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 살 때에 벌써 중국, 아프리카, 인도의 그림을 구분할 수 있었던 헤세는 서양의 신비적이며 기독교적인 경건주의에서 출발하면서, 일생 동안 인도와 중국 사상의 동양적 분위기 속에서 “정신적 고향”을 발견한다. 그러한 한 그는 운명적으로 동양과 서양, 자연과 정신, 예술가와 사상가, 은둔자와 속세인, 모성과 부성(父性)의 수많은 대립 사이에 흔들거리는 일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비틀거리는 인생에서는 물론 시적인 창작 활동에서도 모든 것을 양극 사이에 긴장시킨다. 인간으로서의 헤세는 “어떤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형성체가 아니라 하나의 시도이며 변화다. 그는 바로 자연과 정신 사이에 놓인 좁고 위험한 다리다. 가장 내면적 운명은 그를 정신으로, 신으로 몰아대고 가장 절실한 동경은 그를 자연으로, 어머니로 이끌어 간다. 이 두개의 힘 사이에서 그의 인생은 불안에 떨면서 흔들거린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는 신비스런 감정과 신앙에서 일찍부터 인생의 날카로운 대립의 극복에 대한 가능성을 예감한다. 훗날에 고대 중국의 정신세계를 접하고 이에 몰두함으로써 양극성과 단일성에 대한 태곳적 관념을 인식하게 되고, 드디어는 “특별한 사랑”을 느끼고 있는 동양의 지혜에서 자신의 예감에 대한 확증을 발견한다. 즉, 양극적 대립성을 내포한 전 긍정적이며 조화적인 전일 사상, 모든 어둡고 밝은 면을 포함한 전체적 인생에 대한 활발한 긍정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음과 양이 합해 하나가 되고, 음과 양이 변해 삼라만상이 된다고 하는 유희,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어 세상을 만들고, 그 자연의 조화 속에서 인간이 태어나고 죽어 가고 또다시 태어난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주적 유희를 그려 낸다.
그의 문학 전체에서 볼 때, 이 세상 모든 것이 긍정되고 모든 것은 하나이며 똑같이 좋고 신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커다란 전일성 속에서의 음과 양, 혹은 선과 악이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아니라, 서로 보충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양극이기 때문이다. 바로 전일적이며 조화적인 단일 사상이라는 문학 정신 속에서 헤르만 헤세라는 인간과 그 인생의 운명적인 균열도 조화를 이루며 지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번역한 <인도의 시(詩)>라는 부제를 가진 성장 소설 ≪싯다르타≫(1922)에 이 근본정신이 가장 잘 나타난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장 높은 승족(僧族)인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다. 싯다르타는 진리를 찾기 위해 학문과 고행, 쾌락과 부귀영화를 모두 체험하지만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몸을 물에 던져 죽으려던 찰나였다. 새롭게 각성한 싯다르타는 물을 관조함으로써 자기 방랑과 구도(救道)의 목적지에 도달한다. 세상의 모든 대립이 그에겐 이제 하나로 융해된다. 성인(聖人)이 된 싯다르타에게는 정신과 자연, 사상과 육욕(肉慾), 선과 악의 대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단일성의 한 극(極)으로서 똑같이 긍정되는 것이다.
이 책에 함께 번역 수록한 ≪인도의 이력서≫는 싯다르타와 마찬가지로 인도인 다사를 주인공으로 해서 마야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현상 세계가 마야, 즉 환영(幻影)이라는 것을 각성하는데, 작가는 여기에서도 우주 만유의 전일성(全一性)에 대한 체험을 서술한다. 그 주인공 다사는 ≪유리알 유희≫에서 끊임없이 환생하는 크네히트 영혼들 중 하나다. 그는 구도(求道) 생활 끝에 현세를 마야로 각성하고 양극적 세상만사를 하나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정신에서 헤세는 내면으로의 길을 가며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방랑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삶에 충실한 경건함을 강조하며 자기 내면으로의 길을 가라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설파한다. 헤세는 이러한 삶에 대해 우주 만유를 “전체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이 전체 속에 철저히 정돈된 그 무엇으로 편입해 포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전체를 상징하는 자아와 조화롭게 하나가 되고, 고요히 미소 지으며 세상과 합일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삶을 헤세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헤세는 만유를 사랑하고 긍정하면서 전 세계의 모든 시대에 존재했고 현존하는 중요한 정신을 모두 자기 인생관과 세계관에 받아들인다. 그리고 삶의 온갖 대립과 모순을 포괄하는 우주적 문학 정신을 작품으로 창조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크나 큰 위안을 안겨 준다. 그는 세상만사를 수용하며 초월하는 도인(道人) 같은 시인이라 하겠다.
200자평
인도를 배경으로 한 ≪싯다르타≫와 ≪유리알 유희≫의 삽화 <인도의 이력서>를 함께 묶었다. 동양을 영혼의 본향으로 여기고 동양 사상을 통해 만유의 단일성에 도달한 헤세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들이다. 국내 첫 헤세 박사이자 한국헤세학회장을 지낸 이인웅 교수의 약 80쪽에 달하는 해설이 방랑하는 헤세의 영혼을 따라 독자를 안내한다.
지은이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칼브에서 선교사인 아버지 요하네스와 선교사의 딸로 인도에서 성장한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고향 칼브와 스위스 바젤에서 유년기를 지내고, 라틴어 학교를 거쳐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시인이 되거나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7개월 만에 도망친다. 서점에서 일하며 1898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를 발표한다. ≪페터 카멘친트≫(1904)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신문 잡지에 기고하며,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 포로 후생 사업소에 근무하지만, 1916년 아버지 사망, 부인의 정신 분열증, 막내아들 발병으로 충격을 받고, 카를 구스타프 융과 B. 랑 박사에게 정신 치료를 받는다. 1919년 가족을 떠나 스위스 남부의 몬타뇰라로 이주해 수채화를 그리고, 싱클레어라는 익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한다.
1924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고, 루트 벵거와 재혼한다. 히피들의 성서가 된 ≪황야의 이리≫(1927)로 절정을 이루지만, 1939∼1945년 헤세 작품은 독일에서 “원치 않는 문학”이 되고, 나치 관청은 책 출판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술사가 니논 돌빈과 세 번째 결혼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로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베른대학 명예박사, 괴테 문학상, 독일 서적 협회 평화상 수상 등 세계적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1962년 8월 9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옮긴이
이인웅(李仁雄)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청주중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독일 정부 초청(DAAD) 장학생으로 뮌헨대학교와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72년 헤르만 헤세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획실장, 교무처장, 통역대학원장, 부총장 등의 보직을 수행하고, 문교부 국어 심의회 외래어 표기 분과위원, 교육부 국비 유학 자문위원, 한국 학술진흥재단 인문 분과위원(장), 각종 고등 고시위원, 한독협회지 초대 편집인, 한국헤세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장, ADeKo(독일 동문 네트워크) 이사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명예교수다.
지은 책으로 ≪Ostasiatische Anschauungen im Werk Hermann Hesses≫(독일), ≪작가론 헤르만 헤세≫(편저),≪현대 독일 문학 비평≫,≪헤르만 헤세와 동양의 지혜≫,≪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선(禪). 나의 신앙≫, ≪수레바퀴 아래서≫, ≪이별을 하고 건강하여라≫, ≪크눌프. 황야의 이리≫, ≪인도 여행≫, 수필선 ≪최초의 모험≫, ≪헤세 시선≫ ;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과 도로테아≫, ≪파우스트≫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방송극집 ≪고장≫ ;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 밀레나에게≫ 등 50여 권이 있다. 그리고 학술 논문으로 <Hermann Hesse und die taoistische Philosophie>(스위스), <헤르만 헤세와 불교>, <I Ging, das Buch der Wandlungen, im Glasperlenspiel von H. Hesse>(독일), <헤세의 도가 사상>, <괴테의 ‘초고 파우스트’ 연구>, <파우스트의 구원과 그 문제성>, <그라베의 대립적 세계관>, <정신 분석과 헤세의 문학 창조> 등 50여 편이 있다. 그 외에도 문학과 삶에 관해 각종 신문 잡지 등에 250여 편의 글을 쓰고, 여러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국내외에서 많은 초청 강연을 했다.
차례
싯다르타
제1부
바라문의 아들
사문(沙門)들 곁에서
고타마
깨달음
제2부
카말라
어린애 같은 사람들 곁에서
윤회
강가에서
뱃사공
아들
옴
고빈다
인도의 이력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는 이미 종종 이 모든 소리를, 강물 속에 깃든 이 수많은 소리들을 들어 왔다. 오늘은 그 소리가 새롭게 울려왔다. 벌써 그는 그 많은 소리들을 더 이상 서로 구분할 수 없었다. 기쁜 소리와 슬픈 소리, 어린애 소리와 어른 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움에 젖은 비탄의 소리와 깨달은 자의 웃음소리, 분노에 찬 외침 소리와 죽어 가는 자의 신음 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였다. 모든 것이 서로서로 뒤엉킨 채 결합해 있었고, 수천 겹으로 휘감겨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함께, 일체의 소리, 일체의 목적,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이 함께 세상을 이루었다. 모든 것이 함께 사건의 강물을 이루고,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