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했던 영원한 여행자였다. 자연인으로서 그의 삶이 그러했듯, 그의 시는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면서도 어김없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우리 앞에 선다. 그는 쉼 없이 ‘지금-여기의 나’를 되묻는다.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은 우리 각자의 삶에 비추어 보아도 여전히 유효하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네루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출간한 이 얄팍한 시집은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춘기와 괴로운 열정과 테무코의 자연이 어우러지는 이 시집은 ‘봄이 벚나무와 하는 행위를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속삭이는 인간과 우주의 에로스적 친화에 뿌리를 둔 상상력이다.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의 결과인 이 고통스러운 책에는 날카로운 우수에도 불구하고 기억과 향기 가득한 존재의 즐거움이 있다. 세상의 문을 열고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역사와 인류 보편에 대한 광대한 전망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도 어둠을 엿보지 않는 시인의 건강한 상상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지상의 거처≫
네루다가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 시집은 ≪지상의 거처≫라고 할 수 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 엿보이던 우수는 이 시집에서 고뇌로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상실감과 그로 인한 번뇌가 세계의 상실과 파괴로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네루다는 “사람으로 사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고 노래한다.
세계는 변했고, 그의 시도 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네루다는 절친한 벗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미겔 에르난데스를 잃는 비극을 겪는다. 혁명과 반혁명이 맞부딪쳤던 고뇌의 시대에 네루다는 역사를 끌어안기 위해 고독과 절망의 시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는 이제 ‘거리의 피’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고, 궁핍한 현실을 시에 담는다. 암울했던 당시의 세계는 네루다에게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고, 그는 위기의 세계에 맞서고 역사적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독특한 방식을 의미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한다.
200자평
파블로 네루다의 방대한 시세계를 대표하는 시 65편을 엄선해 스페인어 원전을 사용해 번역한 ≪네루다 시선≫이다. 기존 번역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시집에서 뽑아낸 주옥같은 시를 다수 실었으며, 전문가의 자세하고도 친절한 해설과 주석은 한 줄 한 줄 마음을 울리는 그의 시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지은이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는 1904년 7월 12일, 칠레 중부의 파랄에서 철도원이었던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였으나 열여섯이 되던 해에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927년, 미얀마 양곤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네덜란드계의 마리아 안토니타와 결혼한다. 그녀와의 사이에 딸이 태어나지만 날 때부터 뇌수종을 앓았던 아이는 1943년 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네루다는 일생 동안 세 번 결혼하지만 이때의 충격 때문인지 단 한 명의 자식도 남기지 않았다.
1948년, 정부가 파업 중인 광산노동자를 탄압하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하의 상원 연설을 발표해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검거령이 내려진다.1952년 검거령이 철회되자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해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 정착한 그는 시작(詩作)에 몰두하며 1953년에는 스탈린평화상을 수상한다. 1971년 칠레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투병 중이던 시인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 속에 쿠데타 발발 12일 만인 9월 23일, 6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산티아고의 집은 약탈당하고 책은 불태워졌으며, 시인은 집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쿠데타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치러진 장례식에서의 시위는 군사독재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시위로 기록되었다.
옮긴이
김현균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마드리드 국립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봄에 부르는 가을 노래. 루벤 다리오 시선≫(글누림, 2012), ≪Arranca esa foto y úsala para limpiarte el culo≫(Bonobos, 2011), ≪Tengo derecho a destruirme≫(Bajo la Luna, 2011), ≪시간의 목소리≫(후마니타스, 2011), ≪부적≫(열린책들, 2010),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창비, 2010),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유문화사, 2009), ≪아디오스≫(창비, 2008), ≪빠블로 네루다≫(공역, 생각의나무, 2005),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다락방, 2005),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열림원, 2005), ≪히스패닉 세계≫(공역, 새물결, 2003) 등의 역서가 있고, 저서로는 ≪라티노/라티나−혼성문화의 빛과 그림자≫(공편, 한울, 2013), ≪차이를 넘어 공존으로≫(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환멸의 세계와 매혹의 언어≫(공저, 한국문화사, 2004) 등이 있다.
전공 분야는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으로, 멕시코 시인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니까노르 빠라의 시에 나타난 시적 자아에 관한 연구>, <≪의심스러운 해협≫: 상호텍스트 전략과 과거의 현재적 읽기>,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남쪽>: 기억의 문화와 새로운 국가의 지도 그리기>, <한국 속의 빠블로 네루다>, <라틴아메리카 비교문학의 동향과 전망> 등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에 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황혼일기>
작별
불빛 없는 동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
6
7
8
15
18
20
<지상의 거처>
시학(詩學)
화물선의 유령
홀아비의 탱고
오직 죽음뿐
바르카롤라
배회
셀러리의 절정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바치는 송가
알베르토 로하스 히메네스가 날아오다
망각은 없다(소나타)
<제3의 거처>
그 이유를 말해 주지
<모두의 노래>
내 사랑 아메리카(1400)
새들이 오다
마추픽추 산정
해방자들
족장의 훈육
반란의 아메리카(1800)
타타 나초의 음악으로 에밀리아노 사파타에게
산디노(1926)
천상의 시인들
유나이티드프루트사(La United Fruit Co.)
아메리카여, 그대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리라
찬가와 귀환(1939)
대지의 이름은 후안
나무꾼이여 깨어나라 6
커다란 기쁨
나는 살리라(1949)
나의 당에게
<대장의 노래>
작은 아메리카
<기본적인 것들에 바치는 송가>
엉겅퀴에 바치는 송가
양파에 바치는 송가
희망에 바치는 송가
소박한 사람에게 바치는 송가
시간에 바치는 송가
토마토에 바치는 송가
옷에 바치는 송가
슬픔에 바치는 송가
<기본적인 것들에 바치는 새로운 송가>:
양말에 바치는 송가
<에스트라바가리오>
얼마나 살까?
침묵하자
인어와 술꾼들의 우화
점(點)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여럿
기차의 꿈
목재를 보내 달라고 청하는 편지
마침내, 무아경에서 연인에게 편지를 쓰다
<백 편의 사랑 소네트>
1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
시(詩)
파도 속의 독백
진실
<세상의 끝>
세상 만들기
<겨울 정원>
겨울 정원
개가 죽었다
<질문의 책>
3
44
해설
지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배회
때로는 사람으로 사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멍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시원(始原)과 재의 물 위를
떠다니는 펠트 백조처럼.
이발소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엘리베이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이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때로는 사람으로 사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붓꽃 한 송이를 꺾어 공증인을 깜짝 놀라게 한다거나
수녀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겨 저세상으로 보내 버린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꽥꽥 소리를 질러 대며 시퍼런 칼을 품고
거리를 활보하다 얼어 죽는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나는 더 이상 어둠 속 뿌리이고 싶지 않다.
떨며, 꿈결인 듯 몸서리치며, 아래로,
대지의 축축한 내장 속으로 길게 뻗은 채,
매일매일 빨아들이고 생각하고 먹어 치우는.
내게 닥칠 그 숱한 불행이 싫다.
더 이상 뿌리와 무덤이고 싶지 않다.
쓸쓸한 지하실이고 싶지 않다, 시체 그득한 창고이고 싶지 않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채, 신음하며 죽어 가고 싶지 않다.
내가 죄수의 얼굴로 도착하는 걸 보면
월요일은 석유처럼 불탄다.
하루가 흐르는 동안 월요일은 찌그러진 바퀴처럼 울부짖다가
밤을 향해 핏빛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나를 밀어붙인다, 구석으로, 축축한 집으로,
창문으로 뼈다귀가 튀어나오는 병원으로,
식초 냄새 풍기는 구둣방으로,
갈라진 틈처럼 무시무시한 거리로.
내가 증오하는 집들의 문에 걸린 소름 끼치는
창자들과 유황색 새들이 있다.
커피 주전자에 잊고 처박아 둔 틀니가.
수치와 공포로 울어야 했을
거울들이 있다.
도처에 우산이, 그리고 독약이, 배꼽이 있다.
나는 태연하게 거닌다, 눈을 부릅뜨고, 구두를 신은 채,
분노하며, 망각을 벗 삼아,
걷는다, 사무실과 정형외과용 의료용품점들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철사 줄에 옷이 널려 있는 마당을 지나친다.
팬티와 타월과 셔츠가 더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그 이유를 말해 주지
너희들은 물을 것이다. 라일락은 어디에 있냐고.
양귀비로 뒤덮인 형이상학은?
또 종종 낱말들을
두들기며 구멍과 새들을
한가득 만들어 놓던 빗줄기는?
내게 일어난 일을 너희들에게 낱낱이 말해 주마.
나는 종(鐘)과
시계와 나무들이 있는,
마드리드의 한 구역에 살았다.
그곳에선 가죽의
대양(大洋) 같은 카스티야의
메마른 얼굴이 바라보였다.
제라늄이 사방에서
꽃망울을 터뜨렸기 때문에 나의 집은
꽃들의 집이라고 불렸다. 개와
아이들이 뛰노는
아름다운 집이었지.
라울, 기억하는가?
라파엘, 그대도 기억하지?
페데리코, 땅속에서,
그대도 기억하는가,
유월의 햇살이 그대 입속의 꽃들을 질식시키던
발코니가 있는 나의 집을?
형제여, 형제여!
큰 목소리로 외치는
모든 것들, 상품들의 소금,
고동치는 빵 덩이들,
메를루사 사이에 조각상이 창백한 잉크병처럼
서 있던 아르구에예스 우리 동네의 시장들.
숟가락에 올리브유가 넘쳐흘렀고,
거리엔 손발의 깊은 맥박
가득했다.
미터, 리터, 삶의
예리한 본질,
켜켜이 쌓인 생선,
풍향계도 지치는
차가운 태양이 걸린 지붕들의 짜임새,
흥분한 감자들의 섬세한 상아(象牙),
굽이치며 바다로 굴러가는 토마토의 물결.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땅에서
화톳불이 치솟아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불길이,
그때부터 화약이,
그때부터 피가.
무어인들과 비행기를 탄 불한당들이,
공작부인들과 반지 낀 불한당들이,
축복의 말을 퍼붓는 검은 수도사들과 불한당들이
하늘을 통해 아이들을 죽이러 왔다.
그리고 거리마다 아이들의 피가
넘쳐흘렀다, 아이들의 피처럼, 단순하게.
자칼들도 멸시할 자칼들아,
메마른 엉겅퀴도 물었다가 뱉어 버릴 돌멩이들아,
독사조차 증오할 독사들아!
나는 스페인의 피가
너희들에 맞서 솟구쳐
긍지와 칼의 도도한 물결 이루며
너희들을 익사시키는 것을 보았다!
반역자
장군들아.
폐허가 된 나의 집을 보라.
박살 난 스페인을 보라.
그러나 무너진 집마다 꽃 대신
불타는 쇳덩이가 나온다.
그러나 스페인의 틈새마다
스페인이 생겨난다.
그러나 죽은 아이마다 눈 달린 총이 나온다.
그러나 죄악마다 언젠가 너희들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을
총탄이 태어난다.
너희들은 물을 것이다. 왜 당신의 시는
꿈과 나뭇잎과 조국의 거대한
화산들에 대해 노래하지 않느냐고.
와서 거리의 피를 보라.
와서 보라,
거리의 피를.
와서 보라, 피를,
거리에 뿌려진!
·시(詩)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44
한때 나였던 소년은 어디에 있을까.
계속 내 안에 남아 있나, 아니면 떠나 버렸나?
난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아니?
이렇게 헤어지고 말 것을 왜 우린
그 오랜 세월 함께 성장하며 보냈을까?
나의 유년 시절이 스러져 갔을 때
왜 우리 둘은 죽지 않았을까?
그 영혼은 내게서 떠나갔는데
왜 해골은 나를 뒤쫓아 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