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진 상업 활동과 신대륙 탐험 열풍과 과학적 발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존 던(1572∼1631), 허버트, 앤드루 마블(1621∼1678) 등의 ‘형이상학파’ 시인들은 이전 시대의 인습적인 주제와 상투적인 비유·이미지·형식에서 벗어나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경험들과 사물들을 연결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 기발한 비유와 이미지, 활기찬 구어 리듬, 간결하고 압축적인 구문 등을 즐겨 활용했다. 위트와 진지성이 공존하는 이 ‘통합된 감수성’의 시는 T. S. 엘리엇을 비롯한 현대 시인들과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재평가되면서 영국 시의 중요한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실제로 효율적으로 활용된 폭넓은 지식과 광범한 정서적 스펙트럼, 적확한 어법, 다양한 연 형식과 리듬, 다채롭고 참신한 비유, 짜임새 있는 엄밀한 구성 등 허버트의 대부분의 시편들에서 확인되는 고도의 의식적인 기교는 그가 던의 뒤를 잇는 독창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임을 입증한다.
그렇지만 허버트의 시는 선배인 던의 재기 넘치는 박식한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외관상 평이하고 소박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 엘리엇이 지적하듯, ‘온화한 이미저리’가 특징인 그의 시는 던의 시처럼 지성과 사색이 감수성과 느낌을 지배하거나 통어하지 않고, 오히려 감성과 느낌이 지성과 사색을 지배하거나 통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허버트 자신의 영적 갈등과 고뇌는 한결 더 친밀한 어조를 통해 독자에게 실감 나게 다가온다. 그의 시편들은 신자들을 위한 단순한 종교적 명상의 지침서라기보다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자 갈망하고 또 고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를 뚜렷하게 인식했던 한 섬세한 영혼의 정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허버트의 시는 당대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우의 화첩(寓意畵帖, emblem book)의 전통도 활용하고 있다.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개념을 사색하고 파악하기 위한 시각적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우의화는 제사, 상징적 그림, 해설로 이루어지는데, 허버트의 여러 시편들은 우의화에서 즐겨 다루는 중요 개념들인 허영·변덕·죽음·미덕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단> <부활절 날개> 등의 시편은 시 본문이 의미하거나 시사하는 사물을 좀 더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형상시(pattern poem)’의 전통을 발전시킨 빼어난 시편들이다.
허버트가 자신의 여러 시편들에서 밝히고 있듯, ≪성전≫의 시편들은 관례적인 시 스타일을 배격하는 ‘성서적 시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 시집 전체를 일관하는 기본적인 은유는 하느님의 성전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영혼이다. 허버트가 상상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우주에서 인간의 영혼은 지상에서 출발해 영적 갈등과 고뇌의 공간을 거쳐 하느님과 하나 됨에 이르는 여정을 경험한다. 한 시골 교회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오르간과 성가대의 음악에 귀 기울이며 영국 국교에서 강조하는 중도의 길을 묵묵히 실천했던 허버트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신선함을 잃지 않은 많은 시편들을 통해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지혜의 참된 목소리를 차분하게 들려주고 있다.
200자평
조지 허버트는 존 던의 뒤를 이은 영국 형이상학파 시인이자 영국 국교회 성직자다. 존 던의 재기 넘치는 박식한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시는 외관상 평이하고 소박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 엘리엇이 지적하듯, ‘온화한 이미저리’가 특징인 그의 시는 감성과 느낌이 지성과 사색을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적 갈등과 고뇌는 한결 더 친밀한 어조를 통해 독자에게 실감 나게 다가온다.
지은이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는 1593년 4월 3일 영국 웨일스의 몽고메리 성에서 태어났다. 10명의 자녀를 둔 리처드 허버트와 맥덜린의 다섯째 아들이었고, 펨브로크 백작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조지 허버트가 3세 때 세상을 떠났고, 이후 그의 교육은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어머니가 맡았다. 슈롭셔의 아이턴과 옥스퍼드를 거쳐 1601년 허버트 가족은 런던의 채링크로스 구에 정착했다. 이 시기에 허버트의 어머니는 존 던을 비롯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종종 만찬에 그들을 초대했고, 허버트는 일찍부터 문학과 음악과 무용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허버트는 유서 깊은 런던의 교육 기관인 웨스트민스터교에서 그리스어·라틴어·음악 등을 공부했고, 류트와 비올라 연주에 특히 재능을 보였다. 이 시기 후반에 그의 어머니는 자신보다 훨씬 연하인 존 댄버스 경과 재혼했는데, 허버트는 계부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 때인 1609년 5월에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로 진학한 그는 이듬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시적 능력은 베누스 여신에게 바쳐지는 숱한 연애시가 아니라 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서약을 입증할 소네트 2편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대학 시절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612년에 학사, 161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트리니티칼리지의 펠로로 선임된 그는 튜터로 임명되어 여러 학생들을 지도했고, 1618년에 수사학 강사로 임명되어 고전 시대 저자들에 대해 강의했다. 1619년에 부대표 연사로 임명된 그는 이듬해 대표 연사(Public Orator)가 되었다. 대표 연사로서 그는 대학의 공식 서한들을 작성했고, 대학이 왕족을 비롯한 중요한 방문객들과 후원자들에게 적절한 기회에 행하는 공식 연설의 책임을 맡았다. 이 케임브리지 시절에 허버트는 라틴어 시편들을 꽤 많이 썼고, 사후 발간될 ≪성전(The Temple)≫(1633)에 수록된 여러 영어 시편들의 초고들을 썼다.
허버트가 좀 더 열렬히 세속적 야망을 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고난(Affliction) (1)>에서 기술하듯 그가 영적 헌신과 세속적 야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음은 분명하다. 허버트가 사제가 되겠다는 타고난 소명 의식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트리니티칼리지의 펠로는 대개 졸업한 지 7년 후 영국 국교 성직자가 되었다. 1616년에 대학을 졸업한 허버트로서는 1623년에 서임되는 게 정상이었다. 1625년 봄에 제임스 1세가 사망했고, 여름에 런던에서 역병이 발생했다. 허버트는 1626년에야 사제직에 이르는 첫 단계인 부제가 되었고, 그렇게 영국 국교의 성직자의 길에 투신했다. 그는 링컨 대성당의 평의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사무국은 그를 교구 업무에 관여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숙소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 후 4년이 지난 1630년에 비로소 사제가 되었는데, 그때에도 솔즈베리 근처의 베머튼 성직록을 얻은 지 5∼6개월 후에야 서임되었다. 이 무렵 허버트는 자신이 성직에 적합한지에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 허버트처럼 좋은 가문 출신의 사람이 사제가 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허버트는 1627년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대표 연사직을 유지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해 세상을 떠났고, 그는 상속받은 유산으로 1629년 결혼할 수 있었다. 아내는 그의 계부의 사촌인 제인 댄버스였다. 허버트 부부는 윌트셔의 베인튼코트에 있는 처가에서 함께 살았고, 이듬해 그가 서임된 후 베머튼의 성직록 사제관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고, 고아가 된 조카딸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펨브로크 백작의 소속 사제 역을 맡았다. 그는 사제로서의 삶에 만족하면서 성직을 수행했고, 시집 ≪성전≫과 산문 저작인 ≪성전의 사제≫를 완성했다. 그렇지만 이 무렵 그동안 썩 좋지는 않았던 그의 건강은 악화하고 있었다. 폐결핵을 앓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 리틀기딩의 작은 수도원 공동체 수장이던 벗 니콜라스 페라에게 시집 ≪성전≫의 원고를 건네면서 “이 시편들에서 내가 나 자신의 뜻을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 뜻에 복종시킬 수 있기 전에 하느님과 내 영혼 사이에 일어났던 숱한 영적 갈등들의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그분을 섬기면서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고는 그 원고가 “낙담한 가엾은 영혼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발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태워 버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서임된 지 3년 후인 1633년 3월 3일, 40세가 채 안 된 그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베머튼의 세인트앤드루 성당의 제단 아래 묻혔다.
옮긴이
윤준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1990)를 취득했으며, 1985년부터 현재까지 배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영문과에서 풀브라이트 방문학자(1992∼1993)로 연구했고, 한국현대영어영문학회 제1회 우수논문상(2005)을 수상했으며, 한국현대영미시학회장(2011∼2012)과 한국현대영어영문학회장(2011∼2013)으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 ≪콜리지의 시 연구≫(2001), 옮긴 책으로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1983), ≪거상−실비아 플라스 시선≫(공역, 1986), ≪영문학사(제4개정판)≫(공역, 1992),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공동 영역, 1996), ≪티베트 원정기≫(공역, 2006), ≪영미시의 길잡이≫(2007), ≪티베트 순례자≫(공역, 2007), ≪영문학의 길잡이≫(2008), ≪마지막 탐험가−스벤 헤딘 자서전≫(공역, 2010), ≪콜리지 시선≫(2012), ≪워즈워스 시선≫(2014), ≪영국 대표시선집≫(2016)이 있다.
차례
제단(The Altar)
고뇌(The Agony)
구속(Redemption)
부활절(Easter)
부활절 날개(Easter-Wings)
죄(Sin) (1)
괴로움(Affliction) (1)
기도(Prayer) (1)
요르단강(Jordan) (1)
교회 기념묘(紀念墓)들(Church-Monuments)
교회 마루(The Church-Floor)
창문들(The Windows)
만족(Content)
한결같은 태도(Constancy)
거부(Denial)
세상(The World)
허영(Vanity) (1)
미덕(Virtue)
진주(The Pearl)
인간(Man)
생명(Life)
굴욕(Mortification)
요르단강(Jordan) (2)
본향(Home)
시간(Time)
평화(Peace)
고백(Confession)
변덕(Giddiness)
포도송이(The Bunch of Grapes)
알 수 없는 사랑(Love Unknown)
신학(Divinity)
순례(The Pilgrimage)
꺾쇠(The Holdfast)
굴레(The Collar)
도르래(The Pulley)
꽃(The Flower)
망령(Dotage)
아들(The Son)
전령들(The Forerunners)
훈육(Discipline)
화관(A Wreath)
죽음(Death)
사랑(Love) (3)
부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요르단강 (2)
맨 처음 내 시행들이 천상의 기쁨에 대해 말할 때,
그 비길 데 없는 기쁨의 광채가 너무 눈부셔서
나는 별난 단어와 지어낸 깔끔한 표현만 찾았다.
내 시상(詩想)은 펼쳐지고 싹트고 부풀기 시작하더니,
소박한 의도를 은유들로 둥글게 감고
마치 팔 것처럼 의미를 치장했다.
내가 미처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면 오만 가지 상념이
내 머릿속을 달리며 돕겠다고 나섰다.
이미 써 둔 것도 종종 지우곤 했다
이건 활기가 좀 부족하고, 저건 죽은 표현이라서.
그 어떤 것도 해의 옷이 될 만큼 화려하진 않은 듯했다.
하물며 해의 머리를 짓밟는 저 기쁨이야 말해 무엇 하랴.
너울대는 불길이 굽이치며 솟구치듯,
그렇게 나도 에둘러 애써 의미를 엮어 짰다.
하지만 내가 법석을 떠는 동안 한 벗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이 모든 장황한 겉치레는 얼마나 빗나간 것인가!
사랑 안에는 미리 적어 둔 달콤함이 있으니,
그것만 베끼고 수고를 덜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