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불온한 천재, 허균의 서늘한 시선
주류에서 밀려난 이단자들의 이야기, 조선에 균열을 만들다
허균을 단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로만 알고 있다면, 아직 그의 진짜 얼굴을 절반도 모르는 것이다. 허균이 실제 《홍길동전》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균 문학의 진정한 정수이자 그의 전복적인 사상이 가장 날것으로 남긴 텍스트는 무엇일까? 바로 그가 직접 교류하거나 듣보았던 인물들의 삶을 기록한 ‘오전(五傳)’이다. 이 책 《허균 오전, 다섯 사람 이야기》는 허균이 자신의 저작임을 확정한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에 수록된 다섯 편의 전(傳),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남궁선생전〉, 〈장생전〉을 번역해 묶은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압도적인 매력은 주인공들의 면면일 것이다. 조선 시대의 ‘전(傳)’이란 본래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대부나 고관대작을 기리기 위한 장르였다. 그러나 허균은 이러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철저히 세상에서 밀려난 비주류들을 역사의 전면에 끌어올렸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릉 초야에 묻혀 살았던 ‘엄충정(嚴忠貞)’,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떠돌아야 했던 불운한 천재 시인 ‘이달(李達)’, 병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부리며 사람들을 도왔던 ‘장한웅(張漢雄)’, 살인을 저지른 후 입산해 먹지 않고 자지 않는 극한의 신선 수련을 감행한 ‘남궁두(南宮斗)’, 걸식으로 살아가는 거지임에도 기이한 행적으로 여러 사람을 매혹했던 ‘장생(蔣生)’이 그들이다. 유교적 신분 질서가 절대적이었던 조선 시대에, 철저히 주류 밖으로 밀려난 이단자들을 향해 이토록 뜨거운 헌사를 바친 지식인은 허균이 유일할 것이다.
오랫동안 허균을 연구해 온 김영연 박사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관물헌본 《성소부부고》를 중심으로 총 4종의 이본을 꼼꼼히 대조해 정본으로 번역해 냈다. 나아가 허균의 문학적 성취가 명나라 강남 문인 문화와의 교류 속에서 어떻게 정립되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을 더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4백 년 전의 질서에 균열을 냈던 불온한 천재의 서늘한 시선과 묵직한 인간학을 동시에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무엇이 불온하고, 어째서 천재일까? 이 책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다섯 편의 전, ‘오전(五傳)’의 번역서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대부를 기린다는 ‘전(傳)’의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허균은 철저히 주류에서 밀려난 이단자들에 주목했다. 평생 초야에 묻혀 쓰이지 못한 선비, 서얼 출신의 천재 시인, 저마다의 이유로 세상과 섞이지 못한 이인(異人)들. 낡은 시대의 위선을 찌른 서늘하고도 묵직한 허균의 인간학을 만난다.
지은이
허균(許筠)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떤 사람인가? 흔히 허균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또는 반역을 기도하다가 처형된 인물로 운위된다.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적서 차별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허균의 평소 염원을 반영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의견은 허균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적대적 인물의 전언(傳言)에만 등장할 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허균이 반역을 도모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반역죄로 처형된 여타 인물의 경우와 달리, 허균에 대해서는 직접적 물증 없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으로 사형이 결정되었기에 ‘훗날 반드시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기도 할 정도다.
이처럼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에도 위의 두 가지 사안은 학교 교육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 결과 일반 대중이 허균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허균에 관한 직접 경험이 아니라 허균에 대한 소문을 채록한 야사(野史) 계통의 자료에 의존한 현대의 전언들이 허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증폭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허균의 면모는 그런 대중적인 인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조선 시대를 풍미한 사상과 문화, 정치 제도에 순응한 점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여느 관료 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허균은 유가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 대한 학습 및 내재화, 충효라는 덕목에 대한 숭상과 실천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으로 인정한다. 본서에 수록한 〈엄처사전〉은 물론, 〈학산초담〉을 비롯한 초기작이나 허균의 나이 40대 초반에 쓴 〈학론(學論)〉(1610) 같은 글에서 일관되게 이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흔히 허균이 당대 관료나 사대부 문인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지녔다 해 운위되는 것이 불교 서적이나 도가 사상에 대한 애호라고들 한다. 하지만 도가적 어휘가 대거 등장하는 〈남궁선생전〉을 쓴 이후에도 〈학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정치의 기본 원리로서 성리학의 기본적 사유 방식을 옹호한 점은 특기될 필요가 있다.
또한 허균이 혁명 내지 사회 개혁을 도모한 인물로 거론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호민론〉이다. 〈호민론〉에 피력된 입장은 민(民)의 역량에 대한 호감과 긍정이 아니라, 민의 불만을 조기에 무마해야 기성 지배층의 안정적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는 점이 최근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다. 민에 대한 허균의 입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며, 이 점은 본서에 수록한 〈남궁선생전〉의 조회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기성의 가치에 상당히 동조하는 가운데 주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인물이다. 40대 이후에 정계의 고위직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그에 응했던 사실은 허균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연마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상류층이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문화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대부분 그의 사회적 지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자원들에 힘입고 있다. 가령 허균의 척독과 같은 초단형(超斷形)의 편지 양식이나, 그의 산문 창작에 있어서 중요한 참조점이 된 《세설신어》 같은 책은 단지 허균이라는 한 개인의 기호에 의해 개발되거나 주목된 책이 아니다.
선조−광해군 연간 조선 문단에서는 명대 문학, 특히 강남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애호된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허균 역시 이러한 동향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설신어》 역시 강남 사대부들 사이에서 16세기에 재발견되고 주목된 서적 중 하나다. 한 단락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의 일화나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동원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의 품성을 간결하게 스케치하는 《세설신어》의 스타일은 위진 남북조 시대에 나온 것이지만, 당시 명대 문학을 선도하고 있던 16세기 강남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6세기 말 명대 문단을 주도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에 의해 1585년에 《세설신어보》가 출간되고, 이어서 《세설신어》를 모방한 각종 후속 작품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대 강남 사대부 문인 그룹 내에서 《세설신어》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대 강남의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문화적 소양이 일천한 신흥 부유층이 부상했고, 이들의 도전에 응전하는 기성 사대부 계층은 자신들이야말로 선천적인 차원에서 우수한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정립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지(李贄, 1527∼1602)나 원굉도(袁宏道, 1568∼1610)처럼 문학에 있어 개성 표현의 가치를 중시한 것도, 강남 지역의 그러한 문화적 동향의 한 단면으로, 기성 사대부들의 문화적 권위를 수성하려는 경향의 한 지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시야에 넣고 다시 허균의 저 유명한 발언,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라는 개성 중시의 선언을 되짚어 보면, 일견 독창성을 중시하는 듯한 허균의 지향 역시 보다 넓은 문화적 흐름의 일부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실로 허균은 《세설신어》를 비롯해 왕세정으로 집약되는 강남 문인 사회의 문예적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허균은 그의 〈사우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세설체 저작의 저자이자 왕세정과 더불어 강남의 문예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인 하량준(何良俊, 1506∼1573)의 글에 대해서도 열렬한 호감을 표했다. 특히 명 사신이자 강남 출신 문인인 주지번(朱之蕃, 1558∼1624)과 1606년에 직접 만난 이후로는, 강남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회화, 서예, 미식 등 다채로운 문화적 활동 전반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해 갔다. 작문에 있어서도 기성의 전범이나 관습을 답습하기보다 글쓴이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 역시 주지번과의 만남 이후 뚜렷하게 정식화된다. 요컨대 동시대 조선 관료 문인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허균의 개성도 좀 더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일정한 문화적 동향과의 동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짚어 본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허균은 당대 조선 사회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고급문화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소양을 형성해 나갔으며, 결국 허균의 문학적 성취와 개성 강조의 문학론은 단순한 개인의 독창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문화와 명대 강남 문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옮긴이
김영연
김영연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허균 오전(五傳)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에서 〈허균(許筠) 산문의 한정(閒情)과 선취(仙趣)〉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16∼17세기 한문 산문과 한문 소설이다. 이 시기 관료 문인 작가들의 작품과 사상사, 문화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허균의 신이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허균 산문과 명대 문학의 관련성 재고〉, 〈논변류 산문을 통해 본 허균의 정치 담론〉, 〈17세기 초 관료 산문에 나타난 ‘한가함[閒]’의 의미 변화〉 등이 있다. 공저로 〈Confucianism in Korea : Choson Dynasty〉(《The Oxford Handbook of Confucianism》), 〈Pak Chiwon, “On Names”(名論 : Myongnon)〉(《Premodern Korean Literary Prose : An Anthology》)가 있다.
차례
허균 오전
엄처사전(嚴處士傳)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장산인전(張山人傳)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
원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장산인(張山人)은 이름이 한웅으로,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할아버지부터 삼대에 걸쳐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 업을 이어왔다. 장산인의 아버지는 상륙을 먹고 귀신을 볼 수도 있고 부릴 수도 있게 되었다. 나이 98세 때에도 마치 마흔 살쯤 된 듯 보였는데 출가하여 마침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장산인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면서 책 두 권을 장산인에게 맡겼으니, 그 책은 바로 《옥추경》과 《운화현추》였다. 장산인이 그 책을 받아 만 번을 읽고 나자 그도 귀신을 부를 수 있었으며, 학질을 치료하면 늘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장산인은 마흔 살에 출가해 지리산에 들어갔다. 거기서 이인(異人)을 만나 연마법을 전수받았고 또 《수진십서》를 읽었으며, 빈 암자에 들어앉아 3년쯤 먹지 않았다.
_〈장산인전(張山人傳)〉 중에서
몸은 여위고 피곤해졌고 눈앞이 캄캄해 사물을 분간 못 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검은콩 가루를 먹은 지 21일째 되던 날, 갑자기 배부른 느낌이 들고 먹을 것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장로는 즉시 잣나무 잎과 참깨를 먹게 했다. 그러자 며칠간 온몸에 부스럼이 나더니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백일이 지나자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면서 새살이 돋아 평소와 다름없이 되었다.
장로는 기뻐하며 말했다.
“자네는 참으로 그릇이 좋네. 이제 욕념만 끊으면 돼.”
_〈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중에서
장생은 용모가 매우 수려했고 얼굴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흥미진진하게 막힘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잘했을 뿐 아니라 기교 있게 노래를 잘해서 소리를 내기만 하면 그 처절한 음색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장생은 늘 자주색 비단으로 된 겹옷을 입고 다니면서 여름이든 겨울이든 갈아입지 않았다. 장생은 온갖 유곽에 빠짐없이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잘 알고 지냈다. 술이 있기만 하면 항상 스스로 술잔을 가득 채워 마시고는 노래를 불러서 기쁨을 한껏 고조시킨 후에 자리를 떴다. 간혹 술자리가 무르익은 때에는 맹인 점쟁이나 취한 무당, 게으른 유자(儒者), 버림받은 아내, 거지, 늙은 유모가 하는 일을 흉내 내었는데 종류별로 매우 진짜에 가깝게 따라 했다. 또 십팔나한의 표정을 흉내 내기도 했는데 꼭 닮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또 입을 오므려서 피리, 비파, 기러기, 고니, 무수리, 집오리, 갈까마귀, 학 따위가 내는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밤에 닭 울고 개 짖는 소리를 내면 근처에 있던 개와 닭이 다 함께 짖고 울어 댈 정도였다.
_〈장생전(蔣生傳)〉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