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한설야는 식민지 시기 유일한 노동장편소설인 ≪황혼≫의 작가이자 카프의 수장 격인 임화에게 “그 양식에 있어서만 아니라 실로 그 정신에 있어서도 분명히 새 시대의 문학”이라는 극찬을 받은 <과도기>의 작가다. 그러나 그는 작가 생활 내내 평론을 함께 창작했으며, 그 성과 역시 소설에 못지않게 매우 뛰어나다. 특히 그의 평론은 ‘조선적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한 전범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설야의 본격적인 평론 활동은 1927년 카프에 가입하면서 시작된다. 1927년부터 신건설사 사건으로 전주 감옥에 수감되기까지 그는 비평과 창작 양면에 걸쳐 프로문학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했다. 특히 1927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무산문예가의 입장에서 김화산 군의 허구문예론, 관념적 당위론을 박함>은 아나키스트와 벌인 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아나키스트 김화산의 예술적 입장을 가혹할 정도로 매섭게 비판하며 “맑스주의 방법 이외에 사회주의를 과학적으로 건설한 방법은 이때까지 현실에 생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한설야는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 <사실주의 비판−작품 제작에 관한 논강>, <변증법적 사실주의의 길로>, <이북명 군을 논함> 등의 평론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바탕한 리얼리즘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한 1930년대 후반은 한국문학사에서 일종의 전형기였다. 이 시기 한설야는 <조선문학의 새 방향>과 <기교주의의 검토−문단의 동향과 관련시키어>를 내놓았다. 이 글들에서 당시의 문단이 침체와 혼란을 겪고 있다고 진단하며, 낭만 정신 추구와 사회 일반의 생활 기준 상실에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한설야는 북한의 문학 정책과 이론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북한 문학의 기초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 창작에서도 북한에서 창작될 작품들의 전범을 제공했다. 이 시기 한설야의 비평 활동은 매우 활발해지는데, 그는 단순한 문인을 넘어서서 북한 문화계의 실력 있는 이데올로그로서 활동했다.
200자평
식민지 시기 유일한 노동장편소설인 ≪황혼≫과 임화에게 극찬을 받은 <과도기>를 쓴 한설야. 그는 소설가인 동시에 평론가였다. 그의 평론은 ‘조선적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전범을 보였다.
지은이
한설야(韓雪野)는 1900년 8월 3일 함흥 지역 한씨 집성촌인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하구리 503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직연은 청주 한씨 안양공파 31대손이며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의 문하생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고, 1918년 함흥고보로 전학했다. 1919년 함흥법전에 진학했지만 같은 해 동맹휴교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제명당한다. 1920년부터 1년 남짓 베이징의 이즈(益智)영어학교에서 사회과학을 수학했으며, 중국 육군성 조선인 관리의 집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1921년 귀국한 후 북청 학습강습소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시 <부벽누에셔>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정식으로 등단할 때까지 10여 편의 창작시, 번역시, 소개문, 추도문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의 니혼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며 사회과학 공부와 문학작품 습작에 열중하던 중 관동대지진이 나자 대학을 휴학하고 가을에 귀국했다. 1924년 북청에 있는 대성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북청자전거운동회사건’을 계기로 북청을 떠나게 된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그날 밤>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한다. 1926년 봄에 부친이 타계하자, 중국 동북 지방의 대표적인 탄광 지대인 푸순(撫順)으로 이주한다. 이 시기에도 문학평론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데 전념하며 창작을 지속했다.
1927년 1월에 귀국한 후 카프에 가입한다. 가입과 동시에 아나키즘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김화산을 강력 비판한다. 제3전선파의 이북만과도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이후에도 여러 편의 문예학 및 사회과학 원론들을 발표한다. 1928년 문예운동의 방향 전환과 관련하여 박영희 등의 카프 지도부를 비판하는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를 발표한다. 이후 카프 내의 논쟁에서 패배한 후 낙향하여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한다. 이 논쟁을 통해 한설야는 계급문학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옹호자라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29년 여름에는 압록강과 백두산 일대의 국경 지방을 여행하기도 한다. 1930년 경성에 올라와 조선지광사에 입사하고, ≪신계단≫, ≪대조≫, ≪조선지광≫ 등의 편집에 관여한다. 193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고, 간도에 특파돼 공산당의 경찰서 습격 사건인 ‘팔도구 습격 사건’을 취재하기도 한다. 1934년 신건설사 사건(카프 제2차 사건) 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영어 생활을 한다. 1935년 12월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함흥으로 귀향한 후, 동명극장과 인쇄소를 동시에 경영한다. 1940년 6월경에 베이징을 두 번째로 방문한다. 1943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를 받고 문석준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된다. 1944년 5월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자전적 장편소설 ≪해바라기≫를 집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5년 9월 이기영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12월 10일 분열된 문학계의 통합 논의를 위해 상경하여 아서원 좌담회와 봉황각 좌담회에 참여한다. 서울에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는 것을 보고 12월 말에 북한으로 귀환한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당시 문인 중에서 가장 발빠르게 김일성 형상화에 착수했다. 1947년 7월부터 9월까지 소련을 여행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이듬해 ≪쏘련 여행기≫를 발간했다. 1949년 4월 ‘평화 옹호세계대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하여, 세계적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51년 어머니가 타계했고, 1953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월북 문인의 숙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1940년대 후반부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상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력사≫로 인민상을 수상했고, 한설야 선집이 15권 계획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1962년 김창만 등이 주축이 된 김일성 세력은 한설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2월 10일 당 4기 4차 전원회의에서 숙청이 결정되었다. 1963년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강도 시중군의 협동농장으로 쫓겨났다가 1976년 별세했다.
엮은이
이경재는 1976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아주대, 서울대, 중앙대, 홍익대, 인하대, 세종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2011년부터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바다를 건너는 두 가지 방식>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금까지 평론집으로는 ≪단독성의 박물관≫(문학동네, 2009),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실천문학사, 2012), ≪현장에서 바라본 문학의 의미≫(소명출판사, 2013), ≪여시아독≫(푸른사상사, 2014) 등을, 학술서로는 ≪한설야와 이데올로기의 서사학≫(소명출판사, 2010), ≪한국 현대소설의 환상과 욕망≫(보고사, 2010), ≪한국 프로문학 연구≫(지식과교양, 2012) 등을 출판했다.
차례
無産 文藝家의 立場에서 金華山 君의 虛構文藝論−觀念的 當爲論을 駁함
文藝運動의 實踐的 根據
寫實主義 批判−作品 製作에 關한 論綱
李北鳴 君을 論함−그 외 作品에 對하야
抱石과 民村과 나
朝鮮 文學의 새 方向
技巧主義의 檢討−文壇의 動向과 關聯시키어
전후 조선 문학의 현 상태와 전망−제二차 조선 작가 대회에서 한 한설야 위원장의 보고
전국 작가 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한설야 위원장의 보고
해설
한설야는
엮은이 이경재는
책속으로
經濟 關係를 土臺로 하야 가지고 觀念 形態가 成立되는 것과 觀念 形態, 即 上部 組織의 變化는 土臺, 即 經濟 關係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함으로 社會의 根本的 ××은 即 今日의 無産階級 運動의 歸着은 맑스主義的 見地에서 經濟 關係를 根本的으로 變革식히는 데 잇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 돌[石] 하나를 수 업는 完全한 思想的 建築이다. 맑스主義 方法 以外에 社會主義를 科學的으로 建設한 方法은 이지 現實에 생기지 안엇다. 함으로 우리는 忌憚업시 ‘맑스주의로 모으라’ 하는 것이니 君의 流産兒가 成長할 길은 어데 잇느냐?
―<無産 文藝家의 立場에서 金華山 君의 虛構文藝論>
人間에게 잇서서 文學者에게 잇서서 가장 미덤직한 同伴者는 歷史요 現實이다. 歷史와 現實은 眞實로 生을 求하고 活路를 찾는 사람에게 비록 一時의 不運과 痛苦는 줄지언정 永遠한 死滅은 주지 안는다.
―<技巧主義의 檢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