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활주로
얼룩
마음은 또 어딘가로 가서/ 머물려 한다. 풀뿌리 밑 캄캄한/ 혼곤한 물의 속, 또는 감나무 밝은 윗가지로./ 그러나 그들은 다방에 마주 앉아서,/ 서로를 지나 유리에 비친 바깥을 내다볼 뿐.// 감꽃 노란 꽃은 오월에 피죠 그걸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두르면 감나무 위 하늘이 얼마나 깊어 보이던지… 여자는 또/ 감나무를 그려 보인다. 메모지에 몇 방울 커피가/ 떨어져 갈색의 반점이 나무둥치에 찍힌다./ 그러나 지금은 시월, 흰 건물 속으로/ 구름 날으는 게 유리에 비치고, 벽 속의/ 배수관을 통해 차가운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대구의 시월 풍경은 길 건너편 백화점 유리에/ 다 비쳐진다. 감나무도 감꽃도 보이지 않고,/ 문득 시든 가로수 사이로 승용차가 한 대 곤두박질치고/ 신호등이 빨갛게 마네킹의 가슴 위로 켜진다./ 누가죽었는가봐요교통위반이겠지. 여자는 창밖을/ 내다보지만 이내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 버린다./ 전등갓 주위로 어둠은 일렁이고/ 일찍이 감꽃 목걸이를 걸었던 그 목이/ 빛과 그늘로 얼룩진다.// 그들은 다방을 나와 헤어진다./ 다방 종업원은 탁자 위에 널린 감나무 그림들을/ 쓰레기통 속에 쓸어 넣는다. 길 건너편 백화점 유리창에/ 손 흔드는 여자의 모습이 잠깐 비치다간/ 사라져 버린다. 마네킹의 가슴에 비친/ 네거리의 신호등이 파란 불을 켠다.
≪이하석 육필시집 부서진 활주로≫, 42~45쪽
마음은 또 어딘가 머물려 한다.
그러나 대화는 겉돌고
감나무도 감꽃도 보이지 않는다.
시월, 도시, 머물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