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고대 서사문학의 원형을 정리한 순수 서사 자료집. <아도>에서 <호원>에 이르는 12편의 일문(逸文)들과 다양한 버전의 관련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우리는 문학적 감식안을 가지고 선학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수이전≫은 ‘기이한 것을 전달한다’라는 뜻처럼 문학을 인식하고 쓰인 한국 최초의 고대 서사 자료집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문헌이다.
≪수이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단지 ≪수이전≫에서 옮겨 실었다는 21편의 작품이 후대의 문헌인 13세기 각훈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15세기 성임의 ≪태평통재(太平通載)≫,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노사신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6세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 17세기 권별의 ≪해동잡록(海東雜錄)≫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그중 중복되는 9편을 제외한 12편의 작품을 1장에 ≪수이전≫의 일문으로 수록했다. 또한 같은 인물을 다룬 상이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다른 문헌에 실려 있는 ≪수이전≫ 관련 자료를 2장에 수록했다.
≪수이전≫의 작품 및 해당 수록·관련 문헌
<아도>는 아도의 출생·불교적 행적·죽음을 기록한 이야기인데, 이 부분은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에 인용된 ‘아도본비’의 내용과 일치한다. 창작 시기 면에서 볼 때 ≪삼국유사≫는 ≪해동고승전≫의 내용을 전적으로 참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광>은 여우가 원광의 중국 유학을 도와주고, 원광은 여우의 극락왕생을 도와준 불교 영험담이다. 일연은 원광 사적이 일정하지 않음에 불만을 느끼면서 ≪당속고승전≫·≪고본 수이전≫·≪삼국사≫의 관련 기록 등을 모두 수록했다.
<보개>는 민장사의 관음보살에게 기도해 조난당한 아들이 스님의 인도로 귀환하는 불교 영험담이다. ≪삼국유사≫에는 관음보살의 영험함에, ≪태평통재≫에는 기이한 귀환에 초점이 맞추어져 기술되어 있다.
<최치원>은 최치원이 초현관에 놀러 갔다가 요절한 두 자매의 영혼을 만나 하룻밤의 사랑을 주고받은 이야기다. 여기에는 주인공간에 창화(唱和)한 한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창작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동운부군옥≫과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선녀홍대>는 두 여자가 시를 화답하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태평통재≫ <최치원>의 축약본이라 생각된다.
<지귀>는 활리의 역인(驛人) 지귀가 선덕여왕을 사모하자 왕이 절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자신을 기다리다 잠든 지귀의 가슴에 팔찌를 빼어놓고 왔는데, 사랑을 못 이룬 지귀가 상사병에 걸려 불귀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대동운부군옥≫ <심화요탑>과 ≪해동잡록≫의 내용은 인과성이 결여되어 있으나 대략적인 줄거리는 서로 같다.
<영오세오>는 바닷가에 살던 영오·세오 부부가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건너감과 동시에 일월이 사라지게 되자, 세오가 짠 비단을 얻어와 제사를 지내자 천괴(天怪)가 사라졌다는 일월 전설이다. ≪삼국유사≫ 권1의 <연오랑세오녀>는 이 기록과 줄거리는 같으나, 내용이 더 자세하다. 이런 점에서 ≪필원잡기≫에는 역사에, ≪삼국유사≫에는 전설에 초점이 맞추어져 기술되어 있다고 하겠다.
<탈해>는 난생의 탈해가 신라로 와서 지혜로 호공의 집을 빼앗고 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신화다. ≪삼국유사≫ 권1 탈해 왕조의 기사는 신격화가 짙게 나타나고, ≪삼국사기≫·≪삼국사절요≫ 본문의 내용은 세속화와 합리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모란 씨와 모란 그림을 보내오자,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 없는 꽃임을 예언했는데, 씨를 심어 꽃이 피자 과연 향기가 없었다는 선덕여왕의 지혜담이다. ≪해동잡록≫의 기사는 시간적 배경이 부친 진평왕 때로 되어 있을 뿐 ≪삼국사절요≫의 내용과 대동소이하고,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세 가지 지혜담으로 실려 있다고 볼 때 ≪수이전≫의 찬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게 전해 오던 이야기를 자의로 취택(取擇)했음을 알 수 있다.
<수삽석남>은 부모의 반대로 상사병에 걸려 죽은 최항이 첩을 인도해 자신의 관을 열게 하고, 다시 살아나 20년 동안 해로하다 죽었다는 내용인데, ≪해동잡록≫의 최항도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죽통미녀>는 김유신이 만난 나그네가 죽통 속의 두 여인을 소개하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해동잡록≫의 내용도 ≪대동우분군옥≫의 내용과 대동소이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동잡록≫ ‘김유신 조’의 일부로 존재한다.
<노옹화구>는 김유신을 찾아온 노인이 신술로 여러 짐승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개로 변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해동잡록≫의 내용도 ≪대동우분군옥≫의 내용과 대동소이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동잡록≫ ‘김유신 조’의 일부로 존재한다.
<호원>은 김현이 흥륜사 탑돌이 하다가 호랑이 낭자와 인연을 맺고, 낭자가 죽음으로 김현의 입신출세를 도모하는 이야기인데, ≪해동잡록≫의 기사도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김현감호>는 내용이 인과적으로 전개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볼 때, 이 작품은 <김현감호>의 축약본으로 생각된다.
≪수이전≫의 작가 변증
≪신라 수이전(新羅殊異傳)≫에 대해 언급한 한국의 고문헌은 고려 때 승려 각훈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조선 때 성임의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여러 책이 있다. 이런 여러 문헌 기록에 최치원·박인량·김척명 등 3인이 작자로 언급되어 있다. 즉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수이전(殊異傳)≫의 저자가 박인량이라고 나오며, 조선 명종 때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신라 수이전≫의 저자를 최치원이라 밝혔고, ≪삼국유사≫<원광서학(圓光西學)> 조에서는 김척명이라는 사람이 항간에 떠도는 말로 원광법사의 전을 잘못 기록해 놓았는데, 그 폐단이 <해동고승전>으로 이어졌다면서 ≪수이전≫의 작자를 김척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이전 작자에 대한 연구는 ≪신라 수이전≫과 ≪수이전≫의 동일시 여부에 따른 작자 관계, 원명칭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지금까지도 최치원설, 박인량설, 김척명설, 작자 미확정설, 개작·보완설, 이본설 등 하나의 통일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작자가 문제시되고, 또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논란이 있게 된 것은 성임의 ≪태평통재≫에 출처를 ≪신라 수이전≫이라고 밝힌 전기 <최치원>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권문해의 기록대로 ≪신라 수이전≫을 최치원이 지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가 자신을 모델로 한 전기 <최치원>을 지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며, 더욱이 <최치원>의 말미에 실제 인물 최치원의 만년 생애가 포함되어 있어서 ≪신라 수이전≫의 작자는 최치원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쉽게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최치원이 죽은 후의 문인 중에서 작자를 찾다 보니 ≪해동고승전≫의 기록에 의거해 그 작자를 박인량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 수이전≫ 혹은 ≪수이전≫의 작자를 박인량으로 보거나 아니면 원작 최치원, 보완 박인량, 개작 김척명으로 절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상황이다. 여기서는 박인량이 문장에 능했고, <고금록(古今錄)>이라는 은밀한 역사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수이전≫ 소재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인 <아도>를 박인량의 ≪수이전≫에서 전재했다는 기록을 중시해 ≪수이전≫의 작자를 박인량으로 보고자 했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한국 고대 서사문학의 원형을 정리한 순수 서사 자료집. <수이전>은 ‘기이한 것을 전달한다’라는 뜻처럼 문학을 인식하고 쓰인 한국 최초의 고대 서사 자료집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문헌이다. <아도>에서 <호원>에 이르는 12편의 일문(逸文)들과 다양한 버전의 관련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지은이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호는 소화(小華). 고려 개국공신 수경(守卿)의 현손(玄孫, 高孫子)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해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1075년 요(遼)나라와 고려가 국경 문제로 다툴 때 요나라는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강점하고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자는 제의를 했다. 이에 박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요의 황제에게 보내자, 요 황제가 그의 문장에 감탄해 그 후 고려와의 국경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니 가히 박인량의 글재주를 알 만하다 하겠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080년(문종 34)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송나라 황제가 풍비(風痺)에 쓸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기 위해 호부상서(戶部上書) 유홍(柳洪)과 함께 송나라에 방물(方物)을 바치는 사은사로 갔는데, 저장(浙江)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방물(方物)을 잃은 죄로 귀국하여 죄를 받을 뻔하기도 했다. 문장이 아담하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아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주로 담당했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는 김근(金覲)과 함께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저술한 척독(尺牘)·표(表)·장(狀)·시(詩)를 송나라 사람들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의 시와 문을 엮어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1089년(선종 6)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오르고, 이어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저서로는 책을 지은 뒤 비의(秘意)가 담겨 있어, 은밀한 곳에 간직했다는 ≪고금록(古今錄)≫ 10권과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 작자를 박인량이라고 밝힌 ≪수이전(殊異傳)≫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수이전≫의 작자를 최치원 또는 김척명(金陟明)으로 보기도 하나 최치원을 원편저자(原編著者)로, 박인량을 증보자(增補者)로, 김척명을 개찬자(改撰者)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동문선(東文選)≫에 <사송과사주구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오자서묘(伍子胥廟)>란 제목의 시 2편 외에, <문왕애책(文王哀冊)>·<순덕왕후애책(順德王后哀冊)>이란 제목의 책(冊) 2편, <상대료황제고주표(上大遼皇帝告奏表)>란 제목의 표전(表箋) 1편 및 <입료걸파각장장(入遼乞罷榷長狀)>이란 제목의 장(狀) 1편이 실려 있다. 세 아들 경인(景仁)·경백(景伯)·경산(景山)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써 고려 전기 명가(名家)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옮긴이
충북 제천에서 출생했다. 아호는 갈헌(葛軒)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했다. 수필가이며 육군 제3사관학교 국어과 부교수에 이어 대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임란 전쟁문학 연구>, <조선 후기 실존인물의 사전 연구>, <수이전의 장르적 성격>, <삼국유사의 한문 문체적 연구> 등이 있다. 대표 저서로는 ≪조선 후기 전문학 연구≫, ≪경산의 임란 의병항쟁≫(공저), ≪인간의 마을로 가는 길≫(산문집), ≪에세이 인생독본≫(산문집), ≪손자, 할아버지에게 길을 묻다≫(산문집), ≪문학기행의 이론과 현장≫,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공저), ≪한국 문학의 풍자와 해학≫(공저), ≪삼국시대 한문학 연구≫ 등이 있다.
차례
1장
≪수이전≫ 일문
아도(阿道)
원광(圓光)
보개(寶蓋)
최치원(崔致遠)
지귀(志鬼)
영오와 세오(迎烏細烏)
탈해(脫解)
선덕여왕(善德女王)
머리에 석남 가지를 꽂다(首揷石枏)
대나무 통 속의 미녀(竹筒美女)
늙은이 개로 변하다(老翁化狗)
호랑이의 소원(虎願)
2장
≪수이전≫ 관련 기타 문헌의 자료
아도(阿道)
아도전(阿道傳)
아도가 신라에서 불교의 기반을 닦다(阿道基羅)
원광(圓光)
원광이 당나라에서 배우다(圓光西學)
원광전(圓光傳)
보개(寶蓋)
민장사(敏藏寺)
영오와 세오(迎烏細烏)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細烏女)
탈해(脫解)
탈해왕(脫解王)
탈해(脫解)
석탈해(昔脫解)
선덕여왕(善德女王)
선덕여왕이 세 가지 비의를 알다(善德女王知幾三事)
호랑이의 소원(虎願)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金現感虎)
참고 문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 꽃은 요염하고 귀티가 있어 비록 꽃의 왕이라고 불리우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당 황제가 이것을 보낸 것은 짐이 여자로서 왕이 된 것을 빗댄 것이 아니겠는가? 풍자의 뜻이 있도다.”