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태평한화골계전≫은 서거정이 지은 소화집(笑話集)이다. 오늘날의 창작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이런저런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억나는 대로 기록한 것이다. 국문학사상 현전하는 최초의 대규모 순수 설화 자료집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서거정은 ≪태평한화골계전≫ 서문에서 이 책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해 “일찍이 일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있을 때 글을 쓰는 것으로 놀이를 삼았다. 이에 일찍이 친구들과 우스갯소리 했던 바를 써서 ≪골계전(滑稽傳)≫이라 불렀다”라고 했다. 서거정은 이 책을 쓰는 일이 자신의 명성에 손상을 줄 수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이 책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 나름의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에도 삶의 진실과 지혜가 들어 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은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책은 성종 8년(1477)에 지어져서 성종 13년(1482)경에 간행되었는데, 강희맹(姜希孟)의 <골계전 서(滑稽傳敍)>에 의하면 본래 4권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 원본이 전하지 않아서 완전한 모습은 알 수 없다.
현재 전하는 이본은 모두 5종이다. 고려대학교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본[만송본(晩松本)],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영남대학교 도서관 도남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일사(一簑) 방종현(方鍾鉉) 선생 구장본(舊藏本)을 등사한 프린트본[일사본(一簑本)], 민속학자료간행회(民俗學資料刊行會)에서 간행한 ≪고금소총(古今笑叢)≫ 속 프린트본[민자본(民資本)], 일본 덴리(天理)대학교 이마니시문고(今西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선생 구장본의 필사본[순암본(順庵本)],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백영본(白影本)]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이본들은 ≪태평한화골계전≫ 전 4권의 완질본이 아니라, 그중 일부의 내용들만 남아 있는 것들이다. 즉, 일사본과 민자본은 제1권과 제2권의 내용만을 담고 있고, 만송본은 제1권과 제2권의 내용 중 앞뒤의 몇 장씩이 떨어져 나간 낙장본(落張本)이다. 순암본과 백영본은 전 4권 중 일부를 임의로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이 5종의 이본들은 권차(卷次)가 있고 제1권과 제2권의 내용만을 담고 있는 만송본·일사본·민자본과, 권차가 없고 4권 전체에서 발췌한 순암본·백영본의 두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만송본·일사본·민자본 계열은 화순(話順)과 자구(字句)에 얼마간의 넘나듦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계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거기에 실려 있는 이야기도 기본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만송본은 후반부가 낙장되었기 때문에 일사본·민자본에 실려 있는 이야기 가운데 뒷부분에 있던 이야기들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순암본과 백영본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저본이 된 것이 아니라, 원본을 각각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실린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서로 다른 것도 있고, 한쪽에 있는 것이 다른 쪽에는 없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만송본·일사본·민자본을 통해서 원본 ≪태평한화골계전≫ 제1권과 제2권의 재구는 가능하다. 그러나 제3권과 제4권은 순암본과 백영본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재구만 가능할 뿐 그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5종의 이본에 실려 있는 이야기 중 중복된 것을 하나로 계산하면 모두 267화다. 5종의 이본들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전 유일의 목판본인 만송본에는 134화(話)가 실려 있다. 일사본에는 146화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민자본은 일사본을 저본으로 해 필사자가 약간의 첨삭을 가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화수(話數)는 역시 146화다. 순암본은 187화로 되어 있는데 만송본·일사본·민자본 계열에 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가 96화 있다. 백영본은 113화로 되어 있는데 다른 이본들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가 25화 있다. 따라서 제1권과 제2권에 실린 이야기가 146화고, 나머지 121화는 제3권과 제4권에 실려 있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현재 전하지 않고 있는 ≪태평한화골계전≫ 제3권과 제4권에 실린 이야기의 수가 제1권과 제2권에 실린 이야기의 수인 146화와 같았다면, 현재 20화 정도의 이야기가 전하지 않는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단순 비교일 뿐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본은 아니지만 ≪태평한화골계전≫과 관계있는 다른 자료로는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화(東人詩話)≫,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이 있다. 특히 ≪해동잡록≫은 62화에 달하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고, 믿을 만한 저본을 바탕으로 첨삭·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으며, ≪태평한화골계전≫의 이본들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은 이야기가 4화나 들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해동잡록≫에 ≪태평한화골계전≫이 출전이라고 밝혀져 있는 4화가 더 있기 때문에, 현재 재구가 가능한 ≪태평한화골계전≫의 총화수는 271화가 된다. 현재 재구가 가능한 271화가 원본 ≪태평한화골계전≫ 전 4권에 실렸던 이야기의 전부일 수 있고, 어쩌면 현재 전하지 않는 이야기의 수가 20화를 상당히 상회하는 숫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에는 총 271화의 이야기 중 110화를 가리고 번다한 주석들을 과감하게 생략해서, 독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200자평
서거정의 소화집으로, 한국에 현전하는 최초의 순수 설화집이다. 서거정은 떠도는 우스갯소리도 삶의 진실과 지혜가 들어 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었다. 이 책에 다섯 종의 이본을 원전으로 삼아 교합해서 이야기를 모으고 그중 재미있는 이야기 110편을 선별해 실었다. 조선 초기 식자층들이 즐겼던 재미와 여유가 깃든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지은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다. 자(字)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인데 흔히는 사가(四佳)라고 한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태어난 곳은 대구며, 목사(牧使) 미성(彌性)의 아들이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자다. 당대 제일의 관료적 문인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문학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조선 전기문학을 집대성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연결해 이해할 때에 조선 건국의 이념을 문학적으로 충실히 뒷받침하고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전기에 관료적 문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 영예를 누린 것이 서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5세 되던 해인 세종 26년(144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집현전 박사·부수찬·응교 등을 역임했다. 세조 2년(1456)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했다. 공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이조참의가 되어 세조 6년(1460)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를 논해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서 또 장원했다. 그 후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성종 1년(1470) 좌찬성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여섯 임금을 섬겨 45년간 벼슬길에 있었으며, 20여 년간이나 문형(文衡)을 장악하고 20여 차례나 전형(銓衡)을 담당해 많은 인재를 뽑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세조 때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동국통감(東國通鑑)≫, 성종 때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성종의 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한편 시화집인 ≪동인시화≫를 저술했고, 신라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한문학을 집대성해 ≪동문선(東文選)≫을 남겼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옮긴이
1952년 경상남도 거제군(巨濟郡) 장승포읍(長承浦邑)에서 태어났다. 거제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과정을 밟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구비문학회 회장을 지냈고 울산시문화상과 지훈상(국학 부문)을 받았다. 2011년 현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겸 교학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安城巫歌≫(공저), ≪譯註 丙子日記≫(공저), ≪東海岸 별신굿 巫歌)≫(1∼5권), ≪한국의 별신굿 巫歌≫(1∼12권), ≪대교·역주 태평한화골계전(1∼2권)≫, ≪고등학교 문학≫(공저), ≪敍事巫歌≫(1∼2권, 공저), ≪徐居正 文學의 종합적 검토≫(공저), ≪중학교 국어≫(1∼3학년, 공저) 등 60여 권의 저서와, <巫歌의 作詩原理에 對한 現場論的 硏究>(박사 학위논문), <巫俗祭儀의 측면에서 본 변강쇠가> 등 4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차례
돼지가 삼킨 폭포
술버릇 고치기
논어(論語) 책거리
“좌객(座客)”의 유래
관찰사가 되고 싶어서
대머리가 된 까닭
수염의 득실(得失)
단술도 술이지만 취하지 않는다
살고 싶은 이유
내 말이 암말이던가?
엉뚱하게 장가든 아전
방귀 잘 뀌는 관리
닭을 빌려 타고 가지
송아지는 다리가 있어
두 번은 안 돼
내시가 아들 낳는 법
엉뚱한 처방
천하를 잃을 자
누가 더 무식한가?
장기를 좋아하는 원님
너의 이를 찾아가라
당대 문장이 날 자리
명지(名紙)를 잃어버린 서생
장자와 왕희지도 여자를 좋아했던가?
너의 수염 값은 얼마니?
내 집 문짝도 넘어지려 한다
달걀 손님과 게젓 중
내가 죽으면 장군이 있다
장님의 지혜
그놈은 누구였나?
상피(相避)와 추봉(追封)
경진(庚辰) 무과(武科) 합격자
이 놀음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야
사돈이 되기에는 큰 흠
화려한 벼슬 경력
쥐똥을 던졌다가 개똥을 받다
무관(武官)의 글 읽는 법
순진한 위사(衛士) 용순우(龍順雨)
생각대로 들린다
기생들을 속인 늙은 선비
골리국에 태어났더라면
나이를 속인 것은
쌍 삼십(雙三十) 단오(單五) 선생
고집부릴 걸 부려야
꾸어 준 수명 35년
시집갈 날 애타게 기다리기
대동강 가의 이별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
기생의 남자 평가법
호랑이 앞에서 고기를 구걸하다
눈썹으로 허락하십시오
파자 놀이
시 잘 짓는 사위
원님의 욕심
현후서(賢後署)
세 애꾸눈이의 노래
흰떡과 김치
부인이 법을 만들어 보시겠소?
부부의 조화
배우의 빈 가마니
세 가지 두려운 일
명함 위의 풀가루는 돌려주고 가시오
바둑에 미친 사람
그대도 지겠구만
아내에게 허락받아 얻은 첩
병역(兵役) 면제책
도적 쫓은 옥편
스님의 파자하기
쇠 쌀과 구리 장
암만두와 수만두
계집종을 범하는 여덟 단계
호랑이에 놀라 까무러친 삼막사의 새끼 고양이
무사(武士) 아내의 걱정
이 병이 죽 먹어 될 병인가?
첩을 두려워한 상림(上林) 서리(書吏)
곰 털 소동(疏同)의 사용처
할미의 계책
천하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 선비
아이가 이 정도니
비유의 방법
글재주와 정치의 차이
처녀라도 정(情)만 나눌 수 있다면 좋다
단속사(斷俗寺) 주지(住持)가 되는 법
볶은 채소 씨도 싹이 나느냐?
비방(秘方)을 전할 수 없는 이유
회초리로 맞아 보니
제 멋에 산다
아내가 가지 말라고 해서
어미와 다를 수도
잠을 청하는 데는 책이 제일
부처님보다 나은 주지
우연의 일치인가?
정신이 혼미해진 박을손(朴乙孫)
가짜 호랑이 때문에 팔 부러뜨린 한봉련(韓鳳連)
남녀 관계는 음식과 같은 것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은혜
제 속이 검으니
소금 부대로 만든 속옷
벼락쯤이야
왕륜사(王輪寺)의 중 내쫓기
자식은 없어도 걱정, 많아도 걱정
중국인의 성(姓)과 이름
최양선(崔揚善)의 말재주
시 지은 장소를 아는 법
부부싸움의 끝
타고난 나이를 마치고 싶다
눈치 빠른 늙은 종
과거에 떨어진 이유
소를 타는 이유
곰 발바닥을 먹지 않는 이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또한 순우에게 종이 있었는데 이름이 엄철(嚴哲)이었다.
하루는 임금님이 탄 수레가 궁에서 나가려 해 밖에서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는데, 순우가 갑옷을 입고 궁문 밖으로 나가면서 큰 소리로 “엄철아!” 하고 불렀더니, 북을 관장하는 사람이 엄고(嚴鼓)를 치라고 재촉하는 것으로 알고는 엄고를 쳤다. 병조(兵曹)에서 붙들어다가 신문했더니, 북을 관장하는 사람이 “순우가 북을 치라고 외쳤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순우에게 물었더니 순우가 “제 종인 엄철을 부른 것이지, 북을 세게 치라고 재촉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대개 ‘철(哲)아!’와 ‘쳐라[打]!’가 우리말로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