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2627호 | 2015년 6월 9일 발행
희망에서 절망으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고근영이 옮긴 존 오즈번(John Osborne)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희망을 말한다.
절망은 무엇을 말하나?
희망하면 절망도 희망이 되는가?
오즈번의 대답은 “노”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말로 얻을 수 없다.
앨리슨: 지미가 엄마에 대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늙고, 뚱뚱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나쁜 년이라고 했다고요. “엄마가 죽어 땅에 묻히면 벌레들이 큰 잔치를 벌일 거”라고 했죠, 아마.
대령: 그랬구나. 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니?
앨리슨: 오, 그인 아버지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를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이가 아버질 좋아하는 이유는 아버지를 동정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말이 아버지에게 상처가 될 거란 걸 충분히 의식하면서) 아빠가 “에드워드 왕조의 황무지에 남겨진 채, 도대체 왜 태양이 다시 빛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억센 풀 한 포기” (살짝 머뭇거리며) 같다며 불쌍하다나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즈번 지음, 고근영 옮김, 145쪽
지미가 앨리슨의 남편인가?
그렇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왜 반대했나?
출신이 달랐다. 지미는 노동계급, 앨리슨은 당대 영국 상류층이었다. 어머니는 결혼을 막으려고 사설탐정을 시켜 지미를 감시한다.
결혼해서는 잘 사나?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엘리슨이 말한다. 빈털터리 지미가 그녀를 이용한다. 앨리슨의 지인들을 찾아가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고 협박도 일삼는다.
그럼 왜 결혼한 것인가?
지미가 복수를 위해 자신과 결혼했다고 앨리슨은 생각한다.
무엇에 대한 복수인가?
기득권에 대한 복수다. 지미는 앨리슨을 인질처럼 다룬다. 상류층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갈등은 계급투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동족 투쟁이기도 하다.
어떤 동족들인가?
기성세대에 맞서 ‘성난 목소리’로 변화와 혁명을 요구하는 지미,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드는 앨리슨. 지미는 앨리슨의 무기력한 태도를 향해 분노한다.
이 시절 영국에서 왜 지미가 나타나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미국에게 세계 지배의 패권을 빼앗겼다. 기득권층이 책임질 일이었지만 그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여전히 기득권에 연연한다. 젊은이들은 참전 후유증인 경제난에 시달린다. 기득권층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점점 더 깊어진다. 지미는 그런 영국 젊은이의 표상이다.
앨리슨은 지미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는가?
동요하지 않던 앨리슨도 끝까지 버티지는 못한다. 지미가 집을 비운 사이 짐을 챙겨 떠난다. 임신한 몸이었다.
지미는 어떻게 되는가?
앨리슨의 친구로 지미와는 앙숙이었던 헬레나가 엘리슨의 자리를 채운다. 지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앨리슨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
임신한 앨리슨은 어떻게 하는가?
몇 개월 뒤에 유산한다. 그러고는 지미와 헬레나를 찾아온다. 화를 내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를 방해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헬레나가 앨리슨의 그런 태도를 비난하고 떠난다.
앨리슨과 지미는 어떻게 되는가?
앨리슨은 아이, 곧 희망을 잃고 좌절을 겪는다. 이것이 지미가 앨리슨에게 그토록 깨우쳐 주고 싶어 했던 감정이었다. 둘은 좌절감을 공유하며 진흙탕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진흙탕으로의 귀환이 이 극의 결론인가?
이 극은 도덕적 결론을 끌어내거나 현실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좌절과 각성을 통해 환상을 걷어 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게 한다. 자발적으로 변화 의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 연극계는 이런 오즈번의 야심에 격렬한 공감을 보낸다.
얼마나 격렬했나?
관객의 인식 변화를 통한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극 운동이 시작된다. 사회극 운동은 이후 20여 년간 영국 연극계를 이끌었다.
이 작품에 대한 관객 반응은?
노동계급의 지리멸렬한 삶을 극사실적으로 그려 낸 이 작품을 보고 불쾌감과 피로감을 느꼈다. 몇몇은 극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런 관객 반응은 오즈번이 원하던 바였다.
오즈번이 관객에게 원한 게 뭔가?
추상화된 현실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을 경험하길 바랐다. 그래야 스스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할 계기와 동력이 생긴다고 믿은 것이다. 듣고 싶지 않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을 경험한 관객은 구경꾼이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했다.
존 오즈번이 누구인가?
이 작품으로 영국 연극계에 활기를 불어넣은 극작가이자 배우다. “the first Angry Young Man” 곧 최초의 성난 젊은이가 되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고근영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한다. 현대 영미 희곡을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