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운명적인 사랑으로 인한 죽음을 다룬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892)는 단순하게 보면 남편-아내-정부(情夫)라는 삼각관계로 이루어진 치정극(drame passionnel)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구도는 마테를링크라는 작가의 손에 의해 신비의 색채를 띠게 되고 운명이 그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모호함으로 가득 찬 극으로 변하게 된다. 극의 모호함은 주인공들의 성격, 풍부한 상징에서 온다. 가령 성을 둘러싸고 있는 짙은 숲,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 태풍에 쓰러져 꿈쩍도 하지 않는 나무, 이뇰드가 들어 올리지 못하는 바위, 멜리장드가 샘에 빠뜨리는 결혼반지, 그리고 반지가 물에 빠지는 순간 들려오는 정오의 종소리 등은 앞으로 닥칠 어두운 운명을 암시한다. 이외에도 샘(fontaine)과 문, 빛과 어둠의 상징 등이 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죽음은 어찌할 수 없이 운명의 덫에 빠지게 되는 인간의 비극을 대변한다. 골로가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고 멜리장드를 만난 것처럼 등장인물들은 인생이라는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운명의 손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인식은 늙은 왕 아르켈이, “나는 결코 운명에 반대한 적이 없어”라든가 “나는 단지 곧 무슨 일이 닥칠지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부탁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살아오면서 획득한 지혜란 결국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는 대로 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겉으로 보이는 갈등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과 그것으로 인한 죽음이지만,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독자나 관객은 그저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은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꿈꾸게 하는 연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자평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침묵과 죽음, 불안의 극작가’로 불린다. 마테를링크의 초기작. 운명적인 사랑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뻔한 스토리는 마테를링크의 손에 의해 신비의 색채를 띤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 그리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느끼게 하는 그의 극은 후대의 초현실주의자들과 특히 베케트의 부조리극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은이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침묵과 죽음 및 불안의 극작가로 불리기도 한다.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으로 겐트의 자연 속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불어가 모국어였고 가정교사에게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8살 때 셰익스피어를 접했다. 하지만 이후 7년 동안의 생트 바르브(Sainte-Barbe) 기숙학교 생활은 그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며 그곳에서 발견한 신은 사랑의 신이 아니라 공포로 군림하는 독재자였다. 반면 그곳에서 르 루아(G. Le Roy), 반 레르베르크(Ch. Van Lerberghe), 로덴바흐(G. Rodenbach) 등의 친구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베르아랑(E. Verhaeren) 역시 이 학교 출신이다. 생트 바르브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으나 글쓰기를 계속했고, 당시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실었던 ≪젊은 벨기에(La Jeune Belgique)≫에 시를 기고하기도 했다. 마테를링크가 변호사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로 접어든 것은 몇 달 동안의 파리 체류(1885년 가을∼1886년 봄)와 그곳에서 만난 빌리에 드 릴라당(Villiers de l’IsleAdam)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빌리에와의 만남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자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빌리에를 통해 마테를링크는 신비(le mystérieux)와 운명(le fatal)과 저세상(l’au-delà)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말렌 공주·멜리장드·아스톨렌 같은 인물들은 빌리에와의 만남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시기에 그는 14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신비주의자 뤼스브루크(Ruysbroeck)를 발견했고 또 독일 낭만주의 시인이자 상징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노발리스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 후에 이들의 작품을 번역하게 된다. 1886년 3월 마테를링크는 파리에서 만난 젊은 시인들과 잡지 ≪라 플레이아드(La Pléiade)≫를 창간했고 여기에 자신의 첫 산문 작품인 <무고한 자들의 학살(Le Massacre des Innocents)>(1886년 5월)을 발표한다. 이것은 플랑드르 출신 화가인 브뢰겔(Breughel)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는 또 파리에 체류하며 쓴 일련의 시를 모아 ≪온실(Serres chaudes)≫(1889)을 발표하는데 마테를링크는 이 시집이 베를렌, 랭보, 라포르그, 휘트먼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어 그의 첫 희곡 <말렌 공주(La Princesse Maleine)>(1889)를 발표했으며 셰익스피어, 포, 반 레르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옥타브 미르보의 ≪피가로≫ 기사를 통해 유명해진다. 1896년에는 수필집 ≪빈자의 보물(Le Trésor des humbles)≫을 발표했고, 1908년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한 <파랑새(L’Oiseau bleu)> 공연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어 1911년 노벨상을 수상해 그의 작품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옮긴이
이용복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강사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모리스 메테르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파랑새≫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로제 비트락의 극작품에 나타나는 비구술 언어에 대한 연구>, <주네의 ‘발코니’에 나타나는 이미지에 대한 연구>, <샤를 페기의 ‘잔 다르크’에 나타나는 잔 다르크 이미지>, <자크 오디베르티의 ‘동정녀’ 연구-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현실과 허구> 등 다수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86쪽
펠레아스 : 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어떤 것 주위에서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했어. 난 꿈속에서 운명의 덫 주변에서 놀랐던 거야. 갑자기 누가 날 깨웠지? 난 불이 난 자기 집에서 달아나는 장님처럼 기쁨과 고통으로 소리 지르면서 달아날 거야. 난 그녀에게 달아날 거라고 말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