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무언지 모를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시대, 알 수 없는 공포와 허무가 팽배한 시대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병신과 머저리>), 그런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이상향 혹은 구원의 장소를 꿈꾸는 모습(<이어도>),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비화밀교>)을 보여 주는 작품들을 모았다. 이때 부정적 세계는 4·19 혁명 직후의 혼란스러움,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인간다운 삶의 상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쳐야 했던 한국 사회와 역사의 비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청준이 추구하는 것은,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는 생가 안내판의 문구처럼 ‘씻김굿’으로서의 글쓰기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씻기고, 사회를 씻기고, 마침내 우리 삶의 비의와 본질을 성찰하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소설에서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과 반성, 용서와 화해, 성찰과 구원의 주제들이 한국적인 미학으로 구축되고 있다.
<병신과 머저리>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을 체험한 형을 ‘병신’으로,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동생을 ‘머저리’로 내세워 역사와 개인의 관계, 내적 갈등을 극복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주제화하고 있다. 행동하는 인물과 회의하는 인물의 대립이라 할 만한 이들 형제의 관계, 작중 인물인 형의 소설 쓰기와 <병신과 머저리>라는 소설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대립적인 인물 배치와 액자소설의 구성은 존재와 세계의 양면성을 내용과 형식 두 차원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어도>는 제주도 뱃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설의 섬을 찾기 위해 해군 함정까지 동원한 수색 작전을 벌인다는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낙원과 현실의 관계, 신화의 세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이때 낙원 혹은 신화의 세계란 인간 사회나 역사의 세계와 대비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청준의 문학 세계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우리 현재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리가 있는데,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그 꿈을 실현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이때 꿈이란 “내일에 대한 이념”이고, “이것을 공적으로 실현하는 힘은 권력”이며,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정신”이며, 그 정신의 근원이 “신화의 세계”다.
<비화밀교>는 제목 그대로 비밀스러운 종교에 관한 소설이다. ‘나’는 고향 근처에 있는 제왕산을 등산하는 연례행사에서 이상스러운 전율을 느끼며 집단적 광기를 함께 체험한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을 그 비밀스러운 산행은 산 아래의 현실에서 있었던 죄과를 씻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는 자리로 이어져 왔다. 그래서 그 비밀스러운 산행은 모든 것을 묻고 다시금 산 아래의 현실로 돌아가는 화해의 장이자, 다시 태어남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 산 아래의 현실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해 온 것처럼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가리킨다.
200자평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세 작품을 수록했다. 이 작품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성을 문제 삼는 한편, 용서와 화해, 신화와 근원에 대한 탐구라는 이청준 문학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들을 담고 있다. 창조적 승화의 세계에 도달하는 그의 문학을 보여 준다.
지은이
소설가 이청준은 1939년 8월 9일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출생해서, 2008년 7월 31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65년 단편 <퇴원>이 제 7회 <사상계>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한 뒤, 1968년 단편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 1969년 <매잡이>로 대한민국예술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오며 40여 년간 한국 소설사의 ‘큰 기둥’ 역할을 했다. 1975년 <이어도>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1978년<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 1987년 <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 1990년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을 수상했고, 2008년 사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청준은 한때 사상계사를 비롯하여 잡지 편집 및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주로 창작 생활에 전념해 왔다. 그의 작품 세계는 토속적인 민간 신앙에서부터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와 지식인의 존재 해명을 거쳐 전통적인 정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김승옥이 4·19와 5·16을 체험한 세대의 감수성을 보여주었다면, 이청준은 그 세대의 지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문적인 지성을 보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초기 작품 세계에서는 환부를 알 수 없는 상처로 몸부림치는 지식인의 삶을 그리거나[<병신과 머저리>(1966), <굴레>(1966)], 저 너머의 삶을 지향하는 장인의 예술 세계를 그려낸다[<줄>(1966), <과녁>(1967), <매잡이>(1968)].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설적 작업을 활발하게 펼치는데,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 정신의 대결 관계를 주로 형상화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문의 벽>(1971), <조율사>1972), <들어보면 아시겠지만>(1972), <떠도는 말들>(1973), <이어도>(1974), <낮은 목소리로>(1974),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 <서편제>(1976), <불을 머금은 항아리>(1977), <잔인한 도시>(1978), <살아 있는 늪>(1979) 등이 있다.
이후 <시간의 문>(1982), <비화밀교>(1985), <자유의 문>(1988) 등에서 인간 존재와 거기에 대응하는 예술 형식의 완결성에 대한 추구를 보여주었고, 이 밖에도 <별을 보여 드립니다>(1971), <가면의 꿈>(1975), <당신들의 천국>(1976), <예언자>(1977), <남도 사람>(1978), <춤추는 사제>(1979), <흐르지 않는 강>(1979),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 <따뜻한 강>(1986), <아리아리 강강>(1988), <자유의 문>(1989) 등이 있다.
현재 장편소설 11권과 중단편집 10권, 연작소설 3편, 총24권이 출판되어 있다.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터키 등지에서도 그의 작품이 번역·출간되었으며, 영화·드라마·연극으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병신과 머저리>)에서부터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천년학>(<서편제>), 이창동 감독의 <밀양>(<벌레 이야기>)에서 최근 2009년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조만득씨>) 등을 들 수 있다.
엮은이
김연숙은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 여성 문화의 형성과 근대 소설의 내면성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 ≪소설 구경, 영화 읽기≫(공저), ≪여성의 몸-시각·쟁점·역사≫(공저), ≪신여성-매체로 본 근대여성풍속사≫(공저), ≪확장하는 모더니티≫(공역)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여성 육체의 재현 양상>, <저널리즘과 여성 작가의 탄생>, <근대 주체 형성과 ‘감정’의 서사>, <서사물의 통속적 기획과 감정의 콘텍스트> 등이 있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17
병신과 머저리 ··················21
이어도 ·····················71
비화밀교(秘火密敎) ···············163
엮은이에 대해 ··················264
책속으로
탕!
총소리는 산골의 고요를 멀리까지 쫓아버리려는 듯 골짜기를 샅샅이 돌고 나서 등성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 소리의 여운을 타고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으로 젖어 들었다. 문득 수면에 어리는 그림자처럼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확실해지기만 하면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나와 익숙했던, 어쩌면 어머니의 뱃속에도 있기 이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생각이 나기 전에 그 수면 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던 얼굴은 점점 사라져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다시 산골을 가득 메웠다. 짠 것이 입으로 자꾸만 흘러 들어왔다.
탄환이 다하고 총소리가 멎었다.
피투성이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얼굴이었다.
-62쪽
“오늘 밤 이런 일은 실인즉 시발이나 내용이 간단하네. 오랜 세월 전 언제부턴가… 이 고을 사람들은 제야의 어둠을 타고 제왕산을 올라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그것은 이따가 자네가 직접 보게 될 것이네마는 하옇든지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이곳 사람들 나름의 방법으로 새해의 첫날을 맞이하고 내려오는 풍습이 있어왔네. 그런 은밀스런 풍습이 언제 누구에게서부터 시작했으며 어떻게 이날까지 전해오게 됐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며 뜻하려 하는지 따위는 거의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말해지지 않은 채 말일세. 하지만 일단 그것을 하룻밤 체험하고 나면 모든 것이 스스로 느껴지게 마련이라는 내 말을 믿어두게. 그 느낌이란 물론 이 일에 대해 사람들 간에 서로 말해지지 않고 있는 부분에 관한 것이 핵심이 되겠지만, 한걸음 나아가 나나 사람들이 어째서 굳이 그걸 말하려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올 수 있었던가, 그런저런 이유들에까지 충분한 이해가 미칠 수 있는 것일세. 심지언 아마 오늘 밤이 밝고 나면 자넨 거기서 어떤 더 큰 궁금증을 얻어 지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구에게 굳이 말하고 싶어 하거나 캐물을 생각마저 없어져 있을 테니 말일세. 그러니 우선은 무엇보다 오늘 밤을 자네가 잘 경험해 내는 일일세.”
-179~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