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정공채 시인은 감각적 빛의 무늬와 낭만적 바다의 자유를 노래하던 시인이다.
그의 시는 빛과 어둠이 주조하는 세계에 대한 교감을 핵심적 정서로 드러낸다. 여러 색채가 교차하고 대비되면서 그 빛깔의 의미가 현현할 때 시인은 그 표정을 포착해 시화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빛이 수놓은 색감의 의미를 질문하며, 그때의 이미지를 어떻게 시로 형상화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바다의 광대무변한 형상이 시적 자유의 표상으로 인식되며, 그 표상 속에서 시인의 욕망의 기원을 탐색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의 시인이며 빛의 시인으로서 바다를 호흡하고자 한 낭만파적 시인이다. 이제 그 빛의 무늬와 바다의 자유를 갈망하던 욕망의 언어를 만난다.
시인은 빛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주로 주변 풍경으로부터 시적 이미지를 집적하는데, 우선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색채 대비의 공간이다. 결국 시인은 대상의 빛깔이 환기하는 정서를 시적 주원료로 삼아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의 대조적 이미지를 상이한 시어로 형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늘 빛의 노예인 시인은 내면을 울리며 파고드는 종소리를 동경하듯 빛을 동경하지만, 항상 그림자를 함께 거론한다. 그림자와 함께했을 때 비로소 빛과 어둠을 내포한 생의 양면성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일부러라도 빛의 노예이자 주인으로서 생의 양면적 빛깔을 내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무엇보다 자유의 시인이다. 시인에게 자유란 개인적 자유이기도 하고, 해방적 자유이기도 하며, 이미지의 자유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자유는 인간의 오감을 일깨우는 냄새로서의 자유로 변주되기도 한다. 자유의 다면적 표정 속에서도 바다는 여전히 시인이 꿈꾸는 자유의 실체적 표상이다. 시인은 망망대해의 장엄한 바다가 하늘과 화합하는 “무변의 자유”의 공간임을 인지한다. 그 바다는 시인의 항로이며 삶의 터전이자 논밭과도 같아서, 겸허의 마음을 잃지 않게끔 유도한다. 바다는 섬과 섬, 단애와 단애, 무수한 조약돌과 모래와 무명의 것들이 어우러져 하늘과 더불어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시공으로서 경탄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래서 바다는 시인에게 대타자이자 자유의 실체로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바다에서 자유를 감지하고 호흡하고 냄새 맡으며 바다의 부속물이 되고자 한다. 마치 빛의 노예가 되어 주인이 되는 길을 택했듯, 종소리를 들으며 대자연을 호흡했듯, 바다는 자유 그 자체가 된다.
시인은 빛을 갈구하고 바다를 호흡하지만, 그것은 시인의 내적 욕망을 표상하는 다른 이름들에 해당한다. 자유를 지향하는 시인의 욕망은 항아리를 빚는 일과 유사하다. 시인에게 항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흙으로 빚어지는 어떤 물건에 해당하겠지만, 거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엉덩이이자 신체 전부이며, 빛으로 빚어지는 부드러운 감각의 종합이자 욕망의 밑동을 송두리째 흔들어 대는 자극의 실체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항아리를 응시하고 항아리를 빚는 대상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빚는다. 즉, 항아리를 빚는 욕망을 시로 길어 내서는 자신의 욕망의 표정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것이 욕망을 해소하는 시적 투쟁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고별사 두 편은 시인이 자신의 인생을 고독하게 사랑했음을 증언한다. 혼자의 술잔 속에 사랑을 남겨 놓은 채 시인은 이제 가만히 이승의 끈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의 실체인 죽음을 마주한다. 그러므로 이제야 비로소 드러난다. 시인이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던 가객이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빛과 바다와 욕망을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헛헛한 인생의 소유자였음이.
200자평
23세에 등단하고도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첫 시집을 출간한 늦깎이 시인. 그러나 한번 터진 그의 글문은 그동안의 침묵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양 왕성하게 시들을 쏟아 낸다. 1963년 <미8군의 차>로 인해 반공법 위반으로 필화를 겪은 그의 시는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빛에서 시작해 바다를 지나 욕망을 건너 자유를 향해 나아간 가객을 만나 보자.
지은이
정공채는 1934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박두진 시인 추천으로 <종이 운다>, <여진>, <하늘과 아들>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1958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부산일보≫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1959년 <석탄>, <자유>, <행동> 등의 시로 제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다. 1960년 4·19 최초의 항거시 <하늘이여>를 4월 14일자 ≪국제신문≫ 조간 제1면 사설란에 발표한다. 1960년 ≪학원≫, ≪민족일보≫ 기자를 거쳐 MBC 제1기 PD가 된다. 1963년 MBC라디오 ‘전설 따라 삼천 리’를 제1회 방송부터 3개월간 집필한다.
1963년 장시 <미8군의 차>를 ≪현대문학≫에 전재한 뒤 일본 ≪문학≫ 등의 잡지에 번역되어 반미주의자 혐의를 받고 반공법 위반으로 필화의 고통을 겪는다. 1979년 처녀시집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를 상재하고, 이 시집으로 제4회 시문학상을 수상한다. 1981년 역사소설 ≪초한지≫ 3부작을 상재하고, 제2시집 ≪해점≫을 상재한다. 이 시집으로 같은 해 제1회 한국문학협회상을 수상한다. 1986년 제3시집 ≪아리랑≫을 상재한다. 1989년 제4시집 ≪사람소리≫를 상재하고, 1990년 제5시집 ≪땅에 글을 쓰다≫를 상재한다. 1998년 제8회 편운문학상 본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펜클럽 한국 본부 이사를 맡고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에 당선된다. 2000년 제6시집 ≪새로운 우수≫를 상재한다. 2008년 경남 하동 금오영당에 잠들다.
엮은이
오태호는 1970년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태어났다. 1993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1998년 <황석영의 ≪장길산≫ 연구>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과 삶에 대해 더욱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된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2000년부터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비롯한 교양과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되었고 이후 여기저기에 잡문을 쓰고 있다. 2004년에는 <황석영 소설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2005년에는 소설 평론들을 모아 ≪오래된 서사≫를, 2008년에는 시 평론들을 모아 ≪여백의 시학≫을, 2012년에는 소설 평론집 ≪환상통을 앓다≫를 출간하는 등 세 권의 평론집을 상재했다. 2012년 현재 글쓰기 등을 강의하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차례
龍山 거리 1
꽃 層層階
週日마다 犯罪
病院은 흰색이다
꽃은 商船을 몰고
詩는 술이다
바닷가의 體操
鐘이 운다
交流하고 있읍니다
自由와 蜜柑
老人의 항아리
海店
肉身
愛煙頌
바다 그림자
木船
바다 停車場
여름 停車場
自由 한 켤레
바다 모든 하나
빛
항아리
簡易驛
山그늘 2
雨中의 마음
선술집
合唱을 생각합니다
虛空
빛
불빛頌
하늘이여
햇살에 기대어
歸鄕 2
자화상
시간과 감나무
겨울 강을 보면서
숲 속에서
음악
땅에 글을 쓰다
깊은 강
몸뚱아리 하나
그물 깁는 어부
꿈
꽃 그림자에
群像
막차
無名草詩
貧者의 봄
고요한 강
碇泊 中
아침여학교
無常 속에서
樹木頌
外港은 멀리 있고
告別
告別辭
美八軍의 車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오오, 老人
햇빛에 실눈으로 盡終日을 항아리
둥글어서
미끄러질 항아리를 짓는 것은
追憶의 일이다
無心한 時間이야
사흘 걸러 열흘 가도
오오, 老人
항아리 하나를 매만지고 매만지는도다
밝은 낮에 실눈으로 가늠질하고
銀白의 달빛에 둥글게 띄우도다
이윽고 항아리에 꽃 내음이 스며 와도
오오, 老人
옛 계집의 달빛 흐르던 궁둥이
이승의 恨은 모자람인가,
아직도 흙으로만 알고 매만지고 매만짐은
허어, 자네들은 모르네,
지 계집은 지가 아는 일이로세!
●漢學의 할아버지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長竹에서
大廳 높이 올라가던
한 가닥 고운 명주실 같은 滔滔함이
눈부시던
햇빛 맑은 어릴 쩍 그해 가을부터
저놈을 어서 피워야지 했다
豪放한 아버지의
파이프에서
일을 다 마친 뒤
잘도 퉁겨져 나와서도
약간은 不遜하게 모락모락
계속 타오르고 있는 저놈을
끝까지 다 내가 태워 버려야지 했다
누구에게나 歲月이 가던
그런
몇 해가 흘러간 뒤로
할아버지보다 먼저
腦溢血로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유난히 쓸쓸하게 보이던 할아버지의 長竹도
몇 해를 안 가
그 長竹을 거두시고 떠나셨다
이젠 내가 태우는 담배는
적어도 代를 물린 것이다
사내대장부가
손에 꽃이야 들고 있겠는가
더욱이 長時間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앉더라도
남은 빈손에야
꽃쯤으로 알고
이놈을 지긋이 물 수도 있잖은가!
●合唱이 그리운 자리에서
모퉁이에 앉아, 고독을 마신다
누군가 이윽고
조심스레 노래를 先唱했으나
아무도 따라서 부르질 않았다
먹고 떠들고 서로가 잘났을 뿐
노래하는 마음, 노래하는 精誠에
야유만 던졌다
이 사람아, 곡조가 안 좋아!
拍子가 틀렸어! 音色도 나빠!
빈정거림만이 가득했을 뿐
合唱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누가 이 땅에서 노래를 先唱할 것인가,
저 라인 강의 奇蹟
合唱으로 滔滔하고,
저 벚꽃까지도 合唱으로 一齊한데
언제나 合唱이 서러운 나라
아직도 合唱이 안 되는 자리
혼자서는 잘났고
둘이서는 미루고
셋이 되면 한 사람을 따돌리는 낮과 밤에
사랑하는 여자야,
나도 마른나무 빈 가지가 되어
고독을 마신다
合唱이 목마른 싱그러운 자리에서
쓸쓸한 모퉁이에 밀려
고독만 마신다
●…. 小公洞에서 小公洞에서
꽃을 팔지 말아요.
제발 이 거리에서 꽃을 팔지 말아요.
이 時間
美八軍의 바퀴가 뒹굴다 멎는 자리
여러 終點에도
하나같이 公主들이 꽃을 팔리라.
젖은 비가 내리는 雨傘을 파는
東豆川과 富平과 坡州와, 그리고
여기 小公洞에서
公主들 위로 비가 내리고
빛나는 朝鮮호텔의 발그란 窓가에
부드러운 부드러운 비가 내리고
저만치 中國街에서는
阿片빛 香 내음 속에 料理를 판다.
가끔, 가끔, 와서 멎는 美八軍의 車.
壁에 핀 우리 꽃들을 사 갖고 간다.
交代로 드나드는 異國의 나비.
깨끗이 빨래한 寢臺.
悲劇의 눈을 가진 女子가 눕는다.
비를 맞는다.
오래 安定해 있는 寢臺가 아니다.
줄줄이 비를 맞고
흔들리며 航海하는
떠내려가고 있는 꽃.
異國의 나비를 싣고 흘러가는 寢臺.
눈에 悲劇을 흘리우며
오늘 밤도 公主들은 大槪
부끄러운 店鋪를 조그맣게 벌렸다.
제발 이 거리에서는 꽃을 팔지 말아요.
우리의 巡警이 雨傘에게 타이르고 간 뒤
朝鮮호텔의 지붕 위에
韓國의 달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