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 모노가타리
아시아 고전 특집 6. 일본편
민병훈이 옮긴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
깬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닌
그런 밤을 지새우고 남자는 노래를 지어 보낸다. 봄비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고. 9세기 일본을 풍미했던 한 남자의 숨결이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안개처럼 퍼진다.
옛날, 한 남자가 있었다. 옛 도읍인 나라(奈良)를 떠나 천도한 이 마을에 아직 인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때였는데, 도성 안 서쪽에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세간의 보통 여자들보다 용모가 뛰어났다. 게다가 용모보다 마음이 더 아름다웠다. 남자가 없는 몸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랜 시간 그 여자와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그 순진한 남자는 무슨 생각이 든 것일까. 때는 3월 1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여자에게 노래를 읊어 보냈다.
깨어 있지도 자지도 않고 밤을 지새우고는
봄비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냅니다
おきもせず 寝もせで夜を 明かしては
春のものとて ながめくらしつ
≪이세 모노가타리≫ 제2단 <서경(西の京)>, 작자 미상, 민병훈 옮김, 6쪽
≪이세 모노가타리≫는 어떤 작품인가?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우타모노가타리 모음집이다. 나라(奈良)의 가스가 마을(春日の里)에서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 임종을 앞둔 남자의 이야기로 끝난다.
우타모노가타리가 무엇인가?
직역하면 ‘노래 이야기’다. 일본 고유의 정형시 와카와 그 와카를 읊은 연유를 설명하는 지문으로 구성된다.
지문은 우타모노가타리의 특징인가?
가집에도 머리말에 해당하는 ‘고토바가키(詞書)’가 있다. 노래를 읊은 사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우타모노가타리의 지문은 그와 다르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다.
무엇이 문학란 말인가?
작자가 특정 의도를 가지고 허구를 사용해 구체적 장면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인가?
인용문 속의 와카는 ≪고금 와카집(古今和歌集)≫에도 실려 있다. 그 고토바가키는 “3월 초하루부터 남몰래 어떤 여인과 정담을 나눈 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에 읊어 보냈다”고 말한다. 이것을 위의 지문과 비교해 보라.
위의 지문에서 허구는 무엇인가?
‘한 남자’라는 주체, ‘새로 천도한 마을’이라는 장소, ‘도성 안의 다른 남자가 있는 아름다운 여자’라는 설정은 모두 허구다. 와카에 서정의 배경을 더한다. 이 작품을 가집이나 설화집이라 부르지 않고 모노가타리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타모노가타리는 언제부터 창작되었나?
이 작품이 효시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성립됐다. ≪고사기≫와 ≪만엽집≫에서 가요와 와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우타가타리(歌語り)’가 보인다. 이것을 문학의 한 장르로 발전시킨 것이다.
가집과 모노가타리의 중간 단계인가?
그렇다. 모노가타리의 선구적 형태다. 특히 ≪이세 모노가타리≫는 일본이 세계 최고의 근대적 소설이라고 자랑하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구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세 모노가타리”가 무슨 뜻인가?
직역하면 ‘이세 지방에 있던 이야기’라는 뜻이다. 본문 69단의 배경이 이세 지방인데 여기서 비롯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주인공 남자는 누구인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헤이안 시대의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로 추정한다.
그는 누구인가?
헤이안 육가선(六歌仙) 중 한 사람이다. 아보 친왕의 다섯째 아들로 우근위중장에 올랐기에 자이고추조(在五中将)라고도 부른다. 825년에 태어나 880년에 죽었다.
추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가집에서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와카가 ‘남자’의 와카로 자주 인용된다. 행적도 비슷하다. 위의 와카도 ≪고금 와카집≫에는 그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
이 책은 그의 일대기인가?
아니다. 대부분 허구다. 이 책에 실린 209수의 와카 중 실제 나리히라의 노래는 45수 정도뿐이다. 그의 역사적 일화나 와카를 직접 도입한 단에도 허구를 사용해 창작했다.
그가 모델로 설정된 이유는 무엇인가?
헤이안 시대 아름다움의 기준인 ‘미야비(みやび)’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미야비란 무엇인가?
‘도회적 세련미’다. 연애를 즐길 줄 알고 와카에 능숙하며 풍류를 아는 사람을 말한다. 나리히라는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와카로 많은 스캔들을 남긴 당대 최고의 풍류남이었다.
이 작품은 누가 썼나?
알 수 없다. 아리와라씨 중 누군가가 나리히라의 가집을 바탕으로 모노가타리를 제작했을 것이다. 이후 여러 편자들이 여기에 다른 노래들을 도입해 재구성, 증보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민병훈이다. 대전대 일어일문학과 부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