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모든 사람의 능력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특정한 정체성과 자리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아무나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체성들 사이를 오가는, 정체성들 사이에 있는 정의내릴 수 없는 것, 가능한 것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마르크시스트로 출발해 그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랑시에르의 사상적 궤적을 따라가 본다. 분할된 구조의 틀 안에 갇힌 개인이 아닌, 저 무한대의 자유를 향해 탈피한 나비와 같은 해방된 주체는 어떤 모습일까.
지은이
주형일
영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다. 서울대학교 신문학과(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5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파리1대학교에서 미학 DEA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이미지가 아직도 이미지로 보이니?』(2015), 『미디어학교』(2013),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2012), 『영상매체와 사회』(2009), 『내가 아는 영상기호분석』(2007),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2006), 『사진: 매체의 윤리학, 기호의 미학』(2006) 등이 있고, 『문화의 세계화』(2014), 『더러운 전쟁』(2013),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2013), 『합의의 시대를 평론하다』(2011), 『미학 안의 불편함』(2008), 『일상생활의 혁명』(2006), 『중간 예술』(2004) 등을 번역했다.
차례
분할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가능성
01 알튀세르 비판
02 노동자의 정체성
03 지식인의 오만
04 지적 능력의 평등
05 진보와 해방
06 역사와 이단
07 치안과 정치
08 인민과 민주주의
09 분할과 미학
10 가능한 것과 자유로운 놀이
책속으로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없으며 아무나 해서도 안 된다”는 널리 퍼진 믿음은 이렇게 탄생한다. 사람은 평등하지만 정치, 경제처럼 중요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도식적이고 극단적인 분할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각종 선거에 임할 때 우리가 갖는 생각들, 대통령의 정책 실패를 한탄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들, 역대 대통령들을 조선 시대의 왕들과 비교하는 이야기들,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에 대한 사회적 반응, 특정인에게 무조건 지지를 보내는 시골 마을의 노인들을 볼 때 드는 생각들은 사실 정확히 이런 분할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 수 있는 지도자와 인재를 애타게 찾고 있지 않은가?
“분할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가능성” 중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꿔야 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 허용된 꿈을 꿨다. 혁명의 이론가들은 19세기의 잔인한 착취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들만의 문화, 노동계급만의 의식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고 이론화했다. 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란 것이 결국 노동자를 노동자의 자리에만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노동자는 일하는 존재, 노동 환경이나 임금에 불만을 갖고 투쟁하는 존재,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 더 나은 환경에서 다시 일하는 존재일 뿐인가? 다시 말해 노동자는 언제나 노동자일 뿐인가? 그런데 결코 부르주아가 될 수 없으면서도 부르주아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고 부르주아의 꿈을 꾸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모순 속에서 랑시에르는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노동자의 정체성” 중에서
인민을 교육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인민을 과거의 가치나 믿음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경제 발전에 참가하게 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악감정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계급과 인민이 최소한의 공동 가치와 믿음들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응집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최소한의 사회적 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회가 개선된다는 믿음을 심어 주고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계급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도록 해 지배계급의 쇄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기존 질서는 깨지 않으면서 일정한 수준의 개선이 진행되게 해 불평등이 안정되게 유지된다. 이것은 평등이라는 허상 속에 불평등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불평등한 상황을 거짓으로 평등하다고 속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평등을 평등이란 이름으로 드러내 놓는 것이다. 불평등은 평등을 보이게 만들면서 재생산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불평등의 평등화’라고 부른다.
“진보와 해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