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딸들
이준섭이 옮긴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의 ≪불의 딸들(Les filles du feu)≫
현실을 압도하는 기억
단 한 번 만났지만 그녀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눈앞의 여자는 그녀를 반추하는 스크린에 불과하다. 영화는 끝났지만 주인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극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매일 저녁 나는 구애자답게 성장을 하고 무대 앞 칸막이 좌석에 나타나는 것이 상례였다. 때로는 모든 것이 충만해 있었고, 때로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겨우 30여 명의 연극 애호가연하는 자들이 메우고 있는 일층 뒷좌석이나 챙 없는 모자를 쓰고 구식 치장을 한 사람들이 차 있는 칸막이 좌석을 바라본들, 또한 화사한 옷차림과 번쩍이는 보석과 환한 얼굴들이 층층을 메우고 웅성거려 생기 넘치는 관중석의 분위기에 젖어 본들, 내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실내 광경에는 무관심했고 연극도 거의 내 마음을 끌지 못했다. 다만 당시 걸작이라는 한 지루한 작품의 제2장이나 3장에서는 예외였다. 아주 낯익은 모습의 여인이 나타나 텅 빈 공간을 비쳐 주고, 나를 둘러싼 이 공허한 얼굴들에게 한 번의 숨결과 한마디 말로 활기를 불어넣을 때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실비, 발루아의 추억>, ≪불의 딸들≫,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219쪽
‘나’는 누구인가?
여배우를 사랑하는 남자다. 여배우를 보러 연극 공연장에 간 그는 근처 클럽에서 고향의 꽃다발 축제 기사를 읽게 된다. 그러고는 3년 전 축제 때 아드리엔과 원무를 췄던 추억에 빠져든다.
아드리엔은 누구인가?
그가 첫눈에 반한 여자다. 그때 그에게는 실비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울린다. 원무를 추다가 아드리엔에게 마음을 뺏긴 것을 실비가 보았기 때문이다. 실비에게 상처를 남긴 채 파리로 떠난다.
아드리엔과의 사랑이 시작되는가?
아니다. 한 번 만난 뒤 더는 보지 못한다. 그녀가 수녀원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아드리엔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고향에 남은 실비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실비와의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가?
몇 해가 흘러 그녀를 만난다. 그러나 아드리엔을 잊지 못한다. 실비에게 적극 구애하지 못한다. 실비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다.
두 여자를 잃고 무엇을 하는가?
파리로 돌아간다. 거기서 여배우 오렐리를 만난다. 사랑을 고백한다.
이번에는 진짜로 사랑하는가?
아니다. 여전히 아드리엔을 잊지 못한다. 오렐리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당신은, ‘여배우인 내가 그 수녀와 동일 인물입니다’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군요. 당신은 하나의 드라마를 찾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대단원이 빗나갔습니다. 자, 이제 난 당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이별을 고한다.
세 번째 여자를 잃고 그는 어떻게 하는가?
실비를 데리고 오렐리의 공연을 보러 간다. 오렐리가 아드리엔을 닮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실비는 한숨을 쉬며 아드리엔이 1832년에 수도원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실비, 발루아의 추억>은 어떤 작품인가?
≪불의 딸들≫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작가 특유의 서정성과 낭만성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품 중 한 편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보여 주는가?
젊었을 때 얻을 수도 있었던 옛 사랑의 행복을 상기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감명 깊게 표현한다.
자전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제라르 드 네르발이 젊은 시절에 겪은 사랑의 실패와 몽상이 뒤섞여 있다.
아드리엔, 실비, 오렐리의 실제 모델은 누구인가?
아드리엔은 학자마다 의견이 나뉘는데 대부분 영국의 여배우였던 마담 드 푀셰르로 본다. 실비의 모델은 작가의 어린 시절 마을 처녀들을, 오렐리는 네르발과 사귀었던 여배우 제니 콜롱이라고 간주한다.
≪불의 딸들≫은 어떤 책인가?
1854년에 출간된 네르발의 작품집이다. 19세기의 위대한 책이다.
어떤 작품이 실렸는가?
중단편 소설로는 <실비, 발루아의 추억> 외에도 <앙젤리크>, <제미>, <옥타비>, <이시스>, <에밀리>가 있고, 희곡으로는 <코리야>, 여러 시편의 연작인 <몽상의 시> 가 있다.
제라르 드 네르발은 누구인가?
1855년 파리의 으슥한 골목길에서 자살한 이후 20세기 초까지 고국인 프랑스에서도 잊혀진 작가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네르발을 ‘가장 프랑스적인 서정시인’으로 꼽는다.
잊혀진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프랑스인들은 네르발이 광증에 시달렸기에 그의 작품들도 이해할 수 없는 광증의 발로로 보았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오해를 샀다.
어떤 오해인가?
그의 작품은 광증의 결과이므로 일반 논리에서 이탈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와서 프루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작품은 재평가된다.
재평가의 내용은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실비, 발루아의 추억>을 걸작이라고 평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앙드레 브르통과 그의 동료들은 네르발의 무의식 세계를 발견하고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내세웠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준섭이다.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