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작가 장혁주. 일제 말기엔 창씨개명과 친일 활동 면모를 보였다. 일본 문단으로 진출해 일어 창작까지 하다가 1945년 이후 일본에 귀화했다. ≪삼곡선≫은 장혁주가 남긴 한글 소설 12편 중 하나다.
식민지 시기의 작가 장혁주는 일본 문단에 진출해 주로 일본어로 소설을 썼고 해방 후에는 일본에 귀화했다. 일제 말기의 뚜렷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장혁주 하면 ‘친일 작가’라는 사실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최근에는 재일 디아스포라 작가의 효시로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동했던 작가 김사량이 ‘재일 조선인의 비참한 삶과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형상화한 작가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 장혁주의 경우는 그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작가적 삶이나 작품 세계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평가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장혁주 작품 세계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여서 좀 더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귀도>, <쫓기는 사람들>, <권이라는 사나이> 등 장혁주의 주요작은 모두 일본어로 창작되어 국내의 독자 및 연구자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삼곡선≫은 장혁주의 조선어 소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면서 작품 세계의 변모를 살필 수 있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
장혁주의 한글 소설은 <연풍(戀風)>, <계약(契約)> 등의 단편과 ≪무지개≫ 등 4편의 장편을 포함해 12편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모두 1933년에서 1940년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이 시기 작가는 일본어와 조선어 창작을 병행했으나 일본어 창작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에 연재된 장편소설로는 ≪무지개≫(1933∼1934년, ≪동아일보≫), ≪삼곡선≫(1934∼1935년, ≪동아일보≫), ≪여명기≫(1936년, 연재 도중 ≪동아일보≫ 무기정간), ≪여인 초상≫(1940년, ≪매일신보≫)이 있다.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특징이 있어서인지 이 작품들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 등 가볍고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작가의 생각 또한 비교적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편이다. 작가는 “조선문 소설을 쓸 때 (…) 조선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 되어지라는 욕망”을 느끼지만 “그 이상을 표면에는 나타내지 아니하고, 작품 속에 숨겨 버린다”고 하는데, ≪삼곡선≫에는 그러한 작가의 욕망이 특별한 소설적 장치를 통하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삼곡선≫은 그 문학적 성취도는 그리 높다고 볼 수 없지만 장혁주의 작가적 성향을 들여다보기에는 좋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200자평
친일 행적 끝에 일본으로 귀화한 작가 장혁주. 1934년에 쓴 ≪삼곡선≫은 일반적인 연애소설로 보이나 사실은 장혁주가 친일로 기울게 된 힌트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장혁주는 일제라는 타자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봤다.
지은이
장혁주는 1905년 10월 7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구(舊) 한국군 장교였던 장두화의 서자로 태어났다. 출생과 관련된 생래적 열등의식은 그의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구고보 3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인 언사를 문제 삼아 돌입한 동맹휴학에 참가해 무기정학을 당했다가 10월경에 복학하는 사건이 있었다. 1927년경부터 소설에 뜻을 두어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교원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어 작품을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투고했지만 몰수당하는 일이 많아지자 일본어 창작에 비중을 두게 된다. 1930년 일본 잡지 ≪대지에 서다≫에 일본어 단편 <백양목(白楊木)>을 게재했다. 또 1932년에는 ≪개조≫지의 소설 현상 모집에 <아귀도(餓鬼道)>가 2등으로 입선했다. 이후 조선어 장편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등을 발표했고 일본어 소설 <형의 다리를 자른 남자>, <권이라는 사나이>, <쫓기는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1936년 5월 무렵에는 소설가 백신애와 사귀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발각되어 6월 하순에 도쿄로 건너가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하숙집 주인의 친척인 노구치 하나코[통명(通名)은 게이코(桂子)]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고 나가노현 가미스와에서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1939년 2월 장혁주의 친일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을 발표하고 대륙개척문예간화회가 발족하자 이에 참가했으며, 6월에는 척무성 산하 대륙개척문예간화회에서 파견한 제2차 펜부대에 참가해 3개월간 만주 등을 시찰했다. 일제의 패전 이후 장혁주는 자신의 친일 행적에서 기인한 부담감으로 인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1952년 10월 일본에 귀화를 신청하고 창씨명이던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를 일본인 이름으로 등록했다. 이때부터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라는 필명을 사용해 재일 조선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단편 <협박>(1953년), 한국전쟁을 그려낸 ≪무궁화(無窮花)≫(1954년), 자전적 소설 ≪편력의 조서≫(1954년)를 발표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98년 뇌혈전으로 사망했다.
엮은이
차성연은 1972년 서울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만주 이주민 소설의 주권 지향성 연구>, <한국 근대문학의 만주 재현 양상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삼곡선(三曲線)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 사람으로 이런 상계에 진출하는 이가 적으니만큼 앞으로 더욱 힘써 주십시오.”
“네, 뜻만은 그렇게 가지고 있죠. 우리가 농사만 바라고 살 것이 아니니 어떻게 우리의 경제계를 왕성하게 하려면 위선 상권부터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래서 이것을 시작은 했읍니다만은 어디 재력이 부족해서….”
“천만에요. 이 형의 재력이면 이곳에서두 一류이니만치 부족다고야 하겠읍니까. 허나 안일(安逸)과 진취적 이상이 없는 그 뭐라구 할까 퇴만이라구 할까. 그런 것이 우리 사람이 가진 가장 큰 결점이니까요.”
창진이는 상수를 따라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출발할 때에야 정말 굉장들 하겠어요. 여러 사람들의 각종 사업을 보아도 알지오만은 중도에 낙오해 버리구 마는 사람이 많구 그 원인을 캐면 대다수가 안일을 취하려구 하고 더구나 돈푼이나 모아지면 기생 외입이나 그렇지 않으면 첩을 얻는다 연애를 건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