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작품집
2567호 | 2015년 5월 1일 발행
이청준의 현실, 관념의 이편
김연숙이 엮은 ≪초판본 이청준 작품집≫
한국 현대에서 형과 동생
한국 전쟁을 겪은 형은 병신이다.
행동하지만 잃을 뿐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동생은 머저리다.
생각은 자유롭지만 얻지 못한다.
경험과 관념은 실천과 개념이 되지 못했다.
한국의 현대사다.
형은 나를 쏘아본 채 손으로는 계속 원고를 뜯어 불에 넣고 있었다.
“임마, 넌 머저리 병신이다. 알았어?”
형이 또 소리를 꽥 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끄덕이고 나서는,
“그런데 말야….”
갑자기 장난스럽게 손짓을 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형은 손에서 원고 뭉치를 떨어뜨리고 나의 귀를 잡아끌었다. 술 냄새가 호흡을 타고 내장까지 스며들 것 같았다. 형은 아주머니까지도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나 된 것처럼 귀에다 입을 대고 가만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넌 내가 소설을 불태우는 이유를 묻지 않는군….”
<병신과 머저리>, ≪초판본 이청준 작품집≫, 이청준 지음, 김연숙 엮음, 65쪽
형이 소설을 태우는 이유가 뭔가?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에서 자신이 죽인 인물을 현실에서 만났다. 소설에서 “이제 놈을 아주 죽여 없앴으니 내일부턴… 일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만남으로 소설이 “쓸데없는 게 되어” 버렸다.
소설가인가?
아니다. 의사다. 정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어떤 상처인가?
“달포 전 그의 칼끝이 열 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내 버린 사건”, 그리고 술걸레가 되어 털어놓은 적이 있는, 전쟁터에서 동료를 죽이고 살아 돌아온 경험이다.
소설의 내용은?
자신이 경험한 10년 전의 패잔(敗殘)과 탈출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오관모 이등중사, 김 일병, ‘나’다.
누구인가, 그들은?
관모는 자신의 생존과 성욕만을 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평소에도 꼬리 밟힌 독사처럼 약이 바짝 올라서 김 일병을 두들겨 팼다. 그러다 셋만 낙오되어 강계 어느 산골 동굴에 남게 된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
김 일병이 부상을 입었다. 관모의 이기심은 부상당한 김 일병을 죽게 만들었다. 형은 그런 ‘관모’를 죽이는 소설 결말을 선택한다.
소설 속 관모의 죽음으로 문제는 해소되는가?
관념적 해결일 뿐이다. 현실에서 관모가 다시 등장했다.
다시 등장한 관모의 모습은?
“여어, 너 살아 있었구나” 하고 형의 등을 탁 쳤다. 그래 놓고는 두려워 비실비실 물러서면서 “이거 미안하게 됐다구” 영 시치밀 뗐다.
여기서 관모는 무엇인가?
‘관모’로 상징되는 현실은 이기심과 생존 욕구다. 이 작품은 개인이 관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그 문제가 실제 현실에서 해결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병신은 누구고, 머저리는 누구인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을 체험한 형을 ‘병신’으로,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동생을 ‘머저리’로 그렸다. 이들은 각기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경험’과 ‘관념’의 세계에 기댄다. 행동하는 인물과 회의하는 인물의 대립이다.
동생의 회의하는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화가인 동생은 소극적 사랑으로 실연에 이른다. 그에게는 형과 같은 뚜렷한 상처도 없고, 근원이 분명한 심리적 고통도 없다. 자신이 지닌 상처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치유 방법도 찾을 수 없다. 떠나가는 여인을 붙잡지 못하고, 그림으로 억눌린 욕구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청준에게 소설 쓰기란 무엇인가?
‘씻김굿’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씻기고, 사회를 씻기고, 마침내 우리 삶의 비의와 본질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 이청준의 소설론이다.
문학이 현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가?
<비화밀교>에서 제기한 질문이다. 그는 글쓰기 자체를 현실에 대한 복수라고 규정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의 허구를 파헤치지만 결국 용서하고 화해한다. 소망과 기다림을 통해 구원의 실마리를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연숙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