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1930년대에 활동했던 다른 많은 여성 작가가 여성들의 일상적 삶과 낭만적 사랑의 문제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강경애는 식민지 지배자에게서 그리고 남성에게서 이중으로 억압받는 여성의 힘겨운 삶의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강경애 작품집≫에 수록된 <소곰>(1934)과 <지하촌(地下村)>(1936)은 특히 이러한 작가의 현실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주를 무대로 한 <소곰>은 젊은 시절을 북간도에서 보냈던 강경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식민지 현실을 살아내야 했던 여성들의 열악한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봉염 어머니 일가는 생계를 위해 간도로 이주해 간 조선의 유민(流民)들이다. 그녀는 마적단에 의해 남편이,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아들이 죽자 딸 봉염과 함께 중국인 팡둥의 집에 거처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중국인 팡둥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갖게 되는데, 팡둥 부인의 질투로 곧 내쳐져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팡둥의 집에서 쫓겨난 봉염 어머니는 비 오는 날 중국인 집의 헛간에서 핏덩이를 낳지만, 생존을 위해 다른 집의 젖어미 노릇을 하는 사이에 갓 낳은 아이는 물론 봉염까지 잃게 된다. 남편과 아들은 물론 두 딸마저 잃게 된 봉염 어머니는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조선에서 소금을 가져다 중국에 몰래 파는 일에 나서게 되는데, 작품은 이렇게 힘겹게 소금을 져온 봉염 어머니가 중국의 관헌들에게 붙잡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지하촌>은 식민지 시대 황해도 송화 근처의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칠성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팔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불구자로, 이 동네 저 동네 아이들로부터 구박을 받으면서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동냥을 다닌다. 그러면서도 이미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이웃집의 눈먼 처녀 큰년이를 마음에 품고 가족 몰래 큰년이에게 줄 옷감을 준비하는 등 이성애에 눈뜬 인물인데, 이런 칠성이의 소박한 꿈과 생존에의 욕망은 무지와 가난, 그리고 가진 사람들의 홀대로 인해 좌절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칠성은 자신이 사랑하던 큰년이마저 부잣집으로 팔려가듯 시집갔다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 가족들을 위해 동냥질을 하면서도 남몰래 큰년이에게 줄 옷감을 끊어 간직해오던 칠성은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칠성은 더 놀라운 광경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상처 난 데에는 쥐 가죽이 약이라는 말을 듣고 그의 어머니가 쥐를 잡아 막냇동생의 머리에 쥐 가죽을 붙여놓았는데, 그 바람에 머리의 상처에 구더기가 들끓게 되어 머리를 긁어대다가 혼절한 동생의 머리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민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그릇된 믿음과 무지가 부른 처참한 결과다. 이 대목은 강경애 소설의 사실주의적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악할 만한 장면이다.
강경애의 중편소설 <소곰>과 <지하촌>은, 식민지 시대 절대 궁핍의 시절을 살아야 했던 이 땅의 가엾은 빈민들의 삶의 실상과, 그것에도 굴하지 않고 그러한 궁핍을 이겨나가려고 했던 빈민들의 적극적인 삶의 의지를 그려냄으로써 식민지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초기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적잖은 작가들이 이념의 과잉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작품들을 많이 생산해내지 못했던 정황을 감안하면, 강경애의 이 작품들은 그 경험의 구체성과 특히 몇 겹의 굴레에 갇혀 있던 여성 삶의 문제성을 치열하게 부각시킨 작품으로서 지나간 시대 우리 사실주의 소설의 한 전형으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200자평
식민지 시대의 여성 작가 강경애의 중편소설 <지하촌(地下村)>과 <소곰>을 ≪강경애 작품집≫에 담았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만주 등지를 유랑하던 체험, 그 체험 가운데 특히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 일제 치하의 비참한 노동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 등이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은이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군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장연군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성장한다. 강경애의 술회에 의하면, 그녀는 이 시절에 집안에 있던 ≪춘향전≫ 등과 같은 고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1921년에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했으나, 1923년 10월 엄격한 종교 생활에 항의해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하자 동경 유학생이던 무애 양주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다.
강경애는 1924년 5월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책 한 권>이라는 시를 가명으로 발표하고, 1925년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1931년에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연재함으로써 비로소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장연 군청에 고원으로 부임한 장하일과 결혼하지만 장하일의 조혼한 아내로 인해 인천과 간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생활한다.
이후 <그 여자>(1932), <부자>(1933), <소곰>(1934)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장연과 만주 간도 등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1934년 그녀는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연재한다. 이 작품은 황해도 용연과 인천을 배경으로 하여 농민들의 힘겨운 삶과 도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 문제작이다.
1936년 강경애는 용정에서 안수길·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 동인을 결성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해에 <지하촌>과 같은 사실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며, 일본의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조선판에 <장산곶>을 발표한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했으나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2월에 사영해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어 1944년 4월 26일 생을 마감한다.
엮은이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평단에 나왔다.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염상섭 장편소설 연구≫, ≪현대소설의 유형≫, ≪공공의 상상력≫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하촌(地下村)
소곰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애기는 언제 그 헌겁을 찌젓는지 반쯤 헌겁이 찌저젓고 그리로부터 쌀알 가튼 구데기가 설렁설렁 내달아 오고 잇다.
“아이구머니. 이게 웬일이냐. 응. 이게 웬일이어!”
어머니는 와락 기어가서 헌겁을 잡아 제치니 쥐 가죽이 딸려 일어나고 피를 문 구데기가 아글바글 떨어진다.
– <지하촌> 83쪽
봉염의 어머니는 봉염이가 알른 것을 보구 가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그는 속옷 바람으로 명수의 집을 벗어났다. 그가 젖유모로 처음 들어갔을 때 밤마다 옷을 벗지 못하고 누었다가는 명수네 식구가 잠만 들면 봉희를 찾아와서 젖을 먹이군 하였다. 이 눈치를 채인 명수 어머니는 밤마다 눈을 밝히고 감시하는 바람에 그 후로는 감히 옷을 입지 못하고 누었다가는 틈만 있으면 벗은 채로 달아오는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 <소곰>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