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르고로드≫에 실린 1835년도 초판 <타라스 불바>는 총 9장에 60쪽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골은 1839년부터 초판을 개작하기 시작해 1842년에 총 12장에 102쪽으로 확장한 개정판을 완성해서 발표했다.
개정판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은 17세기 중엽뿐 아니라 16세기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16세기에 관한 묘사는 1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자는 불바의 집 거실 벽에 장식된 것들을 설명하면서 1596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러시아정교와 가톨릭의 통합 운동인 ‘우니야’에 반대하며 벌어진 전투 상황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즉, 고골은 16세기 말 우크라이나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을 묘사하며 그 당시 생활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스타프와 안드리가 다니는 키예프 신학교는 1631년에 설립된 키예프-모길랸 아카데미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시간적 배경은 17세기 중엽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골 연구자들도 이 작품의 중후반부에서는 16~17세기 카자크인의 삶이 묘사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비평가 세츠카레프는 고골이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작품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에 있었던 폴란드에 대항한 우크라이나 해방운동과 관련한 개별적 사건이나 전투를 뭉뚱그려 일반화했다고 주장한다.
1638년 게트만 오스트라니차는 폴란드에 대항해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하고 처형당한 후, 흐멜니츠키가 자포로제 카자크의 게트만이 되었을 무렵 폴란드에 등록한 카자크인들은 폴란드 지주에 대항해 간간이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무관한 상황에서 1648년 카자크인들은 폴란드와 사회적, 경제적 갈등으로 인해 타타르인들과 연합해 폴란드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자포로제 카자크인들의 게트만은 우크라이나의 통치자로 자리매김을 했고, 모든 주민은 스스로를 카자크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657년 흐멜니츠키가 사망하고 후계자 자리를 두고 카자크인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하면서 폴란드를 선호하는 카자크인들과 러시아를 선호하는 카자크인들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는 폴란드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한목소리로 외치며 갈망했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할 때 고골이 작품에서 주장하는 카자크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종교적 갈등은 허구인 것이다.
주인공 타라스, 오스타프, 그리고 안드리는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작가가 개인적으로 창조한 인물들이다. 특히 5장에 묘사된 자포로제 세치 카자크인들의 잔인한 행동을 묘사한 장면들-유대인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 간난아이를 살육하고 어린아이를 창으로 찔러 불타는 성당으로 던져 넣는 장면, 폴란드 여인의 유방을 도려내고, 폴란드인 다리 껍질을 벗기고 풀어 주는 장면 등-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이런 묘사는 고골의 모든 작품에서 가톨릭교도인 폴란드인, 유대교도인 유대인, 이슬람교도인 터키인, 이교도인 타타르인,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을 악마로 간주하는 자신의 문학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비평가 빅토르 얼리흐도 이 작품에 묘사된 우크라이나는 결코 역사적이거나 사실적이지 않으며, ‘이상화된 환상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즉,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구성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보다는 상상 속의 시공간에 신화적인 영웅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골이 표현한 것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적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 상상력을 동원한 신화 창조를 통해 자신의 최대 관심사였던 러시아정교회 신앙과 슬라브주의 애국심인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스텝, 전형적인 카자크인들의 삶,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이 직품의 주제로는 러시아 땅과 러시아정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타라스의 애국심,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오스타프의 용맹, 그리고 여인의 매혹적인 외모에 이끌려 조국을 배신하고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안드리의 속물성 등을 꼽을 수 있다. 고골은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대부분의 여인을 부정적 혹은 악마적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이름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마치 창세기에서 순수한 아담을 죄악에 빠뜨린 하와처럼, 고골은 대부분의 여성을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원인 제공자로 간주했다. 이 작품에서도 타라스의 아내, 폴란드 사령관의 딸, 그리고 타타르 하녀 역시 이름 없는 익명의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이 책은 러시아의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의 중편소설로,1842년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스텝, 전형적인 카자크인들의 삶,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이 직품의 주제로는 러시아 땅과 러시아정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타라스의 애국심,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오스타프의 용맹, 그리고 여인의 매혹적인 외모에 이끌려 조국을 배신하고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안드리의 속물성 등을 꼽을 수 있다.
고골은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대부분의 여인을 부정적 혹은 악마적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이름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마치 창세기에서 순수한 아담을 죄악에 빠뜨린 하와처럼, 고골은 대부분의 여성을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원인 제공자로 간주했다. 이 작품에서도 타라스의 아내, 폴란드 사령관의 딸, 그리고 타타르 하녀 역시 이름 없는 익명의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지은이
니콜라이 고골은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폴타바의 소로친치 마을에서 1809년 4월 1일 태어났다. 1819년 고골은 폴타바 사립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21년 네진의 김나지움에 입학해 신학, 고전문학,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수학했다. 학창 시절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학내 문학 서클 편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고골은 푸슈킨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예브게니 오네긴≫을 포함한 그의 시를 노트에 옮겨 적기도 했고, 연극에도 관심을 갖고 부친이 썼던 우크라이나 희곡과 프랑스 희곡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828년 11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실리예프카 영지에 잠시 머문 후, 공직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홀로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고골은 1829년부터 내무성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829년 그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쓰기 시작했던 낭만주의풍의 서정시 <이탈리아>와 전원시 <간츠 큐헬가르텐>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비평가들의 혹평을 두려워해 ‘V.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혹평을 받았고, 이에 실망한 고골은 1829년 8월 1일 모든 작품을 회수해 직접 소각하고, 6주간 독일의 류벡과 함부르크를 여행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법무성으로 옮겨 근무하면서 고골은 1830년 <바사브류크 , 혹은 이반 쿠팔라 전야>, <게트만>의 첫 장, 그리고 단편 <여자>를 시인 델비그가 주관하고 있던 ≪문학 신문≫에 기고했다. 이 작품들은 호평을 받았고, 그 결과 고골은 주콥스키와 푸슈킨과 돈독한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1831년 관리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주콥스키의 추천으로 여자 기숙학교 역사 교사로 근무하면서 그해 9월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 1부를, 그리고 이듬해 3월에는 2부를 각각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푸슈킨을 포함한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이로 인해 고골은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집의 출간으로 문학적 명성을 획득한 고골은 1834년에 여자 기숙학교의 역사 교사직을 사임하고,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역사학과 조교수로 근무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 대학생이었던 투르게네프는 고골의 세계사 강의를 수강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고골의 강의가 형편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 고골은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의 3부라고도 불리는 ≪미르고로드≫와 ≪아라베스키≫를 발표했다. 전자는 1832년부터 2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집인데 <옛 기질의 지주>, <타라스 불바>, <비이>, 그리고 <이반 이바노비치와 이반 니키포로비치가 어떻게 싸웠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고골은 ≪미르고로드≫의 제목 밑에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의 속편’이라는 문구를 기입함으로써 네 작품의 주제가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와 연관성이 있으며, 우크라이나를 근거로 한 낭만성과 환상성을 내포한 작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라베스키≫에는 13편의 에세이와 3편의 단편 등 총 1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조각, 미술과 음악>, <중세 시대에 관해>, <세계사에 관해>, <초상화>, <소러시아의 구성에 대해>, <푸슈킨에 대한 몇 마디>, <오늘 날 건축에 대해>, <알-마문>, <인생>, <쉴로저, 뮬러, 그리고 헤르더>, <네프스키 거리>, <우크라이나의 노래>, <지리에 관한 생각>, <폼페이의 최후>, <5세기 말 인류의 이동에 대해>, <광인 일기> 등이다. 1835년 후반부터 고골은 상상을 초월한 악몽을 다룬 단편 <코>, 주인공의 속물성 자체를 서술 전개 방식으로 사용한 단편 <마차>, 약혼녀와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작정하고 연미복을 주문한 주인공이 결혼을 망설이다가 마지막 순간 창문을 뚫고 탈출하는 희곡 <결혼>(마치 평생을 미혼으로 지낸 고골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는 듯한 작품), 그리고 가짜 검찰관의 소동을 다룬 희곡 <검찰관>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835년 12월 18일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원고 집필에 매달린 고골은 이듬해 1월 30일 주콥스키의 저택에서 개최된 파티 석상에서 <검찰관> 대본을 낭독했고, 마침내 3월 초고를 완성했다. <검찰관>은 1836년 4월 19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초연됐다. 공연 직후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상반된 견해가 도출되었다. 전자는 분노하며 ‘중상모략을 담고 있는 5막 연극’이라고 혹평했고, 고골을 ‘파렴치함과 냉소가 넘치는 풋내기 러시아인’이라고 폄하했다. 반면에 후자는 이 작품을 러시아 사회와 관료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규정하고, 고골을 혁신적인 작가로 떠받들며 극찬했다. 그리고 1836년 5월 모스크바의 말르이 극장에서 두 번째 상연되었을 때도 대다수 관객들도 폭소를 터뜨리며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고위 관리에 대한 풍자 작품으로 인식하고 웃음으로 일관하는 관객들의 반응에 실망한 고골은 6월 6일 친구 다닐레프스키와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 후 12년(1836~1848) 동안 고골은 외국에서 집필 활동을 하게 된다. 1836년 10월 스위스 베베이에서 고골은 <죽은 혼> 1부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1837년 겨울 프랑스 파리에서 <죽은 혼> 1부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1839년 겨울에 잠시 러시아로 귀환한 고골은 러시아 문단의 친구들 앞에서 <죽은 혼> 1부의 1장을 낭독했다. 1840년 4월에 고골은 ≪모스크바 신문≫에 “자기 마차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 나와 함께 빈으로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연락 바람. 여행 비용 공동 부담”이라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스위스를 거쳐 1840년 10월에 로마로 돌아온 고골은 러시아 화가들과 사귀면서 창작 활동을 지속했고, <타라스 불바> 개정판과 단편 <외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841년 <검찰관> 개정판과 <죽은 혼> 1부를 완성했고, 1841년 겨울에는 잠시 러시아를 방문해 <초상화> 개정판을 ≪동시대인≫에 발표했으며, 1842년에는 <결혼>, <도박꾼들>, <검찰관> 개정판, <타라스 불바> 개정판, <외투>, 그리고 <죽은 혼> 1부를 발표했다. 고골은 1843년 초부터 <죽은 혼> 2부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육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도 악화되어 5월에 치료 목적으로 독일을 방문했고, 이후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다. 1845년부터 ‘선과 악’의 문제, 그리고 ‘종교와 윤리’의 문제가 고골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고골은 그동안 집필했던 <죽은 혼> 2부를 1845년 7월에 소각했다. 1846년 병세가 심각해지면서 고골은 창작 활동을 거의 중단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는 ≪친구들과의 왕복 서한≫이라는 에세이집을 1847년 1월 발표했다. 고골은 1848년 3월 팔레스타인 성지순례를 하고 4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데사, 바실리예프카 영지, 그리고 수도원 등을 방문하고 10월부터 모스크바에서 <죽은 혼> 2부 집필을 재개했다. 1850년 12월 고골은 주콥스키에게 <죽은 혼> 2부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죽은 혼> 2부를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고 있던 고골은, 1852년 2월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적 인물에 대한 묘사에 큰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 결함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1852년 2월 11일 밤 <죽은 혼> 2부를 소각하고 금식에 들어간 고골은 3월 4일 아침 모스크바 자택에서 사망했다. 고골은 <죽은 혼> 1부를 완성한 직후부터 집필했던 2부를 1843년, 1845년, 그리고 1852년 2월 각각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소각했던 것이다. 고골이 사망하고 소각되지 않은 2부는 초고 1장뿐이다. 문단의 지인들은 고골의 제작 노트에 있는 2부의 단편을 보정해 2장, 3장 그리고 4장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골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855년에 <죽은 혼> 2부 1~4장을 출간했다.
옮긴이
김문황은 1956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서울고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했다. American University 국제지역학 대학원에서 러시아지역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Michigan State University 슬라브어문학 대학원에서 러시아문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니꼴라이 고골 전공)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를 거쳐 충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2008년 한국노어노문학회장 역임했다.
차례
타라스 불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들아, 왜 너의 폴란드 놈들이 너를 도와주었냐?”
안드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팔아먹었느냐? 신앙을 팔아먹었느냐? 자신의 동료들을 팔아먹었느냐? 당장, 말에서 내려라!”
그는 어린애처럼 순순히 말에서 내려, 타라스 앞에 죽은 듯이 멈춰 섰다.
“가만히 서 있어라. 움직이지 마라! 내가 너를 낳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죽이겠다!” 타라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어깨에 멘 총을 끌어내려 손에 잡았다.
안드리의 얼굴은 아마포같이 창백해졌다. 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더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국의 이름도 아니고, 어머니의 이름도 아니고, 형제들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폴란드 여인의 이름이었다. 타라스는 총을 발사했다.
마치 낫에 베인 곡물의 이삭처럼, 그리고 심장 밑에 치명상을 입은 어린 양처럼, 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 한마디 말도 못하고 풀밭에 쓰러졌다.
―198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