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광균 시선
십일월달이면 세종로는 안개에 잠긴다.
해가 진 뒤 빌딩들이 등불을 켤 때면
광화문 네거리는 꽃밭이 된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리고
실루엣이 되어
안개 속에 사라져 가는 靑年들
겨울을 기다리는 가로수 사이로
안개는 물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지난 밤비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나는 雨傘을 쓰고 안개 속을 걸어간다.
아−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나의 친구들은 어디 있을까.
광화문 근처 골목을 지나가면
朴寅煥이 옛날 살던 집 추녀에
낯설은 등불이 하나 안개에 젖어 있다.
먼저 떠나간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이런 밤에는
그들이 부른 노래 멀리서 들려온다
노래소리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안개가 조용히 뒤따라온다.
≪초판본 김광균 시선≫, 114~115쪽
아름다운 밤
친구들은 어디 있을까.
십일월 세종로는 안개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