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동화로 유명한 작가 이주홍이 쓴 단편소설 네 편을 실었다. 1930년대 작품 두 편과 1950~1960년대 작품 두 편이다.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 1906∼1987)의 다채로운 예술 세계는 한국문학을 새롭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많은 잠재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문학적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작품 창작을 하였다. 그의 예술 활동은 아동문학, 시,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만화 등의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다채로운 예술 활동의 중심이 된 것은 단연 동화·동시·소년소설 등의 아동문학과 소설·희곡 등의 성인문학이다. 그는 1928년 ≪신소년≫지에 동화 <배암색기의 무도>를 발표하고, 1929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가난과 사랑>이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7년 작고하기까지 약 60년 간 그는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의 두 방면에서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분리된 분과학문 체제 안에서 그의 문학적 성과는 총체적으로 조망되지 못했다. 아동문학 방면에서는 이주홍 문학이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그는 1930년대 카프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현실주의 작가로 꼽힌다. 이재철은 그를 가리켜, 예술성과 흥미성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 ‘건강한 리얼리즘 작가’라고 했다. 그러나 성인문학 방면에서는 소설에 대한 단편적인 작품론을 넘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주홍의 작품은 소설과 아동문학·극문학뿐만 아니라 활자 텍스트와 텍스트를 넘어선 예술 간의 인위적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현재의 분과학문 체제로 구축된 분절적인 연구는 오히려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가로막은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주홍의 다채로운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 장르의 인위적 경계를 넘나드는 이주홍 문학의 고유한 패턴과 공통된 문제의식에 접근하려는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이 이주홍 문학의 공통된 문제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이주홍의 문학적 원형이 되는 아동문학이 성인문학과 어떻게 넘나드는가 하는 문제다. 이주홍이 집중적으로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을 창작하기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다. 앞서 말한 바, 그는 1928년 동화 <배암색기의 무도>와 1929년 단편소설 <가난과 사랑>으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실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의 두 영역 사이를 넘나드는 현상은 아동문학의 탄생 당시부터 있어 온 것이다. 아동문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성인문학은 수 세기 동안 이미 확고한 문학체계로 존재해 왔다. 아동문학은 근대 이후 기존의 성인문학 또는 모든 연령을 독자 대상으로 삼은 문학을 아동을 독자적인 수신자로 삼는 문학으로 다시 쓰기(re-writing) 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조선의 경우에도 최남선이 주재한 ≪소년≫지에 수록된 작품이나 번안 작품 등의 초기 아동문학에서는 성인문학에서 아동문학으로의 이동 현상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이주홍이 성인문학과 아동문학의 두 방면에 고르게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 1930년대는 아동문학의 독자적인 영역이 명료하게 인식된 이후라는 점에서 초기 아동문학에서의 경계 넘기와 질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동전문잡지인 ≪어린이≫(1923∼1934), ≪신소년≫(1923∼1934), ≪별나라≫(1926∼1935)는 성인문학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아동문학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주홍은 1930년대 사실주의 아동문학의 중심 잡지였던 ≪신소년≫과 ≪별나라≫에 주로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체된 이후 자신의 아동문학 창작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주홍은 소설 창작을 병행하면서 사회적 변동에 대처해 나간다.
둘째는 이주홍의 문학 작품에서 단연 뛰어난 성과를 성취했다고 평가 받는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난’의 체험을 승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주홍의 가난 체험은 출생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주홍은 1906년 5월 20일 경남 합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정식(李正植)과 어머니 강정화(姜汀華) 사이에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가난과 병으로 모두 목숨을 잃었다. ‘노상 영양실조가 된 노리짱한 얼굴’은 작가가 회고하는 어머니의 자화상이다. 작가 이주홍의 제도권 정규 교육 이력은 합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뿐이다. 그는 소년 시절 고학을 하다 실패하고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에 심취한다. 그 후 1924년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탄광, 토목일, 철물점, 제과점, 문방구, 공장 등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면서 독학을 하였다. 식민지 시기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대학을 다니거나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 출신이었음을 되새겨 본다면, 이주홍의 이력은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자평
아동문학, 시,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만화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작가 이주홍. 아동문학에 밀려 소외된 감이 있던 그의 단편소설 네 편을 발굴했다. ‘가난’의 체험을 승화한 작품 세계가 보인다.
지은이
1906년 5월 20일 경남 합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은 1918년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3월에 서울 한성중학원을 졸업했다. 1924년 히로시마로 건너간 향파는 고된 노동 속에서 독학을 하다가, 1928년 3월에 도쿄(東京)의 정칙영어학교를 수료했다. 수료와 동시에 히로시마로 돌아온 그는 1928년 4월부터 재일 한국인을 위한 근영학원(槿英學院) 설립에 참여하여 교육자로서 첫발을 디딘다. 1928년 ≪신소년≫지에 동화 <배암색기의 무도>를 발표하고, 1929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가난과 사랑>이 입선하면서 귀국 후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7년 작고하기까지 약 60년 간 그는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의 두 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 ≪신소년≫, ≪풍림≫, ≪신세기≫ 등의 편집에 종사했으며,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삶과 아울러 배재중학교·동래중학교·부산수산대학교에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엮은이
오현숙은 1976년 서울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박태원의 아동문학 연구>(≪아동청소년문학연구≫ 8호, 2011. 6), <일제 말기 박태원 소설의 장르 전이 양상 연구>(≪한국문화≫ 55호, 2011. 9), <개화계몽기
차례
완구상
제과공장
철조망
유기품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ㅇ, 이―ㅇ 우루루루루.
모-터 소리 절구 소리에 왼 집안이 떨닌다.
소란한 긔게 소리에 여간 필요한 일이 아니면 큰 소리를 질러 말하기가 성가신 모양이라 사람들은 입을 다믈고 견듸는 데에 무척 달연되여 보인다.
캡을 돌여쓰고 수건으로 코를 싸맨 멀숙한 사나이 하나가 제분실(製粉室)에서 나와 창고를 향해 거러온다.
부뜰고 무러나 볼까 기웃기웃거리는 사이에 그는 급한 거럼으로 건조장(乾燥場) 층게를 밟는다.
유리창 넘어로 야끼바(燒場)가 보인다.
열두 개나 되는 커다란 분구(焚口)에는 두터운 석탄불이 용광노처럼 일고 있다.
분구마다 한 사람씩 차지하고 서서 ‘아라레’를 굽노라고 째스 하듯 몸을 움즉이고 섰다.
내게도 저 일이 맛겨질 것인가 생각하면 긔술 앞에 직면한 미숙련공(未熟練工) 특유의 공포 관염이 몸에 슴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