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재야의 은군자 96명의 이야기
진(晉)나라의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지은 ≪고사전≫은 중국 고대 필기류 인물 전기집 가운데 하나로, 총 91조의 짤막한 고사에 요(堯) 시대의 피의(被衣)부터 위나라 말의 초선(焦先)까지 청고(淸高)한 고사 96명의 언행과 일화를 수록하고 있다.
‘고사(高士)’는 ‘품행이 고상한 선비’ 또는 ‘재야의 은군자’를 뜻하는 말로 ‘은사(隱士)’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조정이나 지방의 관리로 일하는 문인 사대부와 달리,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니고 성명(性命)을 보전하면서 부귀영달을 하찮게 여기는 부류를 ‘은사’라 하며, 처사(處士)·일사(逸士)·유인(幽人)·고인(高人)·처인(處人)·일민(逸民)·유민(遺民)·은자(隱者)·은군자(隱君子) 등으로도 부른다. 이러한 고사층(高士層)이 형성된 것은 사회적으로는 춘추 전국, 전한 말, 후한 말, 위진(魏晉) 교체 시기 등 혼란한 시대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처세 방법 모색 덕분이었으며, 사상적으로는 난세에 풍미했던 도가(道家)의 피세 은일(避世隱逸) 사상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난세에 선비의 표상을 보이다
황보밀은 <고사전서>에서 ≪고사전≫을 편찬하게 된 배경을 ≪사기≫와 ≪한서≫에 ‘고사’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거나 소략한 점을 보충하기 위한 것과 이전에 양홍과 소순 등이 지었던 일민과 고사에 대한 전(傳)의 선록 표준(選錄標準)이 순수하지 못하고 선록 인물의 범위가 협소한 점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황보밀이 살았던 시기는 후한 말에서 서진 초까지인데, 이 시기는 후한 말의 농민 봉기로부터 시작해 위·촉·오 삼국의 쟁패가 일어났고 다시 조씨(曹氏) 집단과 사마씨(司馬氏) 집단의 투쟁이 이어졌던 그야말로 어지러운 시대였다. 무상한 권력의 부침에 따라 그와 관련한 사인(士人)들의 안위도 무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가적인 피세 은일 사상이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하게 되었으며, ≪노(老)≫·≪장(莊)≫·≪역(易)≫을 위주로 한 현학(玄學)이 일체의 사상 조류를 압도하게 되었다. 황보밀도 이러한 사상 경향에 입각해서 ≪고사전≫의 선록 인물을 취사선택했는데, ≪고사전≫에 선록된 인물은 바로 평생 벼슬하지 않고 은일의 절조를 지켰던 황보밀 자신의 형상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은일전집(隱逸專集)
이러한 피세 은일적인 경향의 ≪고사전≫은 도가적인 색채를 강하게 풍기며 위진 남북조 소설의 주류 가운데 하나인 지인 소설(志人小說)의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중국 고대 도가 문학과 필기 소설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또한 도연명, 사영운, 왕유, 이백, 두보 등 후대의 여러 문인들이 ≪고사전≫에 실려 있는 고사를 전고(典故)로 즐겨 사용해 그 영향력이 자못 크다. 그리고 ≪고사전≫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은일전집(隱逸專集)’으로 ≪후한서(後漢書)≫ <일민열전(逸民列傳)>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대부분의 후대 정사(正史)에서 <은일전(隱逸傳)>을 따로 두는 기풍을 조성했다.
이 책은 ≪총서집성(叢書集成)≫본[타이베이 : 신원펑출판공사(新文豊出版公司) 영인, 1981]을 저본으로 하고, ≪고금일사(古今逸史)≫본, 왕각(王刻) ≪한위총서구십육종(漢魏叢書九十六種)≫본,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본, ≪비서이십일종(秘書二十一種)≫본, 숭문서국(崇文書局) 개조본(開雕本), ≪사부비요(四部備要)≫본, ≪고사전도상(高士傳圖像)≫본 등을 참고했으며, 교감이 필요한 원문에는 교감문을 붙였다.
200자평
‘고사(高士)’는 ‘품행이 고상한 선비’ 또는 ‘재야의 은군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 책은 중국 고대 필기류 인물전기집 가운데 하나로 총 91조의 짤막한 고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요(堯) 시대의 피의(被衣)로부터 위 말(魏末)의 초선(焦先)까지 청고(淸高)한 고사들의 언행과 일화를 수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은일전집’으로 후대 중국의 은일문학(隱逸文學)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오랫동안 중국 필기문헌을 전문적으로 연구 번역해 온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22년 만에 기존의 번역을 모두 새로이 교감, 수정해 오류를 바로잡고 독자들의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발문과 역대 저록을 번역해 부록으로 삽입했다.
지은이
≪고사전(高士傳)≫의 찬자 황보밀(皇甫謐, 215∼282)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20년(215)에 태어나 삼국 시대를 거쳐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3년(282)에 죽었다. 후한 태위(太尉) 황보숭(皇甫嵩)의 증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정(靜), 자는 사안(士安), 자호는 현안 선생(玄晏先生)이다. 여러 전적과 제자백가서에 널리 통달했으며, 평생 벼슬하지 않고 저술에 전념했다. 진(晉)나라 무제가 여러 차례 초징의 뜻을 밝혔으나 끝내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제자인 지우(摯虞)·장궤(張軌)·우종(牛綜)·석순(席純) 등은 모두 진나라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주요 저작으로는 <삼도부서(三都賦序)>·<석권론(釋勸論)>·<현수론(玄守論)>·<독종론(篤終論)> 등의 문장, ≪제왕세기(帝王世紀)≫·≪연력(年曆)≫·≪고사전≫·≪일사전(逸士傳)≫·≪열녀전(列女傳)≫ 등의 역사 전기서, ≪현안춘추(玄晏春秋)≫·≪음양역술(陰陽歷術)≫·≪귀곡자주(鬼谷子注)≫ 등의 철학서,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 등의 의학서가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고사전 서(高士傳序)
권상
1. 피의(被衣)
2. 왕예(王倪)
3. 설결(齧缺)
4. 소부(巢父)
5. 허유(許由)
6. 선권(善卷)
7. 자주지부(子州支父)
8. 양부(壤父)
9. 석호지농(石戶之農)
10. 포의자(蒲衣子)
11. 피구공(披裘公)
12. 강상장인(江上丈人)
13. 소신직(小臣稷)
14. 현고(弦高)
15. 상용(商容)
16. 노자 이이(老子李耳)
17. 경상초(庚桑楚)
18. 노래자(老萊子)
19. 임유(林類)
20. 영계기(榮啓期)
21. 하궤(荷蕢)
22. 장저 걸익(長沮桀溺)
23. 석문수(石門守)
24. 하조장인(荷篠丈人)
25. 육통(陸通)
26. 증삼(曾參)
27. 안회(顔回)
28. 원헌(原憲)
권중
29. 한음장인(漢陰丈人)
30. 호구자림(壺丘子林)
31. 노상씨(老商氏)
32. 열어구(列禦寇)
33. 장주(莊周)
34. 단간목(段干木)
35. 동곽순자(東郭順子)
36. 공의잠(公儀潛)
37. 왕두(王斗)
38. 안촉(顔斶)
39. 검루 선생(黔婁先生)
40. 진중자(陳仲子)
41. 어부(漁父)
42. 안기생(安期生)
43. 하상장인(河上丈人)
44. 악신공(樂臣公)
45. 개공(蓋公)
46. 사호(四皓)
47. 황석공(黃石公)
48. 노이징사(魯二徵士)
49. 전하(田何)
50. 왕생(王生)
51. 지준(摯峻)
52. 한복(韓福)
53. 성공(成公)
54. 안구망지(安丘望之)
55. 송승지(宋勝之)
56. 장중위(張仲蔚)
57. 엄준(嚴遵)
58. 팽성 노부(彭城老父)
59. 한순(韓順)
60. 정박(鄭樸)
61. 이홍(李弘)
62. 상장(向長)
63. 민공(閔貢)
권하
64. 왕패(王霸)
65. 엄광(嚴光)
66. 우뇌(牛牢)
67. 동해 은자(東海隱者)
68. 양홍(梁鴻)
69. 고회(高恢)
70. 대동(臺佟)
71. 한강(韓康)
72. 구흔(丘訢)
73. 교신(矯愼)
74. 임당(任棠)
75. 지순(摯恂)
76. 법진(法眞)
77. 한빈 노부(漢濱老父)
78. 서치(徐穉)
79. 하복(夏馥)
80. 곽태(郭太)
81. 신도반(申屠蟠)
82. 원굉(袁閎)
83. 강굉(姜肱)
84. 관영(管寧)
85. 정현(鄭玄)
86. 임안(任安)
87. 방공(龐公)
88. 강기(姜岐)
89. 순정(荀靖)
90. 호소(胡昭)
91. 초선(焦先)
부록
1. 발문(跋文) 2종
2. 역대 저록(著錄)
≪고사전≫ 수록 고사의 주요 채록 출처와 후대 인용처 간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고사전 서(高士傳序)
공자가 말하길, “[주(周)나라 무왕(武王)께서] 일민(逸民)을 들어 쓰시니 천하의 민심이 주나라로 돌아갔다”라고 했다. 홍애 선생(洪厓先生)은 상황[上皇 : 복희(伏羲)] 시대에 높은 도를 만들었고, 허유(許由)와 선권(善卷)은 당(唐 : 요)·우(虞 : 순) 시대에 절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주역(周易)≫에는 속백(束帛)의 예법이 있고 ≪의례(儀禮)≫에는 원훈(元纁)의 제도가 있으며, ≪시경(詩經)≫의 시인은 <백구(白駒)>의 노래를 불렀고 ≪춘추(春秋)≫에서는 자장(子臧)의 절조를 선양했으며, 명당(明堂)의 월령(月令)에서는 늦봄에 명사를 초빙하고 현자를 예우했다. 그러므로 고상한 현사(賢士)는 왕정(王政)에서 우선하는 바이며, 혼탁함과 탐욕스러움을 고치도록 격려하는 데 모범이 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과 반고(班固)[의 ≪한서≫]의 기록에는 빠지고 소략한 부분이 많으며, 양홍(梁鴻)은 일민에 대한 찬송을 짓고 소순(蘇順)은 고사(高士)를 품류(品類)했지만 간혹 절조를 굽힌 자를 수록한지라 뒤섞여 순수하지 못하다. 또한 가까이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에서 취하고 먼 옛날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저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 그 집의 나무까지도 사랑하게 되거늘 하물며 그 덕을 칭송하고 그 일을 칭찬함에랴! 나는 고금 팔대(八代 : 요·순·하·은·주·진·한·위)의 선비 중에서 몸을 왕공에게 굽히지 않고 이름을 평생 훼손하지 않은 자로 요임금 시대부터 위(魏)나라 때까지 무릇 90여 명을 채록했다. 하지만 비록 절조를 지킴이 이제(夷齊 : 백이·숙제)와 같고 거취가 양공(兩龔 : 공승·공사)과 같다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모두 수록하지 않았다.
안촉(顔斶)
안촉은 제(齊)나라 사람이다. 선왕(宣王)이 그를 만났을 때 선왕이 말했다.
“촉은 앞으로 나오라!”
안촉이 역시 말했다.
“왕께서 앞으로 나오시오!”
선왕이 불쾌해하자 좌우 신하들이 말했다.
“왕은 군주이고 촉은 신하인데, 왕께서 ‘촉은 앞으로 나오라’라고 하시자 촉 역시 ‘왕께서 앞으로 나오시오’라고 했으니 그래도 되겠는가?”
안촉이 대답했다.
“대저 제가 앞으로 나간다면 권세를 흠모하는 것이 되고 왕께서 앞으로 나오시면 선비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저에게 권세를 흠모하도록 하는 것은 왕에게 선비를 구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선왕이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왕이 귀한가? 선비가 귀한가?”
안촉이 대답했다.
“선비가 귀하지 왕은 귀하지 않습니다.”
선왕이 말했다.
“근거가 있는 말인가?”
안촉이 말했다.
“있습니다. 옛날에 진(秦)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 ‘감히 유하계(柳下季)의 무덤으로부터 50보 안에서 나무하는 자는 용서 없이 처형한다’는 영(令)을 내렸고, ‘제나라 왕의 머리를 얻을 수 있는 자에게는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고 황금 1000일(鎰)을 하사한다’는 영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살아 있는 왕의 머리는 죽은 선비의 무덤만도 못한 것입니다.”
선왕이 이어서 말했다.
“안 선생이 과인과 함께 지낸다면 최고의 요리를 먹고 편안한 수레를 타며 처자식은 화려한 의복을 입을 것이오.”
하지만 안촉은 사양하고 떠나며 말했다.
“저는 돌아가길 원합니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 고기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편안히 걸으면 수레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죄가 없으면 귀한 것과 마찬가지이니, 맑고 깨끗하고 곧고 바른 마음이면 스스로 즐거울 뿐입니다.”
그러고는 끝내 사양하고 떠나갔다.
진중자(陳仲子)
진중자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그의 형 진대(陳戴)가 제나라의 경(卿)이 되어 봉록이 만 종(鍾)이나 되었는데, 진중자는 이를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처자를 데리고 초(楚)나라로 가서 오릉(於陵)에 살면서 스스로 “오릉중자(於陵仲子)”라고 불렀다. 빈궁했지만 구차하게 구하지 않았으며, 의롭지 못한 음식은 먹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사흘 동안 식량이 떨어졌을 때 간신히 기어가서 우물가의 오얏나무 열매 속에 들어 있는 벌레까지 먹었는데, 세 번 삼키고 나서야 앞을 볼 수 있었다. 그 자신은 직접 신발을 짜고 부인은 삼실을 자아 입을 것, 먹을 것과 바꾸었다. 초나라 왕은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재상으로 삼고자 해서, 사신을 보내 황금 100일(鎰)을 가지고 오릉으로 가서 진중자를 초빙하도록 했다. 이에 진중자가 집으로 들어가서 부인에게 말했다.
“초나라 왕이 나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는데, 오늘 재상이 되면 내일엔 성대한 수레를 타고 앞에 수많은 진수성찬을 늘어놓고 먹을 테니 괜찮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당신의 왼쪽엔 금(琴)이 있고 오른쪽엔 책이 있으니 즐거움은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성대한 수레를 탄다 하더라도 편안한 것은 두 무릎을 들여놓을 만한 공간에 불과하고, 앞에 수많은 진수성찬을 늘어놓고 먹는다 하더라도 맛있는 것은 고기 한 점에 불과합니다. 지금 무릎을 들여놓을 만한 공간의 편안함과 고기 한 점의 맛 때문에 초나라의 근심을 떠안게 된다면, 어지러운 세상에는 해로움이 많은지라 당신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리하여 진중자는 나가서 사신에게 사양의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함께 도망가서 다른 사람을 위해 밭에 물 대 주는 일을 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