(世のうきこと)
제103단 함께 잔 밤(寝ぬる夜)
제104단 가모노마쓰리(賀茂の祭)
제105단 하얀 이슬(白露)
제106단 다쓰타 강(龍田河)
제107단 처지를 아는 비(身をしる雨)
제108단 파도에 젖는 바위(浪こす岩)
제109단 사람이 먼저 덧없이(人こそあだに)
제110단 혼을 묶어(魂結び)
제111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まだ見ぬ人)
제112단 스마의 어부(須磨のあま)
제113단 짧은 마음(短き心)
제114단 세리가와 강으로의 행차(芹河行幸)
제115단 미야코시마(みやこしま)
제116단 오래된 가옥(はまびさし)
제117단 스미요시로의 행차(住吉行幸)
제118단 잊지 않았다는 말(たえぬ心)
제119단 추억거리(形見)
제120단 쓰쿠마 마쓰리(筑摩の祭)
제121단 우메쓰보(梅壷)
제122단 이데의 고운 물(井出の玉水)
제123단 메추라기(うづら)
제124단 나와 같은 마음의 사람(われとひとしき)
제125단 결국에 가는 길(つひにゆく道)
부록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를 통해서 본 고대의 관동(關東)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제6단 아쿠타가와 강(芥河)
옛날, 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에게는 여러 해 동안 마음에 두고 구혼한 여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얻기 힘든 여자였기 때문에 결국 훔쳐 내기에 이르렀다. 남자는 기회를 틈타 무척 어두운 밤에 여자를 훔쳐 내어 도망친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아쿠타가와(芥河)라고 하는 강에 다다랐을 때, 여자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이슬을 보고 “저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지만 남자는 정신이 없어 대답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갈 길은 멀지만 밤도 깊은 데다가 번개도 격렬하게 치고 비도 심하게 내리므로, 남자는 도깨비가 있는 곳인지도 모르고 황폐한 곳간에 여자를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활과 전통을 메고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밤이 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곳간 안에 있던 도깨비가 여자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여자가 “아아” 하고 소리쳤지만 번개 치는 소리에 남자는 듣지 못했다. 이윽고 날이 새어 남자가 곳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데리고 온 여자가 없다. 발을 구르며 울어 보지만 아무런 보람이 없다.
저 흰 구슬은 무엇이오 여자가 물어봤을 때
이슬이라 답하고 사라져 버릴 것을
白玉か 何ぞと人の 問ひし時
つゆとこたへて 消えなましものを
이것은 이후의 니조 황후(二条の后)가 사촌인 여어(女御)를 시중들듯이 지내고 계실 때의 일로, 그 자태가 매우 아름다워 한 남자가 약탈해 도망가는 것을 오라버니인 호리카와 대신(堀河の大臣)과 장남 구니쓰네 대납언(太郎国経の大納言)이 뒤쫓아 가 구한 일에서 연유한다. 대신과 대납언이 아직 낮은 관직으로 궁에 입궐할 때 심히 우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뒤쫓아 가 가로막고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도깨비라고 말한 것이다. 황후도 아직 무척 젊고 보통 신분으로 계실 때의 일이라고 하더라.
·제14단 망할 닭(くたかけ)
옛날, 한 남자가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방랑하다가 마음이 이끌려 미치노쿠 지방(陸奥の国)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한 여자가 교토 사람은 만나기 힘든 존재라고 생각한 것인가, 한결같이 사모의 정을 품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그런 심정을 노래로 읊어 남자에게 보냈다.
서툰 사랑에 애타 죽는 일 없이 누에가 되면
좋겠소 아주 짧은 목숨이라고 해도
なかなかに 恋に死なずは 桑子にぞ
なるべかりける 玉の緒ばかり
노래까지 촌스러웠다. 그래도 역시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던 것일까. 남자는 여자네 집으로 가서 하룻밤 잠을 잤다. 그런데 남자가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어두컴컴한 시간에 돌아가자 여자는,
날이 밝으면 저 망할 닭 물통에 처넣을 테다
밤이 새기도 전에 낭군을 보냈으니
夜も明けば きつにはめなで くたかけの
まだきに鳴きて せなをやりつる
라고 애정 담긴 노래를 읊었지만, 남자는 교토에 간다고 말하며,
구리하라의 아네하 소나무가 사람이라면
교토의 선물로서 데리고 가 줄 텐데
栗原の あねはの松の 人ならば
みやこのつとに いざといはましを
라고 읊어 보냈다. 그런데 여자는 노래의 의미를 잘못 해석해 기뻐하며 “그 사람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제23단 우물 벽(筒井筒)
옛날, 교토를 떠나 오랫동안 시골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아이들은 우물가에 나와 놀곤 했는데, 성인이 되자 남자도 또한 여자도 서로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이 여자를 꼭 아내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여자도 이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어 해서, 부모가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인근에 살고 있던 그 남자가 이런 노래를 읊어 보내왔다.
우물의 벽에 키를 맞추며 놀던 나의 신장도
우물보다 컸겠죠 보지 않은 사이에
筒井つの 井筒にかけし まろがたけ
過ぎにけらしな 妹見ざるまに
이 노래에 여자가 반가로,
길이 대 보던 가르마 탄 머리도 어깰 넘었소
그대 아니고 누가 올려 묶어 주리오
くらべこし ふりわけ髪も 肩すぎぬ
君ならずして たれかあぐべき
라고 읊어 보내는 등,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두 사람은 희망하던 대로 결혼을 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여자가 부모를 잃어 생활이 곤궁해져 감에 따라, 남자는 이 여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 가와치 지방(河内の国) 다카야스 군(高安郡)에 새로운 처를 만들어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전 여자는 남자를 미워하는 내색도 하지 않고 보내 주는지라,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 외에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가와치 지방에 가는 것처럼 꾸미고 마당의 나무 사이에 숨어 보았더니 여자는 무척 꼼꼼히 화장을 하고 시름에 잠겨,
바람이 불면 도적이 출몰하는 다쓰타 산을
이 밤중에 당신은 홀로 넘는 건가요
風吹けば 沖つしら浪 たつた山
夜半にや君が ひとりこゆらむ
라고 읊는 것을 듣고 남자는 더없이 사랑스럽게 생각해 가와치 지방의 여자에게 가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한참이 지난 후에 그 다카야스 군의 여자에게 가 보았더니, 다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품위 있게 치장을 하고 있던 여자가 지금은 완전히 긴장감이 풀어져, 스스로 주걱을 들고 그릇에 밥을 푸고 있는 것을 보고 남자는 넌더리가 나서 그 후로는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가와치의 여자는 야마토 쪽을 바라보며,
당신이 사시는 쪽을 바라보면서 살겠습니다
구름아 가리지 마 비가 내린다 해도
君があたり 見つつを居らむ 生駒山
雲なかくしそ 雨はふるとも
라고 읊조리며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어느 날 야마토의 남자가 “그쪽으로 가겠다”는 편지를 전해 왔다. 여자는 기뻐하며 남자를 기다렸지만 남자는 오지 않고 몇 번이나 허무하게 시간이 지나가,
그대 오신다 전해 주신 밤들이 지나쳐 가니
기대하지 않지만 그리며 지냅니다
君来むと いひし夜ごとに 過ぎぬれば
頼まぬものの 恋ひつつぞ経る
라고 읊어 보냈지만, 남자는 더 이상 찾아 주지 않았다.
·제84단 피할 수 없는 이별(さらぬ別れ)
옛날,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낮은 신분이었지만 모친은 황족 출신이었다. 그 어머니는 나가오카(長岡)라는 곳에 살고 계셨다. 아들은 교토의 궁정에 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있는 곳을 찾아뵈려고 해도 그리 자주 오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 남자는 외아들이기도 해서 어머니가 무척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12월 무렵, 시급한 일이라 하며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놀라서 열어 보았더니 노래가 들어 있었다.
늙은 몸이라 피할 수 없는 이별 있다고 들으니
왠지 점점 더 보고 싶은 그대입니다
老いぬれば さらぬ別れの ありといへば
いよいよ見まく ほしき君かな
그 아들은 심히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읊었다.
이 세상 안에 피할 수 없는 이별 없는 것인가
천세를 기도하는 당신 자식을 위해
世の中に さらぬ別れの なくもがな
千代もといのる 人の子のた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